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회주님, 이제 호원이란 맹수가 어느 동굴에 들어가 있는지 확인해 보죠.”
용연은 허리를 펴며 의자에 등을 댔다.
“흘흘. 맹수 몰이는 제가 전문입니다, 투신. 맡겨 주시면 올가미를 잘 만들어 보겠습니다.”
묵 노야는 밝아진 목소리로 용연의 말을 받았다.
“차근차근 준비하세요. 그리고 당분간 군림단주와 투신의 모든 행적을 호원 궁주가 보고 듣도록 방관하세요. 단원들에게도 그렇게 전할 거예요.”
“삼정일사회에 심어 놓은 호원의 첩자를 색출해서 모른 척 원하는 정보를 잘 전달해 주겠습니다.”
“은자림과 사야벌에도 알려야겠어요.”
“직접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군림단주와 투신을 좀 더 유명해지도록 만들려고요.”
용연은 생각해 둔 것이 있는지 웃으며 묵 노야를 돌아봤다.
“다녀오십시오, 투신.”
묵 노야는 묻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적이 안개에 가려져 있을 때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아래를 살피며 움직여야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사방팔방에 발자국을 남겨 적으로 하여금 흔적을 쫓게 만들어야 한다.
용연은 지금 사방팔방 발자국을 남기려는 것이다.
그것도 군림단주와 투신으로서.
***
[호씨세가 경계 삼엄.]
[물자 추적 결과.
유입된 쌀과 밀의 양이 세 달 전에 비해 무려 네 배 이상 많아졌음.
다른 물품들 역시 매일 다섯 수레 이상 들여가고 있음.]
[최대한 조심스럽게 공급자들과 접했으나, 그들은 어디에 물건을 내려놓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함. 호씨세가로 들어가는 순간 눈을 가린다고 함.]
“구궁위, 호씨세가의 조사는 여기까지 한다.”
묵자성은 구궁위들이 가져다 놓은 서찰들을 옆으로 치우며 의자에 등을 댔다.
“존명.”
아홉 방위에서 짧은 대답이 동시에 들려왔다.
대전 안이 조용해지자 묵자성은 붓을 들어 종이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
[사자궁주님, 귀암로 네 축의 주인이 바뀐 것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 짐작합니다. 귀암로의 일이니 구왕이 알아서 수습하겠지요. 그런데 삼정일사회란 곳을 조사하러 갔던 구대문파 제자 몇몇과 오대세가 식구 몇몇의 애길 들었지 뭡니까? 예전 같았으면 벌써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 주셨을 텐데, 소식이 없어 먼저 연락을 보내 봅니다.
―철혈문주 묵자성.]
“찬진아, 철혈문주가 삼정일사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 오는구나.”
호원은 묵자성이 머무는 철혈대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주…….”
호찬진은 호원이 묵자성을 ‘맹주’가 아닌 ‘문주’라고 부르자 당황해서 눈만 끔뻑였다.
“철혈문과 사자궁을 구분하자는 뜻이겠지. 우리 세가를 조사한 모양이다.”
호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대놓고 호씨세가를 드나들었는데 이제야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경고 비슷한 서찰이나 보내다니.
“궁주님, 최대한 빨리 지하 석실을 숨기라고 하겠습니다.”
“뭣 하러?”
“예?”
“서찰 어디에도 존중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런 식의 행태는 그동안 희생해 온 나를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다.”
오씩!
호찬진은 호원의 전신에서 확, 피어오른 살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호원은 살기를 일으켰을 때보다 더 빨리 갈무리했다.
“후후후. 상대가 소인배처럼 나온다고 나도 그래선 안 되지. 대답 하나, 제안 하나. 괜찮겠구나.”
슥.
호원이 태사의에 앉은 채 손을 저었다.
그러자 탁자 위에 놓인 종이 두 장이 나풀거리며 호원을 향해 날아왔고, 뒤이어 붓이 호원의 손에 들렸다.
[귀암로 여섯 축 중 한 곳의 일이니 구왕이 해결하도록 지켜보는 것이 옳습니다.
사자궁도 몇이 죽었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그 정도의 일로 구왕과 척을 져선 안 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혈명에서는 진상 조사를 위해 고목을 보냈다더군요.
사자궁은 지켜볼 생각입니다.
―사자궁주 호원.]
“찬진아, 내가 언제 무성별위를 삼정일사회로 보내라고 한 적이 있던가?”
호원은 둥글게 말린 서찰과 붓을 제자리로 보낸 뒤 호찬진을 돌아봤다.
“제 기억으로는 없습니다.”
호찬진은 재빨리 대답했다.
“무성전주는 오늘부로 공석이다.”
“예? 예.”
“남궁창이 내 허락도 없이 무성별위를 삼정일사회로 보냈다. 나머지 별위 중 한 명을 무성전주로 올릴 것이다. 그리고 사자궁은 이 시간 이후 모든 활동을 멈춘다.”
“구, 궁주님!”
호찬진이 화들짝 놀라며 부르짖듯 외쳤다.
“부탁도 아니고 왜 매번 알아서 하더니 아무것도 안 하느냐고? 그럼 알아서들 해 보라고 해.”
호원은 낮게 코웃음 치더니 다시 붓을 놀렸다.
[구왕, 나머지 두 개를 쥐고 있으면 여전히 귀암로의 바퀴는 여섯 축이 될 것입니다. 나는 큰 거 하나를 놓을 생각이에요. 군림단이나 삼정일사회 같은 작은 것들이야 네 곳이 뛰어다니면 밟혀 죽지 않을까요?
―호원.]
철혈문, 호씨세가, 구왕, 사혈명.
사파전을 펼치자고 제안한 것이다.
‘군림단주와 투신, 두 사람도 참여했으면 좋겠군.’
호원은 치아까지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사자궁주로서가 아니라 호원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싸움의 첫발을 묵자성 덕분에 내딛게 된 것이다.
***
쉬쉬쉭―.
십여 명을 이끌던 선두의 인영이 손을 들자 일제히 멈춰 섰다.
척.
선두의 인영이 손바닥을 담에 댔다.
‘귀는 속여도 이 번뇌수를 속일 진동은 없다. 이십 장…… 이 정도 진동이라면 깨어 있는 숫자가 많아 봐야 열 명 남짓이겠군.’
번뇌객 웅기는 사람이 낼 수 있는 진동을 감지하고 데려온 자들에게 진입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십여 명이 담을 넘었다.
‘군림단이 마지막으로 임무를 수행한 곳이라지?’
번뇌객은 철혈사자맹주 묵자성의 명령으로 사천성에 와 있었다.
―무슨 연유로 군림단이 사천성을 떠났는지 알아오라.
명령을 들으면서 번뇌객은 의아했다.
묵자성의 요구가 매우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힐끗.
번뇌객의 눈에 편액이 들어왔다.
<감악문>
문주란 자에게 원하는 대답을 들으면 사천성에서 사라질 이름이었다.
***
[감악문에 적이 침입해 아이들까지 모두 죽였음.
학림 이서가 마지막으로 임무를 수행한 곳이고 문주가 직접 중재를 청할 정도로 유한 성격임.
특이 사항은, 멸문시킨 자들이 사용한 무공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시체들을 짓뭉갠 흔적이 도처에 널려 있음.]
용연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서찰을 펼쳐든 채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사천성에 남겨 둔 외연 식구로부터 받은 서찰이라며 구선이 사람을 시켜 보내온 것이다.
“등 교림, 곽 교림, 읽어 봐요.”
용연은 앞에 앉은 두 교림에게 서찰을 건넸다.
“어디 짓인지 알아내겠습니다, 단주님.”
곧바로 대답하는 등언과 달리 곽집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곽 교림?”
“귀암로라면 보복치고는 약합니다. 그리고 사혈명이라면 굳이 시체에 다시 손을 대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둘을 제외시키면 한 곳이 남지요.”
“철혈…….”
척.
곽집이 철혈사자맹이라고 말하려 할 때, 용연이 손을 들어 멈추게 만들었다.
“그 한 곳도 구대문파연합 쪽인지, 오대세가연합 쪽인지 구분해야 돼요.”
“……하나가 아니라 둘이군요.”
곽집은 용연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등 교림, 곽 교림은 당장 호북성 쪽으로 출발해요. 구 향주가 그들의 뒤를 추적 중이니 위치를 알려 줄 거예요.”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알아낼까요, 단주님?”
슥.
용연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눈으로 반문한 등언을 쳐다봤다.
그러자 등언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군림단과 인연이 닿은 곳을 멸문시킨 자들을?”
용연의 목소리에 노기가 담겼다.
“전력을 다해 처리한 뒤, 근처 마을에 등 교림과 같이 자리 잡도록 하겠습니다, 단주님.”
용연은 곽집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등언과 곽집의 신형이 양쪽 창밖으로 사라졌다.
―앞으로, 임무를 마친 군림단원은 그곳에서 백 장 이내의 지역에 자리를 잡고 단주님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
용연이 진류에게, 진류가 다시 교림과 학림에게 전한 단의 새로운 규칙이었다.
“은자림, 여우락, 사야벌 중 한 곳이 아니라 사천성의 문파를 노렸다…….”
용연은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뇌까렸다.
군림단의 영역으로 들어와서 흔적까지 남겨 둔다?
사천성을 수많은 지역 중 한 곳이라 여기는 자의 짓이다.
철혈사자맹에서 보낸 자들이지만, 사자궁은 아닐 것이다.
그럼 남은 곳은 구대문파연합의 수장인 묵자성뿐이다.
“아홉 손가락 중에 가장 아픈 곳은 어딜까?”
용연은 한 사람을 떠올리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선을 그어 주지 않으면 모조리 먹어치울 몽외를 보낼 생각이기 때문이다.
묵자성에겐 이번 일이 악몽으로 남게 될 것이다.
***
댕― 대엥―.
종남파의 새벽을 여는 종소리가 산 아래로 퍼져 나갔다.
짚신 끌리는 소리가 일제히 연무장을 채웠고, 이어서 어린 목청들로 시작된 기합 소리가 전각들을 울려 댔다.
“무량수불. 참으로 좋은 기운이로구나.”
종남파 대장로 강혁은 제자들의 힘찬 손짓과 발짓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뒤쪽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대장로께서 먼저 와 계셨군요. 무량수불.”
“허허허. 못난 사람이 장문인을 뵙습니다. 무량수불.”
강혁은 종남파 장문인 정광을 향해 반장의 예를 취했다.
“가당찮은 말씀이세요.”
“맹주님이 이번엔 화가 단단히 나신 모양입니다, 장문인.”
“곧 부르실 겁니다. 강호에는 철혈사자맹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들이 셀 수 없이 많은데, 대장로님의 조언 없이 어찌 처리하겠습니까? 덕인이에게도 언질을 해 놓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정광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강혁에게 다가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장문인께서 그런 수고를…….”
“그동안 대장로께 받은 도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허허. 장문인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하십니다그려.”
“잘 다져 놓아 주세요. 철혈사자맹에서 종남의 자리가 더 넓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가늘어진 정광의 시선이 강혁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강혁은 모른 척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 손님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정광의 뒤쪽에 시립해 있던 이대제자 중 한 명이 정문 쪽을 가리켰다.
“이 이른 시각에?”
정광은 의아한 표정으로 정문을 돌아봤다.
그때였다.
콰콰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