211화
“준비된 말이 있나요?”
이수윤은 태흠을 쳐다보며 물었다.
답이 정해져 있느냐는 반문이었다.
“나는 구궁위의 일원이다. 구궁위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 있나?”
태흠은 대답 대신 자신을 소개하며 조균과 이수윤을 번갈아 쳐다봤으나 모르는 눈치여서 말을 이었다.
“맹주님의 수호신위다. 투신이 왜 방어만 하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는지 궁금해 하신다.”
이수윤은 태흠의 말을 듣고 생각을 정리한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답은 투신만 알겠지요. 하지만 그곳에 갇혔던 사람들을 데려가면 구 궁위님에 대한 의심은 풀리겠네요.”
“정확하다.”
태흠은 순순히 인정했다.
‘맹주님이 최측근의 말보다 증인을 선택한 건가? 확실히 달라졌네. 후기지수만 되면 철혈사자맹으로 들어가 승승장구할 줄 알았더니. 쯧.’
조균은 후기지수들의 모임에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맹주님을 뵐 수 있다니 가고 싶긴 하네요. 자넨 어쩔 생각이야?”
이수윤이 조균을 돌아봤다.
“가야지.”
조균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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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대전으로 들어선 조균과 이수윤은 무거운 분위기에 절로 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긴 탁자에는 삼십 대와 사십 대로 보이는 두 사내가 마주 앉은 채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경계하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표정을 보니 우리들처럼 구궁위를 만난 사람들이군.’
조균은 먼저 와 있는 두 사내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수윤과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엄청난 존재감으로 철혈대전을 압도하며 곤룡포를 두른 묵자성이 태사의에 올랐다.
조균 등은 자리에서 일어나 묵자성이 태사의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엉거주춤 착석했다.
“나머지 네 명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어서 이들만 데려왔습니다.”
태흠이 묵자성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고생했다. 따로 사람을 찾기보다 네가 데려온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어 기다렸다. 네 사람,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해 주길 바라오.”
묵자성은 태흠의 공을 인정해 준 뒤, 탁자에 앉아 있는 네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는…….”
“신분을 알고자 부른 것이 아니니 소개는 됐고. 투신과 군림단주 중 이번 싸움에서 누가 이기겠소?”
묵자성은 일어나려던 사내를 제지시키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태흠까지 다섯 명이야말로 투신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 여기고 준비한 자리였던 것이다.
조균 등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눈치를 봤다.
그때, 묵자성의 입이 다시 열렸다.
“팔 궁위, 내게 보고했던 내용을 말해 줘.”
묵자성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측 벽에서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다가와 태흠과 나란히 선 채 허리를 숙였다.
“군림단주의 나이, 얼굴, 무공 등에 대해서는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군림단은 사천성에서 단원 스물여덟 명만을 움직였으나, 강호로 나온 뒤에는 더 늘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근…….”
슥.
묵자성이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종남파의 비보는 다들 알 테니 넘어가지. 누가 먼저 말해 보겠소?”
묵자성의 시선이 조균 등 넷에게 향했다.
‘진심이시다.’
‘숨 막히네.’
조균과 이수윤은 묵자성이 자신들에게 의견을 물어볼 줄은 몰랐기에 당황해서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나 시선 교환은 오래가지 않았다.
묵자성이 던진 질문에 답하기 위해 투신과 같이 갇혔던 동굴에서의 기억과 종남파 장로 강혁의 무공에 대한 사문 어른들의 평가를 동시에 떠올렸다.
압도.
투신과 같은 공간에 있을 때 조균과 이수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강혁 대장로의 수완은 대단하지만 무공 또한…….
―강혁 대장로의 무공은 철혈사자맹의 장로들 중 소림, 무당, 우리 화산파 다음…….
“투신이 이길 것 같습니다.”
조균과 이수윤에게서 동시에 같은 대답이 나왔다.
대답을 한 두 사람도 놀랐는지 서로를 돌아봤다.
그때, 다른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군림단주가 이길 것 같습니다.”
“저도 군림단주 쪽이 우세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 이.
철혈대전이 조용해졌다.
“음? 투신을 만나 보고도 군림단주가 이길 것이다?”
묵자성은 흥미롭다는 듯이 삼십 대와 사십 대의 두 사내를 내려다봤다.
“저는 군림단주가 만든 결과를 봤습니다.”
사십 대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결과?”
묵자성의 호기심이 좀 더 커졌다.
“위쪽에 강조단이란 집단이 있습니다. 대흑풍단과 거래하는 마적 패거리들이지요. 그런데 마적 떼치고는 단장이란 자의 무공이 상당히 강해서 이 년이 채 안 됐는데,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서 둘씩 뽑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랬다고 하더군.”
묵자성은 사십 대 사내를 빤히 쳐다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유.
사십 대 사내에 대해 알고 있었다.
“딱 술 한 잔 삼킬 정도의 시간이었습니다. 밖에서 비명이 들려 나가니 백여 명 가까운 인원들의 몸이 모두 터져 나갔습니다. 그것도 싸우는 소리도 없이 말이지요.”
언유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그래 봐야 마적 떼 정도일 텐데. 너무 과한 평가가 아니오?”
“<건평객점>이란 곳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곳에서 약관의 청년과 만났는데, 그가 결과를 만든 사람이더군요. 나중에 강조단장은 그 일을 군림단이 한 일이라며 내려왔지만, 군림단원에 의해 죽었습니다. 그런 자들을 데리고 있는 군림단주라면 능히 투신보다 우위에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언유의 목소리에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사자궁주가 보내서 온 게 아니야.’
묵자성은 언유를 빤히 쳐다봤다.
사자궁 사람이 왜 그런 정보를, 그것도 이 자리까지 와서 말해 주느냐는 의문이 담긴 표정이었다.
“……누가 이겨도, 둘 다 죽을 겁니다.”
언유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한마디로 알렸다.
“그렇게 하실 생각이시다?”
묵자성은 바로 알아듣고 되물었으나 언유에게서 들을 수 있는 대답은 아니기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무슨 뜻인지 잘 들었다고 전해 주시오.”
대답을 들은 언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철혈대전을 떠났다.
“사자궁주의 뜻이라는군요, 파 패주.”
언유의 기척이 멀어지자마자 묵자성의 시선이 삼십 대 사내에게로 향했다.
슥.
삼십 대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맹주님의 배려로 사자궁주의 진의를 알게 됐습니다. 우리 쪽에서 큰 빚을 졌습니다.”
‘파, 파 패주?’
‘사혈명의 사패천 중 서패주 파륵!’
조균과 이수윤은 삼십 대 사내가 일어나서 포권을 취한 것만으로 숨을 멈춰야 했다.
탁. 탁.
구 궁위와 팔 궁위가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대며 밀리는 것을 막아 주었다.
“파 패주, 혈주에게 전해 주시겠소? 철혈문은 이번 싸움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구왕 다음은 누가 될지 무척 궁금하다고 말이오.”
“반드시 그래야겠지요. 그럼.”
파륵이 돌아섰다.
순간, 조균과 이수윤은 눈을 부릅떠야 했다.
삼십 대였던 파륵의 얼굴이 어느새 오십 대 중년인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힐끗.
파륵은 눈동자만 돌려 조균과 이수윤을 보고는 철혈대전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전, 파륵의 양쪽에 그림자가 붙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새로운 구대문파연합에 두 후기지수가 해 줄 일이 있는데, 참여할 마음이 있나?”
묵자성은 놀라는 조균과 이수윤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척.
“구대문파의 영광을 위해!”
“구대문파의 영광을 위해!”
조균과 이수윤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곧 강호에 엄청난 격변이 일어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피가 끓어올랐다.
***
오악(五岳) 중 가장 큰 동악 태산.
평소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지난 한 달 동안 몰려든 인파는 엄청나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많았다.
“이건 뭐, 태산에다 강호를 옮겨 놓은 것 같잖아?”
산을 오르던 한 무리가 멈춰 서서 건너편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십여 명의 사람들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혀를 내둘렀다.
“그쪽뿐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어구야, 훌쩍 난다, 날아!”
“세상에 나무에서 나무로…….”
“투신을 보려고 온 보람이 있네?”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는 수건을 꺼내 땀을 훔쳤다.
그런 사람들을 곁눈질로 보며 지나치는 무인들도 있었다.
“하류 잡배들이나 모아서 만든 한류천 따위 하나 먹었다고 어딜 군림단에 비벼? 그나저나 곽 교림님은 어디 계시는 거야?”
“쓸데없는 데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주위나 한 번 더 살펴. 이러다 인사도 못 드릴라.”
먼저 한마디 꺼낸 사내를 구박한 자가 일행을 이끌며 속도를 내 추월했다.
“알지. 그래도 들리는 걸 어쩌라고?”
사내들은 이후에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법을 펼치며 봉우리를 올라갔다.
***
“회주님, 보고드리겠습니다. 현재까지 태산으로 들어선 인원만 몇 만으로 추정됩니다. 그중 신법을 펼쳐 움직이는 인원은 천 단위도 안 되고, 대부분이 일반인처럼 걸어서 움직인다고 합니다.”
고생이 심했는지 의자에 앉아 움직일 때보다 마른 단림이 선 채로 허리를 숙였다.
“흘흘. 림 총사, 천 단위의 무인들이 그 말을 들었으면 섭섭하겠는데?”
새로운 총사란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성이 아닌 이름을 앞에 붙여서 부르기로 했다.
“아. 저는 단지 몰려드는 인원에 비해 작다고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주의는 무슨. 앞으로 많이 겪게 될 거야. 익숙해지라는 뜻에서 해 본 말이야.”
익숙해져라.
묵 노야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씁쓸했는지 고소를 머금었다.
투신과 군림단주.
몰려든 사람들에겐 단순히 두 고수의 대결이 아닌 까닭이다.
삼정일사회원들은 분명 군림단을 지지하는 자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다.
“림 총사, 무투들만으로는 힘드니 백무와 흑무들 모두 회원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
“……예? 그들을 모두 말씀이십니까?”
“모두.”
“회주님?”
단림은 묵 노야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아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투신께선 이번 대결로 완전한 몸을 갖게 된다고 하셨다. 아마도 마지막 관문인 모양이다. 죽음 뒤에 다시 태어난 투신은 무적이 될 것이다.”
묵 노야는 눈을 감으며 입에 힘을 주어 턱이 불룩해지도록 만들었다.
부들부들.
단림이 몸을 떠는 것이 느껴졌다.
투신과 군림단주가 한 사람이란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듣게 되면 누구나 단림과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혹시나 일어날지도 모를 소요를 제어하라고 무투들과 무투 후보들에게 알리고 돌아오겠습니다.”
단림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강해졌다.
“그래. 믿고 맡길 림 총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회주님, 제가 투신께 받은 것은 두 다리가 아니라 새로운 목숨입니다. 언제든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묵 노야의 말을 듣자마자 단림은 돌아서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피식.
묵 노야는 홀로 남자 태산의 전경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 멋진 풍경을 용연도 저기 어디선가 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