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회주님이?’
용연은 담영호에게서 서찰을 건네받았다.
[투신, 상대는 구왕입니다. 결코 독립된 세력의 수장 정도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와 싸우려 하신다면, 강호삼대세력 전부를 상대해야 합니다.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제 생각을 말씀드릴 기회를 청하고자 다급히 연락드립니다.
―회주.]
‘그렇지.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이면서 셋이었어. 잊고 있었다.’
용연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서찰을 내려놓고는 짧게 숨을 뱉었다.
‘누가 보낸 서찰이기에 저런 표정을 지으시지?’
‘회주라면 삼정일사회주인가?’
몽외와 담영호는 용연의 표정을 살폈다.
“만나 볼 사람이 한 명 더 늘었어요.”
“단주님, 세 교림부터 만나셨으면 합니다.”
담영호는 용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얼른 나섰다.
그러자 몽외가 왜 자꾸 세 교림 얘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담영호를 돌아봤다.
“담 선림은 세 교림과 만났군요?”
“열흘 전에 만나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도움?”
“세 교림에게 여우락이 선점해야 할 물길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받았습니다.”
“다른 얘기도 나눴나요?”
“예. 강호삼대세력을 따로따로 상대하실까 봐 걱정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하, 이것 참.”
용연은 담영호의 말에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토록 시야를 넓히자고 다짐했건만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들만 갖고 조합했던 모양이다.
“단주님?”
“이 서찰을 읽어 보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 거예요.”
용연은 서찰을 몽외에게 건넸다.
“큭. 크하. 회주란 자를 본 적은 없지만, 한번 만나 보고 싶어질 정도로 뛰어난 사람 같습니다, 단주님.”
몽외가 윗니와 아랫니를 모두 드러낸 채 한껏 웃었다.
“삼정일사회가 그 짧은 기간 동안 자리를 잡은 데엔 다 이유가 있군요. 세 교림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 놓았네요. 거기에 대책까지. 대단합니다.”
담영호는 진심을 담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같이 만나면 더 좋겠네요.”
용연의 얼굴은 처음보다 밝아졌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용연을 보며 몽외는 특유의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크크크. 구왕 얘기할 때도 좋았고, 계획을 보완하겠다는 말을 하실 때는 더 좋았습니다, 단주님.’
‘나는 단주님처럼 하지 못한다.’
담영호는 방금 전 들은 용연의 한마디에 무언가 툭, 머릿속에서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용연에 대해서는 완전한 신뢰를 갖고 있다 여겼건만, 아주 가는 실낱이 삐져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까지 이제 모두 끊어졌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일부러 얼굴을 굳히거나 하지 않았다.
***
“국 교림님, 단주님이 왜 우리를 부르시는 걸까요?”
잠사우는 머리칼을 헝클었다가 손으로 빗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허둥댔다.
“모르지요. 우리 세 사람을 부릴 일이 있으니 찾지 않으실까요?”
“국 교림님, 다들 우리보다 뛰어납니다. 기대하지 마시고 차분하게 가시지요.”
여벽이 국진세와 잠사우를 진정시키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 사람은 용연이 왜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담영호에게 미리 언질을 건넨 것부터 이 자리가 마련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용연은 묵 노야와 세 교림을 기다리는 동안 석모루에 머물렀다.
묵 노야가 미리 연락을 해 놔서 거처도 별채로 옮겼고 이번 결정에 대한 생각도 좀 더 넓게 할 수 있었다.
구왕이 촉발을 했으니 대응은 당연한 수순이지만, 현 강호의 세력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부분은 단원들을 위험에 빠뜨릴 소지가 분명했다.
‘연락이 왔으니, 세 교림을 만나기로 했으니 괜찮다?’
절레절레.
용연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건넸다.
자신보다 시야가 넓은 묵 노야도 있었고, 자신보다 더 오랜 세월 군림단에 모든 것을 바친 군림단원들이 있었다.
힐끗.
생각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이 방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올라온 총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묵 노야가 방으로 들어섰다.
“투신을 뵙습니다.”
묵 노야는 문을 닫자마자 용연을 향해 예를 갖췄다.
“회주님의 서찰 덕분에 어긋난 결정을 바로잡게 됐습니다.”
용연은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제가 아니었더라도 투신께선 충분히 원하는 바를 이루셨을 겁니다. 조심성 많은 늙은이의 말을 받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회주님, 교림 세 사람이 올라오는 것 같군요. 오랫동안 삼정으로 지내다 일이 있어서 교림으로 강등된 사람들이에요.”
“아…….”
용연의 말이 의외였던지 묵 노야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 교림은 투신이 나의 또 다른 신분이란 걸 몰라요. 오늘,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게 될 것 같아 기대가 커요.”
용연은 웃으며 방문 쪽을 쳐다봤다.
역시나 총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조용히 문이 열렸다.
국진세, 여벽, 잠사우가 옷깃을 여미며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허리를 숙였다.
“쓸모없는 늙은이들이 단주님을 뵙습니다.”
국진세가 말을 꺼냈고 여벽과 잠사우는 허리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오랜만에 보네요, 세 교림. 소개해 줄 사람이 있으니 일단 이쪽으로 자리해요.”
용연이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세 교림은 묵 노야를 쳐다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삼정일사회의 회주를 맡고 있는 묵 모가 세 교림께 인사드립니다.”
세 교림이 의자 앞에 서자, 묵 노야가 먼저 포권의 예를 취했다.
“허, 지금 삼정일사회라고 하셨소?”
“한류천을 먹어 버린?”
“역시 뭔가가 있었군요. 제가 삼정일사회의 활약에 대해 들을 때마다 왠지 단주님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도 오늘에야 이해가 됩니다.”
잠사우 특유의 화법에 익숙해질 만도 한 국진세와 여벽이었지만, 공감 대신 침묵으로 외면하는 쪽을 택했다.
“일단 다들 앉으세요.”
용연은 묵 노야와 세 교림의 기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나섰다.
군림단과 삼정일사회의 정보를 모두 갖고 있는 묵 노야는 편안하게 앉은 반면, 세 교림은 묵 노야가 용연과 무슨 관계인지 알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세 교림, 회주님은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어요.”
“예?
국진세 등은 동시에 미간을 모으며 용연을 돌아봤다.
“몽 선림과 담 선림만 알고 있는 제 다른 신분이 삼정일사회의 투신이거든요.”
“…….”
“…….”
“…….”
국진세, 여벽, 잠사우는 용연의 선언과도 같은 말에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충돌이 없었던 거였군요.”
“투신이 단주님을 적으로 규정했을 때도 왜 내버려 두셨는지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역시…….”
잠사우가 국진세와 여벽이 말을 끝내길 기다렸다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구왕. 그를 잡을 거예요. 네 사람의 생각을 듣고자 청했어요. 들려줘요.”
용연은 정색을 하며 자신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국진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여벽과 잠사우가 준비됐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그것이 신호였는지 국진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단주님, 현 강호에서 움직임 하나로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열을 넘지 않습니다. 그들의 움직임 자체가 강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지요.”
“구왕이 그렇습니다, 단주님. 철혈사자맹주가, 사자궁주가, 그리고 사혈명 혈주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독립된 세력인 동시에 하나이기도 한 시대의 강자군입니다.”
“두 교림이 설명을 아주 잘했네요. 한마디 덧붙이자면, 누군가에 대한 적당한 위험은 다른 이들에겐 즐거움이 되지만, 심각한 위험일 경우엔 그 반대의 경우가 됩니다.”
국진세, 여벽, 잠사우 순으로 잘 짜여진 대본을 외우듯 말이 이어졌다.
용연은 진지하기 이를 데가 없는 세 사람의 말을 모두 듣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시선을 탁자로 내려야 했다.
“훌륭한 고견들이십니다. 제 소견 역시 그 궤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들어갔습니다.”
묵 노야는 세 교림의 견해에 감탄했는지 곧바로 말을 받았다.
“좀 더? 어느 쪽으로 말입니까?”
국진세가 눈을 반짝이며 반문했다.
“투신께서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제가 하는 일이 그거라 고민을 해 봤습니다.”
“투…… 아아, 미안합니다, 익숙한 호칭이 아니라서. 이어 가시지요.”
여벽이 나섰다가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상체를 뒤로 뺐다.
“강호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그들 중 누구를 방패막이로 삼아야 할까? 이것이 제 첫 고민이었습니다.”
“역시. 회주님도 거기까지 생각을 하셨군요.”
잠사우가 탄성과 함께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묵 노야는 당연히 잠사우가 자신의 의견에 말을 얹을 거라 여기고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잠사우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추렴…… 같은 겁니다.”
여벽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묵 노야에게 말을 이으라는 손짓을 건넸다.
“참으로 부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계시는군요. 보기 좋습니다. 흘흘.”
묵 노야는 친구처럼 지내는 세 교림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호원. 사자궁주 호원. 맞나요?”
용연이 끊어진 묵 노야의 말을 받았다.
“제가 생각한 인물입니다, 투신. 그의 눈과 귀만 막을 수…….”
“만나 보려고요, 그를.”
용연은 묵 노야의 말을 끊고는 묵 노야와 세 교림을 일일이 돌아봤다.
호원을 만나겠다.
네 사람이 오기 전에 결정을 내려 둔 상태였다.
“투신, 호원입니다. 신중하게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단주님, 호원은 전 임주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자입니다. 그런 자와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칼을 든 자에게 등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묵 노야와 여벽이 동시에 용연의 결정을 만류했다.
그러나 용연은 네 사람과 달리 호원을 만난다는 생각을 한 순간, 갑갑했던 많은 문제들이 알아서 스러지는 것을 깨달았다.
“호원 궁주와 일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래를 하려는 거예요. 나는 내가 필요한 것을 얻고, 그에게 필요한 조건을 들어주는 거죠.”
“투신, 그가 얻으려는 것이 무언지 아시는 겁니까?”
묵 노야는 용연의 말에서 호원이 원하는 것을 아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반문했다.
“나는 현 강호의 균형이 깨지길 원해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저뿐일까요? 호원 궁주가 균형이 지켜지길 원했다면 군림단과 삼정일사회가 자리를 잡기 전에 움직였을 거라 확신해요. 그는, 나처럼 강호의 균형이 깨지길 바라는 거예요.”
말을 마친 용연의 눈에 확신이 가득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묵 노야였다.
입가를 어떻게 비틀어야 할지 몰라 삐죽이다 크게 숨을 내려놓았다.
국진세, 여벽, 잠사우의 반응은 묵 노야보다 극적이었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세 사람은 용연을 향해 진심을 담아 허리를 숙였다.
“이끌어 주십시오.”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