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큭. 엄청난 자신감이 아닐 수 없군.”
강요된 침묵을 깬 사십 대 사내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첫 번째가 될 텐가?”
용연은 반응을 해 주었다.
“그 전에, 내게 설명 좀 해 주면 안 되겠나? 목소리만 갖고 판단하긴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꽤 젊은 사람 같단 말이지.”
“그거에 대한 대답을 바라나?”
“아니, 아니. 도대체 이 상황을 만들려고 어디서부터 준비를 한 건지가 궁금해.”
“대답을 원하나?”
“어떤 걸 묻느냐에 따라 다르다면?”
“죽겠지.”
“죽는다? 확신을 하는군. 좋아, 원하는 답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거래에 응하지.”
사십 대 사내의 말투에서 웃음이 묻어났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답이었다.
“군림단이 종남파 장로를 죽였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다.”
“……당신, 투신이군.”
사십 대 사내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경직됐다.
‘어떤 말이 나를 투신으로 여기게 만든 거지?’
용연은 어둠 속이지만 이미 안으로 들어서며 대부분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갸웃.
묵 노야에게서 사십 대 사내가 누군지 들은 기억이 없었다.
갑자기 사내와 얘기를 좀 더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내가 투신이다.”
“푸흐.”
용연이 정체를 밝힌 순간, 사십 대 사내의 입에서 툴썩 하며 맥 빠진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반응은 뭐지?”
“조금 전 했던 거래라고 봐도 무방한가? 내 대답을 원하나, 투신?”
“물론.”
“뭐 이런 거지. 소문의 진원지를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다? 아니면, 며칠은 걸릴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빨리 해결할 수 있게 돼서 좋다?”
“오기 전에 꽤 많은 정보를 듣고 온 모양이군. 그래, 소문의 진원지를 찾았으니 이제 해결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렇게.”
번쩍.
사십 대 사내의 눈에서 안광이 폭사되며 엄청난 기운이 양옆에 앉아 있던 여덟 명을 밀어냈다.
그리고 폭음이 이어졌다.
쩡!
***
“맹주님, 제자에게 들었습니다. 아무런 조치도 안 하고 계신다고요? 정말이십니까? 이대로 철혈사자맹이 웃음거리가 되도록 가만히 계실 생각이십니까?”
구대문파의 일대제자들로 구성원을 바꾼 뒤였으나, 강혁의 죽음으로 원로들이 일제히 몰려왔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만들고 얼굴까지 붉힌 해일 진인이 이를 악물며 물었다.
묵자성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중략)……번뇌객이 사천성의 감악문을 멸문시켰는데 그곳에서부터 군림단의 행적을 추적하려 했던 것으로……(중략)……군림단주도 아니고 군림단원이란 자가 강혁 대장로만 죽인 이유라고 합니다.]
장문의 보고를 받았을 때, 묵자성은 구궁위에게 군림단이 어디에 있고 어느 정도의 인원이면 처리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시켰다.
―군림단은 거점을 정하지 않고 활동해서 번뇌객도 어쩔 수 없이 사천성까지 내려가 감악문부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귀암로 세 축도 조사해 봤으나 실제로 군림단원을 봤다는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묵자성이 수족처럼 부리는 구궁위조차 저 정도의 대답밖에 내놓지 못했다.
“이왕 오셨으니 생각들을 들려주시겠습니까?”
묵자성은 장로들에게 되물으며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이전과 다름없이 나서는 이는 없고 서로 눈치 보기에 바빴다.
“해일 진인, 누구보다 강혁 대장로의 죽음을 비통해하실 분이 맹주님이세요. 그런 식으로…….”
아미파의 허령파파는 역시나 틈을 파고들었다.
늘 그래 왔듯이 두 사람은 고성으로 대화를 오갔고, 몇몇 장로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눈치를 보고 있었고, 혼잣말로 상황을 정리하는 장로들도 보였다.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당신들 중 군림단에 대해 조사해 본 사람이 있을까?’
묵자성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화를 지켜봤다.
결국 철혈대전은 고성만 오가는 자리가 됐다.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궁위 둘을 보냈소.”
묵자성의 말에 고성이 오가던 장로들의 입이 거짓말처럼 닫혔다.
구궁위 중 둘을 보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강혁 대장로를 죽인 자가 본인을 군림단원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믿어야 하오? 그자가 군림단원이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뭔지 오히려 되묻고 싶소.”
묵자성은 장로들을 둘러봤으나,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구 궁위 태흠은 스물여덟에 묵자성의 눈에 들어 이십 년을 궁위로 지냈다.
―팔 궁위는 군림단주와 관련된 단서를 찾아오고, 구 궁위는 현상금 소문을 퍼뜨린 자를 찾아서 잡아와라.
태흠은 지금까지 묵자성이 내린 명령을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구궁위가 되기 위한 조건은 간단했다.
묵자성에 대한 충성.
몇 가지 시험을 통해 인정받게 되면 그때부터 사자궁주 호원의 이목을 속이고 움직일 정도의 무공을 하사받았다.
묵자성이 장로들과 철혈대전에서 회의할 때 구궁위도 항상 함께했다.
그러나 장로들 중 누구도 구궁위의 존재를 알아채는 자는 없었다.
그런 태흠이, 한 걸음 앞에 서 있는 자의 심장을 정확하게 검으로 찔렀다. 이미 전력을 끌어 올린 상태였고, 데려가긴 힘드니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투신만 죽일 수 있다면 맨몸으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쩡!
“……!”
태흠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커졌다.
제대로 가격은 됐으나, 이어져야 할 반응이 없었다.
공류강기(空流罡氣)는 찌르거나 벤 곳을 관통하거나 자르는 류의 강기가 아니었다.
이름처럼 가격된 곳 주위로 퍼진다.
일반 검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애검 승효(承曉)를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공류강기를 익힌 이후 처음으로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났다.
‘이 좁은 공간에서 내공을 운용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공류강기에 가격당하고도 고작 들썩인 것이 전부라고?’
태흠으로서는 도저히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의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머지 사람들이 태흠의 검강과 용연의 몸이 격돌하며 만들어 낸 빛으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것이다.
콰웃.
어둠을 가르며 나타난 것처럼 빛이 허공을 흐르다 용연에게로 향했다.
훙―.
공기를 압축시키며 뻗어 낸 일권 역시 목표가 같았다.
두 개의 공격이 시작되자 나머지 인원들도 빈틈을 노리며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무공을 펼쳤다.
쩌저적!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사람이 아니라 위쪽 천장이었다.
‘설마 저 공격들을 맨몸으로 받아 내겠…….’
태흠은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다.
가면 아래 용연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위력의 고하(高下)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저 여덟 개의 빛들은 강기였고, 모두 용연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웃고 있는 것이다.
콰콰콰!
엄청난 폭음이 쉼 없이 일어났다.
차라락.
용연의 몸을 이미 감싸고 있던 낭수련의 형태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던 두께를 살기가 집중된 목, 어깨, 심장, 낭심, 허벅지에 집중시킨 것이다.
스르.
용연은 덮쳐 오는 공격들을 무시한 채 태흠을 내려다봤다.
‘내게 소문의 진원지라고 하는 걸로 봐서 묵자성 맹주가 보냈어. 측근?’
씰룩.
용연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태흠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막 공격들이 덮쳐 오려는 순간.
슥.
용연이 처음으로 손을 들었다.
***
쿠쿠쿠― 웅!
드드드드드!
적당한 장소로 골라 둔 동굴 안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졌고, 곧이어 땅이 흔들리며 사방을 진동시켰다.
“이 진동은 뭐, 뭐야!”
“저길 폭발시킨 거야?”
다급한 목소리로 발을 동동 구르며 고래고래 악을 쓰는 사람들도 있었고,
“왜 우릴 잡고 그러세요?”
“보내 주세요. 우린 정말 아무것도 본 게 없어요.”
“다시는 현상금 쫓아다니지 않을 테니 제발…….”
불쌍함을 유발시키는 표정과 몸짓에 무릎까지 꿇는 자들도 있었다.
묵 노야는 사람들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투신께선 여러분들을 우리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아끼십니다. 함부로 생명을 해할 분이 아니니 걱정 말고 하던 얘기나 이어 가지요.”
“저, 정말인가요?”
가장 먼저 동굴을 나섰던 흑나찰이 뒤쪽을 막아선 삼십육무투들을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자, 아까 하던 말을 이어 가겠습니다.”
“현상금! 현상금 얘길 하던 중이었어요!”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무릎 꿇었던 사람들까지 눈을 빛내며 묵 노야를 쳐다봤다.
굉음과 진동보다 돈이 이들에겐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런 부류들이기에 일부러 붙잡아 놓은 것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현상금을…….”
묵 노야는 말을 끝내지 않고 동굴 쪽을 돌아봤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은 묵 노야를 일제히 향했다.
드드드드―.
진동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으나 이미 그들의 관심사는 동굴 안의 생존자가 아니었다.
몇 명으로 시작된 불만에 찬 표정은 빠르게 전염되어 삼분지 이 가까이 늘어났다.
“흘흘.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마음이 쓰입니다그려.”
“에이, 투신께서 자신 있으니 나섰겠죠? 처음에 나와서 확신은 못 하지만, 나온 인원을 보니까 남아 있는 자들은 많아 봐야 열 명 남짓?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저도 투신 편에 설게요.”
흑나찰은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나서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마지막엔 선동까지 해 가며 자신의 가치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 묵 노야를 슬쩍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흑나찰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십 명이 자신도 같은 생각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잘하네. 여기 모인 자들은 다들 흑나찰 정도는 해낼 수 있을 것 같군. 저, 저…… 눈빛들하고는.’
묵 노야는 탄성을 터트리며 놀란 척했으나 이 모든 상황은 이미 계산되어 있었다.
힐끗.
한 번 더 동굴 쪽을 돌아봤다.
드드드―.
여전히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무슨 변수라도 생긴 건가?’
묵 노야가 생각하는 변수는 용연의 신변이 아니라 저 안의 상황에 대한 것이다.
용연은 이미 웬만한 고수들로는 상대조차 안 됨을 잘 아는 까닭이다.
“투신 편이라. 흘흘. 모두 저기 계신 흑나찰 소저에게 감사하세요. 분배하려던 생각을 흑나찰 소저가 바꿔 놓았지 뭡니까?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똑같은 금액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와와!
묵 노야의 결정으로 축제가 벌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부류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부를 이미 어느 정도 이룬 자들은 제외해야 한다. 그들에겐 하나 이상의 의미가 담긴 돈이어야 하니까.
피식.
묵 노야는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당연히 비웃음이었다.
세상에 공짜 돈이 있을 리 없잖은가?
돈을 받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끄덕.
묵 노야의 허락이 떨어지자 삼십육무투는 빠르게 준비해 둔 자루를 앞으로 옮겨 놓았다.
그때였다.
꾸드드드― 응!
거대한 굉음과 함께 동굴을 막아 놓은 바위가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