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림단주-195화 (195/232)

195화

“으아악!”

“사, 살려…….”

혼비백산해서 피하는 종남파 제자 수십 명의 몸이 찢어지고 뚫려서 바닥을 피로 물들였다.

쩌쩡!

엄청난 수의 희생자를 만들어 낸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자들은 최대한 멀리 피하라!”

팔선과 함께 내려온 장문인 정광은 내공을 실어 명령하고는 곧장 몽외를 향해 움직이려 했다.

턱.

“안 됩니다! 장문인께서는 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일대제자 다섯이 정광을 막아섰다.

정광까지 죽을 경우 종남파는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하는 다섯 제자의 눈이 붉었다.

그 모습을 보자 정광은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팔…….”

정광은 호흡을 고르며 팔선을 물러서게 만들려 입을 열었으나, 한마디밖에 꺼내지 못했다.

팔선 중 둘을 잃은 여섯 도인들이 일제히 몽외를 향해 검강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콰콰콰콰!

‘뭐, 뭐지? 내가 뭘 본 거지?’

정광의 시선은 팔선들이 아니라 공격을 기다리고 있는 몽외에게 닿아 있었다.

몽외는 불꽃놀이라도 보는 것처럼 치아를 모두 드러낸 채 한껏 입까지 벌린 채 공격을 지켜봤다.

단언컨대, 사람이라면 지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파, 팔선께서 당하셨다!”

“모두 팔선들을 받아 내라!”

정광은 일대제자들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획.

날아오는 물체를 정광은 무의식적으로 잡아챘다.

“헉!”

“자, 장문인, 괜찮으십니까?”

“그, 그…….”

일대제자들이 정광의 손을 쳐다보며 경악한 표정들을 지었다.

정광은 시선을 내려 손에 든 물건을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내던졌다.

도포째 잘린 팔선 중 한 명의 팔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공격이었다. 하마터면 다칠 뻔했어. 크크크.”

혈향이 훅, 끼치는 몽외의 목소리가 주위를 침묵시켰다.

“네놈은 누구냐?”

정광은 일대제자들의 어깨를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군림단의 몽외다. 강혁 한 명을 원했지만, 내게 이빨을 드러내는 것들을 봐주는 성미가 아니라 몇 명 늘었다. 크흐, 좀 더 놀아도 괜찮겠지만, 오늘은 철혈사자맹주에게 경고하러 온 것뿐이니 이만 가지.”

“이……!”

“아, 많이 참은 거야.”

히죽.

몽외는 윗니와 아랫니를 맞물리며 최대한 사람 좋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몸을 돌려 부서진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가지만 묻자. 네가 군림단주냐?”

정광은 몽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오싹해졌으나 언젠가 복수를 할 것이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크크. 몇 번을 말해. 나는 군림단원이다.”

“뭐, 뭐라고!”

정광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강혁과 팔선을 혼자서 처리한 자가 일개 단원이다?

“장문인, 저자를 이대로 보내시는 겁니까?”

“저자를 보내시면 천하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일대제자부터 수많은 제자들이 다가와 공격하란 명령을 촉구했으나, 정광은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다.

“너희들 중에 군림단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 사람이 있느냐?”

정광의 질문에 제자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이야 종남파에 틀어박혀 강호 소식과 담을 쌓았다고 하지만 종종 철혈사자맹의 부름을 받고 나갔다 오는 제자들조차 함구하고 있었다.

“철혈사자맹에 가 있는 덕인이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하라. 그리고 팔선의 자리를 채울 때까지 종남파 제자들의 강호 출입을 금한다.”

“장문인님, 그건 안 됩니다!”

일대제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정광은 이를 악물며 몸을 돌려세웠다.

팔선 중 여섯의 공격을 바라보던 몽외의 얼굴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제석천(帝釋天)이시여, 부디 종남에 빛을 주소서. 무량수불, 무량수불…….’

정광은 면벽토굴로 걸음을 옮겼다.

***

[……(중략)……스물아홉 명으로 구성된 강호역사상 가장 작은 단위의 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분 구조는 학림, 교림, 선림, 그리고 단주, 이렇게 네 단계로 추정됩니다.

종남파에 난입한 자는 네 단계 중 세 번째인 선림 중 일인이 아닐까…….]

와락!

묵자성은 온통 추측으로 가득 차 있는 서찰을 구겨서 던져 버렸다.

“번뇌객은?”

“오후에 인편으로 하루 거리라고 전했…….”

“지금!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봐.”

묵자성은 구궁위 중 한 명의 말을 잘랐다.

“존명.”

구궁위가 고개를 숙인 뒤 다시 천장으로 모습을 감췄다.

‘군림단원 중 하나가, 번뇌객을 부린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아내고서, 경고조로 종남파에 쳐들어가 강혁 대장로를 죽였어.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었을까?’

슥.

묵자성은 사자궁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들었다.

번뇌객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진천전주와 자신뿐이란 것을 알고, 아무도 모르게 정보를 전해 줄 수 있는 사람.

무심코 고개를 든 이유였다.

고작 스물아홉 명뿐인 집단에서 그런 고급정보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미심쩍은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묵자성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호원을 섣불리 의심부터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번뇌객이 돌아오면 그의 주변부터 조사하면 될 일이다. 번뇌객이 돌아오면.

***

[감악문을 멸문시킨 자는 철혈사자맹 진천전의 진천별위 중 한 명으로, 진천전주의 후보 정도로 여기시면 될 듯합니다. 외연 식구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등 교림과 제가 교대로 상대하며 처리했습니다.

―교림 곽집.]

“교대로.”

용연은 전서구를 통해 전해 온 쪽지를 재로 만들었다.

등언과 곽집, 둘 중 한 명이 제압한 것이 아니라, 교대로 상대했다는 말이 신경 쓰인 것이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것을 본 것일까?

인이예가 나풀거리며 다가오다 눈을 가늘게 뜨며 ‘뿌’ 한 표정을 지었다.

“왔어요?

“……가야 해요?”

인이예의 목소리에 불만이 담겨 있었다.

“음, 가요?”

“아뇨!”

“나도 안 가요. 예 매가 얼마나 안전한지 확인할 때까지 못 가요.”

용연은 짐짓 화난 얼굴을 하며 인이예를 쳐다봤다.

“히…….”

인이예는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환한 웃음과 혀를 살짝 내밀었다 넣으며 추영영에게만 보이던 애교를 부렸다.

“예쁘다.”

용연은 그런 인이예의 볼을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인이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예야, 그런 거 일일이 다 느끼는 거 아니다. 그래 봐야 남자만…… 으구, 저 순둥이.”

뒤따라온 추영영은 인이예의 옆모습을 보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용연이 말만 건네도 헤벌쭉, 손만 건네도 헤벌쭉.

사부보다 엄마의 마음이 더 큰 그녀로서는 인이예의 순정을 지켜만 봐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꾹.

인이예는 추영영을 보고 용연이 손을 떼려하자, 양손으로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우웅.”

간절한 눈빛과 투정 어린 애교까지 부리며 그대로 있어 주길 바랐다.

그러자 용연이 다른 손까지 들어 인이예의 양쪽 볼을 감싸며 얼굴을 가까이 댔다.

‘사, 사부님이 계신대? 어? 어라?’

또르륵, 또르륵.

인이예의 동공이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이렇게 첫 입맞춤을?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어 얼굴을 뒤로 빼려 했으나, 용연이 언제 떠날지 모르니 잘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몸에 힘을 뺐다.

“얼굴이 반쪽 됐네요. 은자림에만 매달리지 말고 가끔씩 내 생각도 좀 하고 그래요.”

용연은 양손으로 쥔 인이예의 얼굴을 코앞까지 당겼다가 내려놓았다.

“봐, 봤어! 나, 봤어! 지금 막, 막…… 으아,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숨이 차고 막 그런다. 으아, 우리 이예를, 이 날강도 같으니…….”

추영영은 얼른 인이예를 안은 채 뒤로 물러서며 용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거두고, 뻗었다가 거두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자 용연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용 단주, 먹은 것도 없으면서 왜 입맛을 다시는 게요? 내가 이런 걸 보려고 그토록 애지중지 우리 이예를 키운 게 아닌데. 흐흑.”

추영영은 인이예를 와락, 끌어안으며 울먹였다.

“사부님, 그…….”

꾹.

“이것아, 아니어도 맞아야 하는 거야.”

추영영이 힘껏 끌어안자 인이예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용연과 인이예가 입을 맞추지 않았음을 알지만, 자신이 제삼자로서 증인을 자처한 것이다.

“태루주님, 뭔가…….”

“오해라고 할 셈인가!”

추영영은 용연이 말을 끝내기 전에 버럭, 소리부터 질러 말문을 막는 동시에 눈을 감았다 뜨며 자신의 말에 따르라는 신호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찡긋.

“아닙니다. 태루주님이 보신 그대로입니다.”

용연은 고개까지 크게 끄덕이며 추영영의 말을 인정했다.

그러자 인이예가 슬그머니 추영영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돌아봤다.

웃음을 참느라 볼까지 잔뜩 부풀린 모습이었다.

“하, 하, 하…….”

용연은 걸렸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었고,

“푸…… 푸풉.”

인이예도 더는 참기 힘든지 볼 안의 공기를 한꺼번에 뱉어 냈다.

“……이예야, 이 사부는 진지하단…… 큽.”

추영영은 입술을 꽉 오므리며 참아 보려 했지만, 결국은 ‘망했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별것도 아닌 상황 하나로 크게 웃은 인이예와 추영영은 사이좋게 앞장서서 걸었고, 용연은 편안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이렇게 마음 편히 웃은 건 동동마을 이후 처음인 것 같다. 태루주님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용연은 새로 만든 은자림의 구조를 살피며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몰랐다.

전체적인 구조와 배치는 인이예가 맡았고, 세세한 부분은 추영영이 손을 댔다고 했다.

새로 지어진 느낌과 오랜 역사를 가진 문파의 느낌이 동시에 든 까닭이다.

이런 곳이라면 누구라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용연은 하루를 더 머물렀다.

밤늦게까지 추영영의 감시하에, 강호와 관련되지 않은 인이예의 일상 얘기를 많이 나눴다.

인이예가 몇 번이나 앞으로 군림단의 행보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지만, 웃기만 하고 얘긴 꺼내지 않았다.

동동마을에서 할아버지, 용잠의 기록을 몇 달 동안 읽으며 깨달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석실에서 그 많은 기록들을 보며 군림단원으로서의 할아버지를 존경하게 됐지만, 그 외에 혈육으로서의 감정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석실을 나가 육문의 회상을 통해 듣게 된 할아버지는 존경 그 이상의 감격을 주었다.

인이예의 일상이 궁금한 이유이기도 했다.

가끔씩 자신과 인이예의 얘길 듣던 추영영은 다른 곳을 돌아보며 입가를 삐죽였다.

잘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날이 밝아 올 때 날아든 전서구 한 마리로 인해 다시 떠나야 했지만, 인이예의 눈을 보니 이전처럼 아쉬움에 곧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본인에 대해 많이 알려 줬다고 여긴 걸까?

그렇게 새로운 은자림을 떠났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말씀대로 종남파의 강혁 장로가 군림단원에 의해 죽었다는 소문을 화자들뿐만 아니라 삼정일사회 전원에게 알렸더니 반응이 하루 만에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묵자성 맹주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문의 진원지를 쫓는 자들을 삼십육무투들이 고군분투하며 유인하는 중입니다.

투신의 자비로 모두 살아나길 바라마지 않겠습니다.

―회주 묵 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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