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힐끗.
장한 셋과 허드렛일을 하며 시시덕거리던 사내의 눈동자가 빠르게 옆으로 돌아갔다.
중앙전각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무투들을 봤기 때문이다.
“어? 왜 저리 빨리 움직이는 거야?”
사내의 말에 장한들은 고개를 들었다.
“아, 난 또 뭐라고. 회주님이 부르셨겠죠.”
“오 형님,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엄청 뺀질이시네?”
“나이 많다고 놀 거면 다른 곳이나 가요.”
장한들은 한마디씩 하며 사내에게서 등을 돌렸다.
“에이, 처음이라 몰랐어. 좀 봐줘, 여기 내가 싹 정리할게, 응?”
사내는 변죽 좋은 얼굴로 장한들에게 다가가는 척하며 한 번 더 중앙전각 쪽을 돌아봤다.
‘음?’
중앙전각을 빠르게 훑어보는 아주 짧은 순간, 이 층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고개를 돌렸으나, 시선이 등에 꽂힌 채 따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걸렸나? 고칠(孤七). 이름이 외로워서 느낌이 안 좋더니. 쯧.’
―상대로부터 등을 돌렸을 때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면 곧장 그곳을 떠나라.
비 상종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들은 말이었다.
이번 임무는 투입될 때부터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외로운데 고(孤)라니.
꼬르륵.
내장을 움직여 배 아픈 소리를 냈다.
“아! 미, 미…… 으아, 으으으, 응?”
고칠은 손짓으로 배가 아파 뒷간에 간다는 표시를 하며 괄약근을 잔뜩 좁힌 모습으로 내달렸다.
그때, 이 층에서 고칠을 내려다보고 있던 인영이 손을 들어 원을 그렸다.
그러자 곳곳에 배치된 흑건과 백건을 이마에 두른 무투 후보들 중 서넛이 동시에 움직였다.
고칠은 총본진에 머무는 삼정일사회원들의 숙소로 돌아서자마자 벽에 등을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떠올리려는 것이다.
“안 될 거야.”
“……!”
고칠은 눈을 크게 치뜨며 위를 올려다봤다.
인영 하나가 고칠을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누…….”
“백투.”
‘아, 흑투, 백투.’
고칠은 무투 후보를 흑투와 백투로 나눈다는 얘길 들은 뒤였기에 마른침을 삼켰다.
“감시하던 놈이 도망쳐서 따라왔다.”
“가, 감시…… 무, 무슨 말씀이신지…….”
“회주님께서 게으름은 금방 전염된다고 하셨다. 일 안 하려면 나가.”
‘일? 내가 게으름을 피워서 나가라는 건가?’
고칠은 뭔가 이상했지만 더 주저하면 없던 의심을 가질까 봐 뉘우치는 표정과 함께 재빨리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일들이 손에 익질 않아서 농땡이 좀 피웠습니다.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힐끗.
백투는 중앙전각 쪽을 돌아보며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저 표시는 뭐야?’
고칠이 슬쩍 뒤로 움직여 중앙전각 쪽을 보려 했다.
“처음은 봐주신다고 한다. 내가 계속 지켜볼 테니 조심해.”
백투는 말을 마치고는 훌쩍 숙소를 넘어가 연무광장 쪽으로 사라졌다.
고칠은 백투의 표식이 궁금했으나 일단은 살았다는 생각에 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찍.
고칠이 서 있던 자리로 쥐가 벽을 타고 내려와 한참을 맴돌다 인기척을 느끼고 도망쳤다.
***
“투신, 연공은 잘 마치셨습니까?”
묵 노야가 먼저 예를 취하자 대전에 모인 일, 이 기 삼십육무투들이 일제히 이마를 땅에 댔다.
“좋았다. 사자궁주 덕분에 좋은 걸 깨달았어. 군림단주를 처리하고 나면 너희들에게도 알려 주마.”
“영광입니다!”
쿵.
용연의 한마디에 일흔두 명이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투신의 가르침.
일흔두 명의 삼십육무투들에겐 그보다 더 큰 영광은 없는 것이다.
“회주, 준비는?”
“투신께 드릴 보고가 있으니 다들 물러가라.”
묵 노야는 용연이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일, 이 기 삼십육무투들을 대전에서 내보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용연을 돌아봤다.
말해도 되느냐고 묻는 것이다.
끄덕.
용연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원 등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자들은 모두 일곱이고 감시를 붙여 놓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호원이 총사와 신녀를 죽인 이유는, 삼정일사회의 성장과 은린갑까지 줬는데 투신과 제가 아무런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아서 괘씸죄를 내린 것이라고 합니다.”
꿈틀.
호원의 보고를 들은 용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알아서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지 않고 강제로…… 음? 설마 다른 축들을 노린 수였던가?’
“투신, 호원의 한 수, 한 수가 꽤나 단호합니다. 아무래도…….”
“삼정일사회를 본보기로 삼으려는 거겠죠. 너희들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는.”
“본보기? 군림단에는 통하지도 않을 텐데 무슨.”
“그래서…… 조급해졌겠지요.”
용연의 가면 속 두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조급.
갑자기 호원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자신에게 무슨 짓이든 해 보라는 듯 내려다봤는데, 이번 두 번째 만남에서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자신의 모든 말에 대응을 했다.
“조급?”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많이 내려와 있더군요.”
“허.”
묵 노야는 용연의 짧은 설명을 듣자마자 탄식을 터트렸다.
그 호원이 용연과 눈높이를 맞춰서 대응을 했다?
한 가지 단서만으로도 핵심까지 파고들어 계획 자체를 없애버리던 자가?
팔 여덟 개 달린 보살이 두 개의 손만 사용해서 눈에 들어온 것들을 주우려 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회주님, 색출한 자들을 통해 호원을 안심시켜 줘요. 외부에도 소문을 내 주고요.”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투신.”
“구대문파 쪽도 파 봐요. 내가 왜 조급하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서두르겠습니다.”
“아! 이틀 동안 지하에 내려가 있을 테니 중요한 일이 있으면 알려 줘요.”
용연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러자 묵 노야는 조용히 허리를 숙이고는 대전을 나섰다.
***
쿵.
“좋네.”
용연은 묵직한 굉음과 함께 통로가 닫히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태사의와 지하 석실을 나선형 통로로 연결시켜 놨다는 말만 듣고 처음 와 본 것이다.
파바밧.
돌아서자 천장에 박혀 있던 야명주가 일제히 빛을 내며 대낮처럼 공간을 밝혔다.
그러자 서고처럼 칸이 나뉘어져 있는 석벽과 반경 삼 장 정도의 수련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회주님이 신경 많이 쓰셨네.”
용연은 웃으며 수련 공간 중앙으로 가서 앉았다.
양손을 바닥에 대고 머릿속의 수차를 회전시켰다.
그러자 낭수련이 ‘팍’ 소리를 내며 양 손목을 벗어나 바닥에 박히더니 용연의 몸을 허공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석실 전체에 닿는다.’
삼제 중 첫 번째 원리를 떠올리자 바로 몸이 반응했다.
츠으으―.
머릿속 수차가 회전하더니 석실을 채운 것이다.
그러자 이미 기억하고 있던 석실의 모습이 훨씬 선명해졌다.
씰룩.
허공에 뜬 채로 용연은 웃었다.
어떤 단전의 진기를 사용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눈을 뜨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삼제 두 번째 원리를 시험해 볼 차례였다.
닿았으니 진기가 스며들도록 전해 주면 되는데, 생각을 하자마자 순식간에 석실이 대답을 해 주었다.
쩌엉!
진기를 운용하는 것과는 또 달랐다. 마치 이미 닿아 있던 첫 번째 원리가 자신의 생각에 반응해 준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대로 세 번째 원리까지 이어 갔다.
스르.
용연이 좌측으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티딕!
벽에 실금이 가는 소리가 살짝 났다.
힐끗.
용연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겉만 봐선 아무 이상 없어 보였지만, 조금 더 자세히 보니 무수히 많은 선들이 나 있었다.
내보낸 힘을 원하는 방향으로 던질 수 있는 세 번째 원리였다.
스르.
이번엔 원래 위치로 돌았다.
깍!
틀어진 것을 맞춘 것처럼 간결한 소리가 났다.
“애초에 나눌 필요가 없었던 거였지만, 현 선림이 아니었으면 평생 몰랐겠지.”
용연은 깨달은 바를 단번에 성공시키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물론 더 큰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수련은 필요할 것이다.
***
드드드드!
“헉!”
단림이 지내는 대전 뒤쪽 방으로 가던 묵 노야는 갑자기 건물전체가 흔들리자 기겁을 하며 벽에 붙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으악!
―꺅!
“너희 둘은 가서 무슨 일인지 알…….”
묵 노야는 호위하는 무투 둘에게 명령을 내리려다 말을 멈췄다.
중앙전각이 거짓말처럼 흔들림을 멈췄다.
천천히 돌아서서 기둥과 천장을 살펴봤다.
외관상 특별한 문제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바깥쪽을 향했다.
“음? 서, 설마…….”
묵 노야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연무광장은 물론이고 삼정일사회원들의 숙소 어디에도 놀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주님, 짚이는 바가 있습니까?”
무투 한 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묵 노야는 자신도 모르게 툴썩,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진동 한 번에 지진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 가자.”
묵 노야는 웃으며 단림의 방으로 먼저 움직였다.
너무도 공교롭지 않은가?
용연이 이틀 동안 지하에 내려간다는 말을 한 뒤 일어난 일이었다.
지진이라 착각할 정도의 진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고수는 이곳에 용연뿐이었다.
***
드드드―.
산자락을 따라 내려가던 예닐곱 명의 고개가 사방으로 돌아갔다.
멀리서 들린 진동은 이어지지 않았다.
“산사태?”
선두에서 걷던 공동파 장로 주정일은 자세까지 낮추며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장로님, 종종 있는 일이잖습니까?”
따르던 제자가 주정일의 모습에 당황해서 부축하려 했다.
“그래, 영완아, 그래.”
주정일은 제자 영완의 부축을 물리치면서도 눈동자만 돌려 좌우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종남파 강혁 대장로님이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심해지신 것 같다.’
팔을 부축하던 영완은 낮게 숨을 뱉으며 물러났다.
―우리가 알던 강호는 이제 없다고 봐야 해.
―삼정일사회의 투신. 그는 이미 장문인께서 나선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지도…….
영완은 얼마 전 후기지수들의 모임인 구룡회에 나갔다가 무당파 조균과 화산파 이수윤의 선언과도 같은 말에 크게 놀란 기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