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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207화 (207/232)

207화

왼손 검지, 중지, 약지를 가로로, 오른손 검지를 세워 안쪽에다 댄다.

척.

묵 노야가 가장 먼저 손으로 표식을 만든 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총본진 내의 광장을 채운 수백 명이 일제히 손을 올려 답했다.

힐끗.

군중들 사이에 박혀 있던 몇몇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새로운 총사와 신녀가 뽑힐 때까지 애도는 계속돼야 한다.”

묵 노야의 말은 곧 앞쪽에 시립해 있던 무투들의 입을 통해 뒤쪽까지 전해졌다.

―……애도는 계속돼야 한다.

아주 잠깐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거대한 야유가 하늘을 향해 퍼부어졌다.

―우우우우!

끄덕.

묵 노야는 미미하게 고갯짓을 하고는 돌아서서 새로 지어진 중앙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

“표시는 해 놨느냐?”

묵 노야는 대전 안으로 들어온 십여 명의 사내들에게 주머니 하나씩을 건네며 물었다.

“늦거나, 당황하면서 표식을 따라 하는 자들의 겨드랑이 근처에 나눠 주셨던 보목향(普朷香)을 묻혀 놨습니다.”

“저도 몇 명…….”

사내들은 거의 동시에 말문을 열었다.

내용은 모두 대동소이했다.

“그 주머니에 든 것을 식수에 타서 그들에게 나눠 줘라.”

묵 노야의 말에 사내들이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다.

그 모습에 묵 노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먹든 안 먹든 상관없다.”

“아…….”

그제야 사내들은 안도하며 밖으로 나갔다.

묵 노야는 바로 무투들을 불렀다.

“투신께서 중요한 대결을 앞두고 연공에 들어가셨다. 숙소에서 자정 이후 부정 탈 수 있으니 바깥출입을 엄금하라고 알려라.”

“예.”

무투들이 나가자, 묵 노야는 대전을 나와 자신의 숙소로 올라갔다.

중앙전각을 높이 짓고, 다른 건물들을 이 층 이하로 지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처럼 삼정일사회 총본진을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

힘을 부리는 사람이 높은 곳에 서야 하는 이유다.

투신보다 낮지만, 삼정일사회원들이 올려다봐야 하는 팔 층이 묵 노야의 거처였다.

“투신, 호원의 눈과 귀 색출이 끝났습니다.”

하늘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묵 노야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용연이 군림단주와 투신의 대결을 어떻게 풀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

동쪽에서 시작된 거대한 빛이 한 점에 집중됐다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 갔다.

지난밤에 잠들었던 대지와 그 품에 안겼던 모든 것들이 깨어날 시간이다.

턱.

봉우리를 오르던 용연이 멈춰 서서 위를 올려다봤다.

정상은 멀었는지 아직 하늘과 맞닿은 곳이 뾰족하지 않았다.

지금 속도라면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할 것 같다.

그래도 근력만 이용해 걸음을 옮겼다.

항상 밟고 서 있던 땅인데, 오랜만에 여러 가지 감각이 발바닥에 느껴진다.

땀도 나지 않고 숨도 차지 않지만 기분이 몹시 개운해지고 있었다.

군림단주와 투신.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자부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용연 자신의 생각이었다.

저 위에서 용연을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이 다를 수 있었다.

다시 용연이 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턱.

‘다시 올라오시는군.’

봉우리 정상에서 정좌한 채 눈을 감고 있던 선림 현승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올라오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데, 내려가 맞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다리세요. 곧 도착합니다.

귀로 들은 것이 아닌데, 용연이 바로 옆에서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에 목소리가 저절로 떠올랐다.

‘단주님의 경지가 대상에게 원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할 정도까지 오르셨던 건가?’

현승의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게 됐다.

나른한 말투가 좀 더 짙어진 계기이기도 했다.

그런 자신을 용연은 단주가 되기 전에도, 된 후에도 여러 번 놀라게 만들었다.

선림들을 부를 때도 항상 자신은 제외시켰는데 이번엔 무슨 일로 직접 방문하셨을까?

“날이 좋네.”

현승은 눈을 뜨고 정좌한 바위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공간 끝에서 용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 왔다.”

올라선 용연은 현승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선림 현승이 단주님을 뵙습니다.”

현승의 입에서 특유의 나긋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이곳 환경이 좋았던 모양이에요, 현승 선림? 올라오면서 둘러보니 천강담도(天罡擔刀)로 쪼갠 봉우리들이 몇 개나 보이던데요?”

용연은 진짜로 본 것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몇 개뿐이겠습니까? 이곳에서 눈에 들어온 모든 봉우리를 제 도로 갈랐습니다.”

현승은 웃으며 용연의 말을 받아 주었다.

“하긴, 천강담도라면.”

용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승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물론 실제가 아닌 마음으로 만들어 냈을 것이다.

산이 조용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현승이 정상에 있는 것만으로 맹수도 작은 생명체들도 숨죽이며 다녔을 테니까.

“제가 뭘 해야 합니까, 단주님?”

“일전에 현승 선림에겐 특별한 일을 맡기려 한다고 한 말 기억하죠?”

“물론입니다.”

“현승 선림.”

“예.”

“나를 죽여 줘요.”

“……!”

휘이이―.

바람이 몰려와 현승의 은발을 한 올, 한 올 흩어지게 만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명령에 현승은 용연을 응시할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호원과 만났어요.”

“음?”

“구왕이 뺏긴 네 축을 되찾으려…….”

용연은 구왕에서부터 시작된 싸움이 호원을 통해 투신에게로 옮겨진 과정을 모두 설명한 후 말을 멈췄다.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이백 년 동안 사천성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군림단이…… 강호삼대세력 중 한 곳의 수장인 구왕과 싸우려고 한다고? 고작 일 년여 만에? 도대체 단주님은 그동안 무슨 기적을 이루신 겁니까?’

현승의 속에서 감격이 뜨겁게 솟구쳤다.

그 뜨거움은 얼음장 같던 마음과 이성을 순식간에 녹여 버리며 메마른 눈가로 쏟아 내게 만들었다.

주르륵.

이 무슨 죄스러움인가?

그 모든 것을 단주님 홀로 이뤄 낸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이해를 구하신다.

털썩.

현승은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용연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단주님께서 그토록 고단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모르고 아니, 모른 척하고 이 자리만 지켰습니다. 참으로 죄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용연은 자신도 모르게 툭, 터진 것처럼 눈가가 젖어들었다.

―……그토록 고단한 시간을…….

몇 마디 설명만으로 그동안의 시간을 알아주는 현승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저 말을, 자신은 함께한 누구에게도 해 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었다.

“현 선림, 일어나요.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거예요. 단주인 나는 나대로 해야 할 일을 한 거고, 현 선림은 현 선림대로 맡은 임무에 충실했어요. 이제 새로운 임무에 충실해요. 군림단주로 변장해서 투신을 구덩이에 처박아요.”

“알겠습니다.”

현승은 일어나 용연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현 선림.”

“예.”

“진심으로 해야 해요.”

“…….”

“투신이 죽어야 다음을 준비할 수 있어요.”

용연의 정색에도 현승은 머뭇거리며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직접 온 것이다.

“적어도 천강담도로 봉우리 하나 날릴 정도는 돼야 해요. 직접 받아 보고 싶어서 왔어요.”

용연이 이곳까지 올라온 이유였다.

“단주님, 위험합니다.”

“알아요. 그래서 올라왔어요. 아무리 말로 괜찮다고 해 봐야 믿지 않을 테니까요.”

척.

용연은 자리에 일어나 현승을 마주 보고 섰다.

차라락.

낭수련이 가슴을 감쌌다.

하단전의 진기를 끌어 올리는 동시에 중단전의 진기와 충돌시켜 온몸을 휘감았다.

투학!

산 정상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확장되며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그러자 현승도 진기를 운용해 밀려드는 기운을 막아 냈다.

드드드―.

용연과 현승의 중간 지점에서 두 기운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켰다.

“단주님, 칠 성의 천강담도를 내보내겠습니다.”

“내보내는 건가요? 받아 보지요.”

‘단주께선 천강담도를 내보낸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다. 어쩐다…….’

현승은 막상 말을 하고 나자 후회가 됐다.

용연이 천강담도에 대해 모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천강담도는 대지의 기운을 받아들인 하단전과 중단전의 진기를 상단전으로 밀어 올려 만들어 내는 일종의 무형강기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무형강기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대개 이기어도(以氣御刀)의 경우, 유형의 도를 손으로 다루게 되는데, 여기서 한 단계 더 높아지면 무형의 도를 다룰 수 있게 된다.

다시 한 단계를 넘어가면 유형의 도를 눈이나 마음으로 조종할 수 있는 어도술(馭刀術)의 경지라 한다.

현승은 거기서 한 단계를 더 올라가 무형의 도를 어도술로 펼칠 수 있었다.

‘적당히.’

현승은 칠 성이 아닌 삼 성의 천강담도를 내보내기로 했다.

콰우우우!

순식간에 일어난 와류가 현승의 모습을 삼키더니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아!’

용연은 눈앞에서 일어난 현상에 감탄을 터트렸다.

마치 와류가 현승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츠르르.

몸통을 감싸고 있던 낭수련이 기음을 토했다.

낭수련조차 곧 엄청난 공격이 다가온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용연은 현승을 감싼 와류의 굵기를 보고 낮게 숨을 내쉬었다.

저 정도만 해도 엄청나지만 구왕을 끌어들이기에는 모자랐다.

―구왕이 아홉 가지 무공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무기를 든 걸 본 사람은 없습니다. 추측하기로, 구왕은 이미 무기가 필요 없는 경지에 올라서 언제든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무형강기.

보고를 통해 알게 된 정보였다.

“현 선림, 무형강기가 아니라면 의미 없는 시도가 될 거예요.”

휘류류류―.

아주 잠깐 와류의 회전이 느려진 것 같다가 이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현승의 모습이 드러났다.

피식.

용연은 그제야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고오오―.

하단전과 중단전의 진기를 끊임없이 부딪치자 오랜만에 깨어난 하단전의 괴물들이 낭수련과 충돌을 일으켰다.

“조심하십시오, 단주님.”

현승도 이제는 천강담도를 거둘 수 없는 상태라, 가능한 느리게 용연을 향해 손을 내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쿠핫― 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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