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림단주-197화 (197/232)

197화

용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른 명은 십여 조로 나뉘어 모여드는 삼십육무투들을 향해 내려갔다.

일, 이 기가 모두 모이면 다시 훈련된 짝과 함께 조를 이뤄 일대를 훑을 것이다.

삼십육무투들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유인하며 어떤 자들을 데려가야 할지 봐 둔 상태이기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힐끗.

용연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계속해서 용연 쪽을 보고 있던 묵 노야는 허리를, 단림은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용연이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

패앵―.

채찍이 독사의 혀처럼 몸을 이리저리 휘며 지달의 사타구니를 집요하게 쫓아갔다.

펑!

허공을 때린 채찍은 바로 흑나찰의 손에 회수됐고 곧장 다시 허공을 누볐다.

짜자― 짝―.

벌써 십여 번이나 실패한 공격이지만, 흑나찰은 포기하지 않았다.

“현 매,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 거야? 현 매도 알다시피 상황…… 으크.”

지달은 흑나찰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해결의 실마리를 풀려 했으나, 그 한마디로 상황은 더욱 극악으로 치닫고 말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흑나찰의 채찍이 지달의 옆에 있던 나무를 휘돌며 공격한 것이다.

“칫.”

흑나찰은 또다시 실패하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음에 보자…… 어?”

기회다 싶어 몸을 돌렸던 지달이 멈춰 서며 재빨리 몸을 나무 뒤로 숨겼다. 그러고는 뒤쪽의 흑나찰에게도 빨리 숨으라는 손짓을 했다.

“또 무슨…….”

흑나찰은 안 속는다며 지달에게 손을 쓰려다 앞쪽에 벌어진 광경 하나로 인해 다급히 몸을 숨겼다.

별호까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현상금 사냥을 하며 몇 번 본 자였는데, 그가 제대로 손 한 번 못 쓰고 쓰러지는 것을 본 것이다.

‘뭐지? 어려 보이는 놈들인데?’

쿵쿵쿵.

흑나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일단 조용히.

지달이 입모양으로 말하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아가리 닥쳐.

흑나찰도 입모양만으로 대답을 건넸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을 때였다.

슷.

흑나찰과 지달의 옆으로 인영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

지달이 깜짝 놀라 손으로 흑나찰을 가리켰다.

“흡!”

흑나찰은 지달의 표정이 이상해 먼저 채찍부터 휘두르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턱.

“함께 갈 곳이 있습니다.”

숨기 전에 봤던 복장과 같은 옷을 입은 청년이 채찍을 손에 쥔 채 무표정하게 흑나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힐끗.

흑나찰의 고개가 지달 쪽으로 돌아갔다.

지달은 이미 혼절한 상태로 같은 복장의 청년 어깨에 메져 있었다.

“나 속곳 안 입었…….”

무슨 말이라도 해서 시간을 끌려 했으나 청년의 주먹이 흑나찰의 복부에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의식을 잃고 말았다.

***

“회주, 몇이나 왔을까?”

용연은 삼십육무투들이 기절한 자들을 마차에 나르는 모습을 보며 묵 노야를 돌아봤다.

“일부러 잡힌 자들만 걸러 내면 될 것 같습니다, 투신.”

묵 노야는 당연히 이어질 수순이었기에 바로 대답을 건넸다.

“아니, 그것보다는 남기는 쪽이 낫겠군.”

용연은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실내로 들어갈 수 없으니 지켜보려고 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어.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삼십육무투가 경계할 수 있는 범위를 너무 넓게 여겼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묵 노야는 허리를 숙이며 뒤쪽의 단림을 돌아봤다.

용연의 말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

쓰으― 후― 쓰으― 후―.

사람들 호흡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진 못했다.

빛이 차단된 공간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때,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가 가까워 올수록 갇힌 사람들의 심장도 덩달아 뛰었다.

그극―.

문이 열리며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윽! 지랄. 몇이나 들어온 거야?’

흑나찰은 손을 들어 빛을 가리며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노력하다 공간을 채우는 인영들의 숫자를 보고 속으로 욕을 뱉었다.

막아서는 숫자가 튀어 나가려던 생각을 버리게 만든 까닭이다.

툭. 툭.

누군가 흑나찰의 어깨를 건드렸다.

“현 매, 조…….”

“혀 잘라 줄까?”

“화도 살아야 낼 거 아냐? 저들이 누군지 알아? 입 닫을까?”

지달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흑나찰은 빛을 등지고 있는 자들의 정체를 지달이 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일단은 들어야 했다.

“삼정일사회야.”

지달이 최대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순간,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지달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까닥.

흑나찰은 계속 말해 보라는 턱짓을 했다.

“종남파 장로를 군림단이 죽였다는 소문이 강호에 쫙 퍼지고 있어. 투신도 들었을 테니 뭐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투신이 군림단주를 숙적처럼 여긴다는 얘긴 모르는……구나?”

지달은 흑나찰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몰라. 그럼 안 되냐, 개자식아?”

“에헤이,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투신이 군림단주를 왜 적으로 여기는지 말해 줄까?”

“…….”

“삼정일사회 규합대회에서 군림단주가 고수 열네 명을 죽이고 사라진 일이 있어.”

“아, 그 얘기 나도 알아.”

“그때, 투신이 군림단주와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않겠다고 했다던가, 뭐라던가.”

‘그럼 소문의 진원지가 삼정일사회란 거야? 현상금이 걸렸다는 말을 퍼뜨린 것도?’

오싹.

흑나찰은 지달의 손이 닿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떨었다.

이런 식의 전개.

너무 익숙하잖은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을 납치하거나 고문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부류 중 한 명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꿀꺽.

저절로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지금부터 내 뒤에 잘 숨…….”

“조용히 좀 해요! 뭘 자꾸 일을 도모하자고 하는 건데요?”

흑나찰이 갑자기 뾰족한 목소리와 함께 팔을 엇갈리게 만든 후 몸을 뒤로 뺐다.

“……뭐 하냐, 너?”

지달은 갑작스러운 흑나찰의 태도에 놀라서 한마디 건넨 뒤 굳고 말았다.

“저는 이 사람 몰라요. 아까부터…….”

“흑나찰과 지달이?”

빛을 등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이 흑나찰의 말을 잘랐다.

“칫. 우리를 가둔 이유가 뭐죠?”

흑나찰은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깨닫고 바로 화제를 돌렸다.

“가둔 적 없다.”

조금 전과 같은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그러자 흑나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쏘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 말고 더 높은 사람은 없어?”

흑나찰이 생각할 때는 귀에 들린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을 기절시킨 청년이라 여긴 것이다.

순간, 그림자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숨을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끌려온 사람들을 향해 무거운 공기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뭐지, 이 싸한 느낌은?’

“없다.”

쿵!

목소리 주인의 한마디에 흑나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 그렇군요. 음, 조금 전에 저흴 가두지 않으셨다고 하셨는데, 그럼 가도 될까요?”

“물론이다.”

목소리 주인의 허락에 사람들은 일제히 눈을 반짝이며 말을 꺼낸 흑나찰에게 무언의 강요를 구했다.

“저는 오늘 일에 대한 그 어떤 말도 흘리지 않을 테니 아무 걱정 마…….”

흑나찰은 가장 먼저 일어나 그림자들 옆을 지나가다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하려고 일부러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슷.

그림자 하나가 흑나찰의 시야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시작이 어렵지 그 뒤로는 사람들이 줄줄이 일어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뭐지?’

‘이대로 보내 준다고?’

무당파 조균과 화산파 이수윤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나가야 할지 남아야 할지 눈으로 생각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때, 두 사람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목소리를 냈다.

“힘으로 밀고 나갑시다. 기껏해야 열도 안 되는 인원으로 우리를 모두…….”

퍽!

뭔가 터져 나갔다.

“으으…… 설마 이거 피?”

“나, 난 먹었어. 으아아아아!”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조용.”

우우웅!

내공 실린 한마디가 내부를 크게 울렸다.

순식간에 모든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눈꺼풀을 서너 번 끔뻑였을 때, 반응이 일어났다.

“으윽!”

“악!”

사람들이 귀를 막고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한 것이다.

조균과 이수윤은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동시에 귀를 막으며 괴로운 척을 했다.

생각보다 넓은 공간인지 공명된 소리가 계속해서 귀를 파고들었다.

‘셋에…… 여섯.’

용연의 시선이 빠르게 좌에서 우로 어둠 속을 훑었다.

고개를 숙인 채 소리에 미동도 하지 않은 셋과 뒤늦게 귀를 막으며 괴로운 척하는 여섯을 찾았다.

“말했듯이, 나는 가둔 적 없다.”

용연은 슬쩍 옆으로 몸까지 열어 주었다.

그러자 다시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끄덕.

잠시간 지켜보던 용연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턱.

삼십육무투가 나가려는 두 사람을 막아섰다.

“두 사람은 기다려.”

용연이 조균과 이수윤을 돌아봤다.

가면 사이로 두 사람의 눈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안광이 흘러나왔다.

‘이수윤과 나만?’

조균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곳을 쳐다봤다.

툭.

이수윤의 손가락이 허벅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쓰자는 신호였으나 조균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수윤은 자신에게 가려서 가면 쓴 자의 눈빛을 보지 못했기에 저런 반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덜덜덜.

조균은 기어코 몸을 떨기까지 했다.

“도…….”

텁.

“아, 알겠습니다. 제 친구가 서, 성질이 급해서…….”

조균은 이수윤의 입을 막으며 힘을 써서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수윤의 반항은 무시했다.

이렇게 해야 살 수 있다는 본능이 만들어 낸 행동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을 시작으로 총 아홉 명이 내부에 남게 됐다.

“나는 잠깐 이들과 얘기를 나눠야겠으니 무투들은 회주에게 가 봐라.”

척.

무투들이라 불린 그림자들이 말없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는 용연의 곁을 떠났다.

그러자 내부에 남은 아홉 명의 눈이 빛났다.

그긍―.

아홉 명에게는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림자 한 명만 남고 입구까지 닫아 버려 준 것이다.

“나는 대화를 선호한다. 세 명. 내가 대화할 숫자다.”

용연은 필요한 말을 끝낸 후 동굴 안에 침묵을 강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