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나오셨다!’
먼지구름이 피어올랐으나 묵 노야는 그 안을 걸어 나오는 용연을 한눈에 알아봤다.
용연만의 걸음걸이였기 때문이다.
어깨가 어떻고 발동작이 어떻고 하는 부분적인 모습은 의미가 없었다. 용연의 걸음은 일단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마치 걸음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해야 할까?
뒤를 돌아봤다.
묵 노야는 다시 한번 웃고 말았다.
역시나 자신의 생각을 입증하듯이 수십 명이 걸어 나오는 용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공간에만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같은 자세였다.
“뒤, 뒤!”
누군가의 외침으로 최면에서 일제히 깨어나기라도 하듯이 사람들의 시선이 용연의 뒤쪽을 향했다.
“어?”
용연을 뒤따라 나오는 이의 모습에 의아해하는 소리였다.
“또?”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외침이었다.
저벅.
용연이 완전히 먼지구름에서 벗어나 걸음을 옮기자, 집중하고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상체를 뒤로 밀었다.
저벅.
용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우왕좌왕.
막다른 골목에 몰린 토끼라도 되는 듯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돈주머니도 챙기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기 바빴다.
“음?”
용연은 뒤를 돌아봤다.
순간, 뒤따라오던 먼지구름 속의 아홉 인영이 동시에 멈춰 섰다.
그러자 사람들이 아홉 인영을 보기 위해 웅성거리며 다가가려 했다.
“정체를 숨기려고 했던 거 아니었나?”
“서, 설마 가도 된다는…….”
먼지구름 안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용연은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걷던 걸음을 옮겼다.
쉬쉬쉭―.
아홉 인영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저들이 누군지 알아본 사람? 없어요? 아, 조금만 더 보면 알 것 같았는데…….”
“검을 찬 것까지는 봤어요.”
“나올 때 본 사람이 누구와 닮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져 가려 할 때, 모든 소리를 잠재우는 커다란 울림이 터졌다.
쿠―웅!
“전부 기록했나, 회주?”
용연이 발을 구른 후 목소리에 내공을 실었다.
웅―.
공명음이 장내를 휘감았다.
“기록?”
몇몇 사람들이 홀린 듯 용연의 말을 따라 했다.
그 순간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진 아홉 명에서 기록이란 말로 바뀌었다.
“물론입니다, 투신. 현상금을 받아 가는 분에 한해서…… 음? 다들 왜 그리 긴장한 얼굴들이십니까? 일종의 교류 형식의 작성일 뿐이니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흘흘.”
묵 노야는 용연에게 대답하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고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어머, 그럼 다음에도 일이 있으면 저를 불러 주시는 건가요?”
흑나찰은 묵 노야의 말을 바로 알아듣고 되묻기까지 하는 재치를 보였다.
“우리 회에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지요.”
묵 노야는 무투에게 손짓으로 현상금 주머니를 가리켰다.
무투가 다가가 주머니 하나를 더 건네자, 흑나찰은 묘한 표정으로 묵 노야를 쳐다봤다.
‘더 줄 수 있느냐고 묻는 게냐? 흘흘.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으려나?’
슥.
묵 노야는 왼손을 들었다가 가만히 내린 후 용연을 향해 돌아섰다.
흑나찰이 자신의 손짓을 봤다면 남아 있을 것이다.
‘저건 신호야!’
흑나찰은 묵 노야의 손짓을 보자마자 눈을 빛냈다.
동굴에서 투신이란 자와 함께 있던 자들의 신법은 엄청났다.
천천히 흑나찰의 시선이 얼굴의 반을 가면으로 가린 투신에게로 향했다.
그런 고수들을 혼자서 상대했으면서 상처 하나 없다.
얼마나 고수란 뜻인가?
무엇보다 삼정일사회주라는 저 범상치 않은 노인이 우러러보고 있었다.
꿀꺽.
흑나찰은 어떤 희생을 요구하더라도 용연과 묵 노야의 그늘에 있어야 한다는 촉이 왔다.
이러저러한 계산과 생각을 이어 가려 할 때였다.
“기록은 자세히 적어 놓을수록 찾기 쉽다.”
용연이 집중하기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용연에게로 향했다.
이목을 집중시킨 용연은 묵 노야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찾는다고? 삼정일사회에 들어오라는 뜻인가?’
흑나찰은 천막 안으로 들어간 용연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흘흘. 당황들 하지 마시오. 투신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삼정일사회에 들어오라는 뜻이 아니라, 같은 색을 가진 사람들이니 도움이 필요할 때 찾기 편하도록 자세히 쓰라는 뜻이오.”
묵 노야는 용연이 돌아보는 순간 어떻게 상황을 정리해야 할지 알고서 웃으며 말을 받았다.
흑나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묵 노야가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해석해 주자 표정을 풀었다.
“이거 우릴 포섭하려고 수 쓰는 거 아니야?”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저쪽이 뭐가 아쉬워서?”
“그럼 삼정일사회와 우리가 같은 색이야? 저기 거대 세력이고 우린…….”
“덩치만 빼면 뭐 저들이나 우리나 거기서 거기 아냐? 어차피 뿌리도 없고 말이야.”
웅성거림은 잠시간 지속됐다.
묵 노야는 사람들이 생각을 나누도록 기다려 주다 흑나찰을 내려다봤다.
‘음? 뭔가를 하라는 뜻인가요?’
생각을 눈에 담아 흑나찰이 묵 노야를 쳐다봤다.
끄덕.
묵 노야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뭔가 해야 한다.’
흑나찰은 묵 노야의 고갯짓을 임의로 알아듣고는 할 말을 정리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호호호. 회주님이 우릴 죽이려고 했으면 아직 숨 붙어 있을 사람이 몇이나 있으려나? 교류. 다들 무슨 뜻인지 몰라? 삼정일사회에서 뒤를 봐줄 테니 끝내주는 정보 있으면 파 보라는 뜻이잖아?”
흑나찰이 혀를 차며 딱하다는 듯이 사람들을 쳐다보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거네, 그거.”
“흑나찰 엄청 똑똑하네?”
이번 웅성거림은 조금 전과 달리 웃음이 섞여 있었다.
묵 노야는 흑나찰을 향해 자상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용연은 천막 안에서 시선을 묵 노야 쪽에 둔 채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동굴 안에서 자신을 공격하던 자들.
슥.
손을 들어 심장에 댔다.
낭수련의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태흠의 일격 외에는 중단전의 진기도 뚫지 못해 대부분 튕겨 나갔다.
‘그는 묵자성 맹주가 삼정일사회를 공격하려고 보낸 자가 아니야.’
용연은 태흠의 무공을 떠올렸다.
충분히 강하고 위력적이지만 딱 그만큼이라고나 할까?
동굴 안에 있던 여덟 명이 일제히 공격할 때, 그자는 오히려 물러나 있었다.
섞이지 못하는 자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자신의 손으로 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살려 보냈으니 철혈사자맹의 반응에 따라 대응을 하면 된다.
‘삼정일사회의 규모를 지금보다 열 배는 더 키워야 해. 그렇게 만들려면 뭐가 필요할까.’
용연은 잡아온 사람들과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묵 노야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연스럽게 소통의 과정을 이끌어 내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다.
***
“……저와 구대문파의 제자들로 여겨지는 여덟 명의 공격을 방어만 했습니다.”
구 궁위 태흠은 묵자성이 앉은 태사의 아래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올렸다.
묵자성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태흠을 내려다봤다.
구 궁위가 원래 이런 식으로 보고를 했던가?
말투나 태도는 이전과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낯설었다.
꿈틀.
묵자성의 미간에 세로 주름이 잡혔다.
태흠은 자신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구 궁위, 한 가지가 빠진 것 같구나.”
‘한 가지?’
고개 숙인 태흠의 동공이 커졌다.
빠뜨린 부분은 없었기 때문이다.
“투신이 왜 널 살려 줬는지, 그 이유가 빠졌어.”
‘헉!’
태흠은 정신이 번쩍 났다.
자신도 돌아오는 내내 궁금했던 부분이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맹주님, 동굴 안에 있던 여덟 명을 찾아내겠습니다.”
무슨 말로도 묵자성을 이해시킬 수 없기에 나름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다른 입을 빌린다면 적어도 묵자성의 의심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악문 채 묵자성을 올려다봤다.
“그래, 그들 얘길 들어 보면 알겠지. 그 생각을 못 했군. 아,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자. 삼정일사회를 없애려면 어느 정도의 전력을 투입시켜야 하겠느냐?”
묵자성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투신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진천전 전력으로 충분할 거라고 말씀드렸을 것 같습니다.”
태흠은 고심해서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다르다는 뜻이구나.”
“예. 구대문파에서 어느 정도의 지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맹의 정예만으로는 힘들다?”
“…….”
묵자성이 원하는 대답을 할 수도 있지만, 태흠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알았다. 그만 자리로 돌아가라.”
묵자성의 손짓에 태흠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천성이 자신들 땅인 것처럼 보복을 하는 군림단.
종남파 강혁 대장로가 죽은 일을 이용해 현상금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이름값을 올리는 삼정일사회.
매우 불쾌한 곳들이 아닐 수 없었다.
구왕과 불편해지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두 곳과 관련된 네 축을 쓸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고 있었다.
***
“그 소문이 사라졌다며?”
“뭔 소문?”
“현상금 걸린 거.”
“……사라졌어? 누가 타 간 거야?”
“종남파 강혁 장로가 죽었으니 당연히 철혈사자맹에서 내건 줄 알았거든?”
“잉? 아니야?”
“아니야. 삼정일사회래.”
“그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설마 귀암로를 버리고 철혈사자맹과 손잡은 거야?”
“모르지.”
“이야, 삼정일사회가 벌써 그렇게 컸나?”
“……뭐, 웬만큼 큰 애들도 구대문파나 오대세가가 어디 어디인 줄은 몰라도 삼정일사회는 알걸?”
“그게 또 그러네?”
주루든 거리든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온통 삼정일사회 얘기뿐이었다.
꿈틀.
사문으로 돌아가던 조균과 이수윤은 소면 그릇에 젓가락을 담갔다.
“우리 두 사람 신법보다 소문이 빠르군.”
후루룩.
“……갑자기 불쑥 나타난 세력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후루룩.
조균과 이수윤은 한마디씩 하고는 한입 가득 소면을 넣고 오물거렸다.
“그분은 누굴까?”
조균은 소면을 삼키며 이수윤을 쳐다봤다.
“귀암로나 우리 쪽?”
“사혈명은 확실히 아니었어.”
두 사람은 각자 한 마디씩 하고는 다시 소면을 먹었다.
머릿속에는 태흠이 아니라 용연을 떠올리고 있음에도 ‘투신’이란 단어를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곳은 군림단이 아니라…….’
‘……삼정일사회, 특히 투신이란 자입니다.’
사문에 보고할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