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반짝.
호원의 말에 용연은 눈을 빛냈다.
그 눈빛을 본 호원은 숨을 뱉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단주가 구왕의 손에 죽지 않는다는 확신. 그 증거를 내게 보여 주시오.”
호원은 말을 하는 동안에도 용연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용연의 실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명분.
용연을 적당히 이용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용연은 ‘증거’란 말에 반응을 보였다.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단주가 첫 만남에서 내게 준 감흥 덕분에 이 정도까지 양보하는 거요. 어떻소?”
‘기대되는군.’
용연 역시 호원을 살피고 있었고, 그의 눈빛이 한 번 더 반짝인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자존심 상한 표정과 말투로 호응해 줄 차례였다.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소?”
용연은 이를 악물고 호원에게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호원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은 이미 준비해 둔 시험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까지 들어야 한다.
“한 사람을 처리하면 내가 궁금했던 부분이 사라질 것 같기는 하오. 현재 유명세로 단주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자. 투신. 그를 처리하면, 단주가 구왕과 싸울 때, 나는 적어도 뒤로 물러나 있겠소.”
“투신?”
용연은 예상 못한 이름에 의아한 표정으로 인상까지 쓴 채 호원을 쳐다봤다.
제대로 허를 찔렀다고 여기는 걸까?
호원은 웃고 있었다.
“단주가 세 축을 먹어치우는 동안 한류천을 통째로 먹어치운 삼정일사회의 진짜 주인이오.”
“아, 아니, 그 말, 진심이오? 투신을 처리하면 내 제안을 들어주겠다?”
용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난 어떤 말이든 허투루 뱉지 않소, 군림단주.”
호원이 정색을 하며 용연을 쳐다봤다.
‘안 좋다. 진심으로 군림단주와 투신의 싸움을 기대하는 표정이 아니야. 뭔가 더 있어.’
생각을 더 이어 가고 싶지만 일단은 알겠다는 말로 물러나야 할 때였다.
“조만간 투신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게 될 거요.”
용연은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딱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허공을 몇 차례 유영하다 사라졌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호원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힘 안 들이고 여섯 축을 손에 쥘 수 있게 됐다. 군림단주와 투신 중 살아남은 자는 구왕과 또 싸워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그럼 구왕 역시 어느 정도 힘을 소모할 테고, 그곳을 나와 일백호천위가 입성하는 거지. 여섯 축은 내 것이다.’
호원은 이미 용연을 만나겠다고 생각한 순간, 구왕의 죽음까지 계획에 포함한 것이다.
귀암로 여섯 축.
구왕은 그 보석들을 손에 들고만 있었다.
어떻게 해야 빛을 발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섯 축에 오대세가를 더하면, 묵자성은 물론이고 사황 경오도 눈 아래 둘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놀라서 오성위들이 다가왔으나, 괜찮다는 손짓을 하는 와중에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다.
군림단주가 그러겠다고 했으니 투신에게도 목숨 걸 명분을 줄 차례였다.
***
‘구왕을 노린다고 했건만, 투신부터 처리해라?’
용연은 이동하면서 호원이 한 말들을 몇 번이나 곱씹어 봤지만 도저히 그 말 속에 숨은 의미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묵 노야와 세 교림이라면 뭔가를 알아내지 않을까?
속도를 내는 이유였다.
고릉까지 올 때는 사나흘 걸렸지만 석모루로 돌아가는 데에는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자 묵 노야와 국진세, 여벽, 잠사우의 얼굴이 환해지며 일어나려 했다.
줄곧 자리를 비우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움이 필요하니, 앉아서 들어요.”
용연은 자리에 앉으며 말부터 꺼냈다.
네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용연의 입에서 ‘도움’이란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호원 궁주를 만났어요. 구왕을 치겠다니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다 서서히 저를 설득하는 어조로 바뀌더군요.”
“투신, 그의 화술입니다.”
묵 노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서고 말았다.
“그의 눈빛을 못 봤으면 속았을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용연의 말에 묵 노야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돼요. 도움을 주는 조건으로.”
용연이 묵 노야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투신부터 처리하면 구왕과 다툴 자격이 있다 여기고 본인은 물러나 있겠다는군요.”
“투신을!”
묵 노야가 기함을 했고, 용연의 또 다른 신분에 대해 알게 된 세 교림 역시 눈을 크게 치떴다.
“투신이 군림단주와 유명세로 쌍벽을 이루니…….”
용연은 호원의 말을 자신의 목소리로 옮겼다.
묵 노야는 용연의 설명을 들으면서 자신이라면 그 상황을 어떻게 활용했을지 상상해 봤다.
‘투신께선 군림단주와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분리시켰…… 여섯 축! 놈은 지금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는 거다!’
묵 노야의 눈이 커졌다.
“회주님, 짚이는 것이라도 있나요?”
“투신, 여섯 축입니다.”
묵 노야는 바로 대답했다.
“여섯 축?”
“호원, 그자는 투신과 군림단주가 싸울 때, 구왕이 도착하도록 만들 겁니다. 저라면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구왕을 찾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투신, 그래야 구왕까지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마도.”
묵 노야는 마지막 말에 자신 없어 했지만, 국진세 등의 동공은 크게 흔들렸고, 용연은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굳어 있었다.
“허, 여섯 축을 원했다면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강호삼대세력 사이에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약속? 두 분도 전 임주를 놈이 어떻게 몰아붙였는지 확인했잖습니까? 놈은 집요함 그 자체예요.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볼 정도로 잔인하기도 하지요.”
국진세의 기가 차서 꺼낸 말을 잠사우가 이 갈리는 목소리로 끝냈다.
“투신께서 넷, 구왕이 둘. 여섯 축을 모두 가질 생각인 겁니다. 투신, 놈도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묵 노야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자신이 아는 호원이라면.
말 속에 호원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그는 준비가 안 됐어요.”
용연은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세 교림과 묵 노야의 말을 모두 듣고 나서 확신할 수 있었다.
네 사람의 말을 들으며 호원과의 대화를 동시에 떠올리니 많은 부분이 해소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준비가 안 된 상태라서 시간을 필요로 했는데 때마침 군림단주의 연락이 왔다?”
묵 노야는 눈을 반짝이며 추임새를 넣듯이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그거죠. 그가 준비를 마쳤다면 직접 나섰을 거예요. 다들 알다시피, 생각이든 행동이든 한 번 머리와 몸에 새겨진 버릇과 습관이라면 쉽게 바뀌지 않지요. 두 번째로 본 그는 여전히 오만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자였어요.”
용연의 말이 계속될수록 묵 노야와 세 교림의 눈이 가늘어졌다.
먼저 말을 받은 사람은 묵 노야였다.
“……제가 아는 그는, 본인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들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병적이죠. 본인이 예상 못 하는 일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고 믿는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투신의 제안이 그를 놀라게 한 것 같습니다.”
“음?”
국진세와 두 교림이 동시에 반문하고 싶은 표정으로 묵 노야를 돌아봤다.
“세 교림께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까? 구왕을 치려고 한다는 말을 강호삼대세력이 아닌 한 사람의 입을 통해 들었어요. 저야 투신을 옆에서 모시는 입장이라 가능하도록 만드는 쪽이지만, 다른 사람, 특히 호원이 듣기엔 어땠을까요?”
“허!”
“이 상황…….”
“맞아요, 맞습니다. 우리 세 사람이 이미 겪어 본 일입니다.”
잠사우는 묵 노야의 설명에 놀라는 국진세와 여벽을 번갈아 쳐다보며 특유의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 분은 이미 겪어 보셨다고요?”
묵 노야는 세 교림의 대화에 이채를 발했다.
“회주님, 우리 단주님께서는 군림단의 이백 년 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며 단주에 오르셨어요.”
잠사우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꺼내고는 ‘이래도 모르겠느냐’는 표정으로 묵 노야를 쳐다봤다.
묵 노야는 잠사우의 말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
“잠 교림님, 우리야 매일 들으니 이해하지만, 회주님 입장에선 어려울 수 있어요. 이번 설명은 제가 맡도록 하지요.”
여벽이 잠사우의 말을 부드럽게 가로챘다.
예전 같았으면 발끈했을 잠사우였지만, 그동안 달라졌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회주님, 단주님께선 교림과 선림을 거치지 않고 학림에서 곧바로 단주가 되셨어요.”
“그건…… 음? 아아!”
묵 노야는 여벽의 짧은 설명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연거푸 터트렸다.
세 사람은 본인들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호원 입장에서 보자면, 괘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본인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말을 들었을 테니까요.”
여벽은 말을 마치고 쓰게 웃었다.
예전의 자신들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구왕. 그가 몇이나 데리고 올까?’
용연은 묵 노야와 세 교림의 대화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군림단주인 자신과 투신인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호원과 다른 세력들이 보낸 자들과 언제 나설지 기다리고 있는 구왕의 무리들도 있었다.
그 모두를 군림단과 삼정일사회로 상대할 수 있을까?
숫자는 의미 없다.
“회주님, 구왕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예 위주로 조사해 주세요.”
“투신, 설마.”
묵 노야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끄덕.
용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바로 국진세 등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세 교림도 구왕에 대해 알아봐요. 기한은 진 대교가 소집 명령을 전할 때까지.”
“……교림 국진세, 감히 질문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뭐죠?”
“이 결정, 단주님의 판단이십니까? 아니면 호원의 도발에 응해 주시는 겁니까?”
국진세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여벽과 잠사우도 이를 악물고 질문에 동참했다.
용연은 국진세, 여벽, 잠사우와 차례로 눈을 마주한 뒤 씰룩, 입가를 비틀었다.
아마도 저 질문은 지금이 아니라 교림으로 강등된 순간 정했을 것이다.
죽음이 눈앞에 보여도 자신이 가라고 하면 웃으며 갈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저 질문만은 해야 한다고 용기를 냈다.
“구왕의 본거지를 치는 것보다 찾아온 구왕을 상대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돼 내린 결정이에요. 그 자리에는 군림단주와 투신이 있고, 스물여덟 명의 군림단원과 삼정일사회 정예인 삼십육무투들이 있으니까요.”
용연은 세 교림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세 교림은 듣고 싶은 말을 들었는지 표정을 풀었다.
‘찾아온 구왕을 상대하는 것이 더 낫다라.’
‘허허, 허허허.’
‘단주님이라면 저런 말씀을 하실 줄 알았지. 암, 알았고말고.’
묵 노야 또한 숨을 내쉬며 웃었다.
‘흘흘. 지금이 가장 여유로운 시간일 수도 있겠다. 단 총사를 좀 더 다그치자. 투신을 모시려면 지금과 같은 정도로는 턱도 없이 부족해.’
자신도 용연의 생각을 좇아가기 바쁜데, 단림이야 오죽할까.
언제고 홀로 남겨질 단림을 위해 좀 더 많은 준비를 해 둬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