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덜컹.
기왜는 <구구(九九)>라고 적혀 있는 석문 앞에 서서 머리를 숙였다.
호원은 석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섰다.
“열겠…….”
척.
호원이 손을 들어 기왜의 말을 막았다.
힐끗.
좌측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둘 중 하나가 저곳에 있나?”
“아닙니다. 거긴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오려는 시도조차 없던 방입니다.”
호원은 기왜의 말을 무시하고 석문 앞으로 갔다.
<이오(二五)>.
지나친 방이다.
‘구구’ 때문에 왼손이 반응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열어라.”
“……예.”
기왜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며 바깥에서만 열리는 석문을 조작해 열었다.
후욱―.
“읍!”
석문이 열리며 엄청난 열기가 기왜를 덮쳐 왔다.
턱.
“좋은 꿈을 꾸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호원은 기왜를 덮치던 열기를 왼손으로 잡아 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전신에 열꽃이 피어 흉한 모습을 한 괴인은 호원의 한마디에 눈물을 흘렸다.
“지금 일권(一拳)에 백 일 동안 모은 힘을 쏟아 냈어. 통과.”
꾹.
“커헉!”
눈물을 흘리던 괴인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호천위(護天位)에 오른 것을 축하한다.”
툭.
호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괴인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른 호천위들에게도 가 볼까?”
호원이 돌아보자 기왜는 서둘러 다른 방으로 안내를 했다.
그렇게 호원의 손을 거친 인원은 기절한 괴인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이었다.
몇 달 동안의 노력이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십사객을 뽑기 위해 받아 둔 이름들을 모두 이곳으로 불러모았다.
역혈대공(易穴代功).
영약 등을 이용해 내공이 채워진 혈들을 호씨세가 비전대법으로 옮기게 만드는 대법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채워진 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몸은 여전히 그곳에 같은 양의 내공이 채워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수십 번이 반복되면 대상자는 과정을 견딘 것만으로도 막대한 내공을 갖게 된다.
호원은 백여 명 중 스무 명이 필요했다.
그들이 만들어지는 순간, 호씨세가는 오대세가 중 한 곳도 아니고, 사자궁주를 배출하는 곳도 아니다. 바로 호원을 배출한 곳이 되는 것이다.
***
호원은 지하 석실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호찬진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궁주님, 진천별위 무류선생과 무성별위 제갈악 대협이 삼정일사회 총본진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합니다.”
“사혈명에선 누굴 보냈지?”
호원은 호찬진의 보고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대수롭지 않게 듣다 반문했다.
“고목 단적양을 보냈다고 합니다.”
“단적양? 파륵이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군. 알았다.”
“예?”
“삼정일사회의 규모 확장은 오래전, 혈교와 많이 닮아 있어. 혈교의 전성기 기록을 보면, 그들의 위세가 하늘에 닿아 곧이라도 강호를 일통할 것 같았다고 적혀 있었지. 그런데 결과는 어땠는지 아느냐, 찬진아?”
“모르겠습니다, 궁주님.”
“당시 사자궁주께서 비신(秘神)들을 모아서 혈교주를 죽여 버렸다. 그러자 나머지는 알아서 지리멸렬했지.”
호원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삼정일사회에서 벌어질 일이기 때문이다.
“비신?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한 분야만큼은 신의 경지에 오른 분들을 가리키는 칭호다.”
“그런 분들을 왜 저는 몰랐던 것입니까, 궁주님?”
“너도 들어 본 적이 있다. 군림단 임주를 처리할 때 그분들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많은 분들이 군림단에 의해 돌아가셨지 않나?’
호찬진은 얼마 전 여덟 명의 전대 고인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미미하게 갸웃했다.
“돌아가신 분들은 자격을 잃은 거다, 찬진아. 살아 있는 분만이 내게서 비신이란 호칭을 들을 수 있으니까.”
“아!”
“그래. 둘 혹은 셋이 모일 때 내가 불러 드리는 호칭이지.”
호원은 탄성을 터트린 호찬진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호찬진이 무릎을 꿇으며 호원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의 표현인 것이다.
‘군림단주, 사람들이 투신에게 집중하도록 일부러 유도하는 건가?’
호원은 호찬진의 보고에서 많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호찬진은 군림단주에 대한 말은 꺼내지도 않고 삼정일사회와 투신에 대해서만 보고를 했다.
“찬진아, 다른 소식은 없느냐? 귀암로 여섯 축 중 세 축을 먹었으면 뭐라도 할 것 같은데 어째서 군림단주와 관련된 보고는 없는 거지?”
“취합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사성위들을 통해서 움직여야 하는 건 잊지 않았고?”
“예.”
호찬진의 똑 소리 나는 대답에 호원은 그제야 다시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
“삼(三), 저쪽으로. 칠(七), 거기 깃발 보이지? 그곳에 가서 다시 배정받아. 다음.”
삼십 대 사내는 숫자와 이름을 적고는 다음 사람을 불렀다.
목소리는 쉬었고 눈가는 꺼뭇했으나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교대 시간은 아직도 반 시진가량 남아 있었다.
“좀 더 힘내. 눈만 붙이고 바로 와서 교대해 줄게.”
퀭한 눈으로 뒤쪽을 지나가던 구 호법 소속 삼십 대 사내가 어깨를 두드려 주며 지나쳤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힐끗.
동료를 지나친 삼십 대 사내는 길 아래 한적한 장소에 이르자 뒤를 돌아봤다.
최대한 빨리 여우락 열두 호법의 휘하에 오백 명씩 채워 두라는 신입락주의 명령 때문에 이 난리였다.
절레절레.
사내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단 아래 마련된 숙소로 들어가려 했다.
틱.
무언가 날아와 문을 맞추고 떨어졌다.
뒤를 돌아보자 나무 뒤에서 손 하나가 오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반짝.
언제 피곤했느냐는 듯 사내의 눈에 생기가 피어났다.
곧바로 소변이 마렵다는 듯 바지춤을 올리며 손 쪽으로 종종걸음 쳤다.
다가가자,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성위님이 직접 오…….”
나무 뒤에 있던 오성위 중 한 명인 남궁찬이 손가락을 들어 입에 대고는 따라오라며 숲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찬이 멈춰 선 곳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반으로 쪼개진 나무 아래였다.
“군림단주는?”
남궁찬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온 적 없습니다.”
“확실해?”
“왔다면 제가 알았을 겁니다.”
“흠. 새로 뽑힌 락주의 출신은?”
“……얼굴도 제대로 보질 못했고, 몇 사람이 들어가기에 삼 장 밖에서 지청술(地聽術)을 사용했는데…… 목소리를 차단한 것처럼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녀라도 매수해.”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정보를 얻으면 지체 없이 이곳에 표식을 남겨 둬.”
“예.”
사내는 남궁찬이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추자 멈춰 서서 머리를 긁적였다.
“비 상종 중에 내가 제일 빡센 것 같다.”
사내는 혹시 몰라 바지춤을 내렸다가 올린 후 종종걸음으로 돌아갔다.
슷.
쪼개진 나무 아래로 인영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텁.
담영호가 발끈하려는 남궁산산의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먼저 사라진 남궁찬 쪽을 쳐다본 후, 숙소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서 심은 놈인지 알아봐.”
“철혈사자맹 쪽일 거예요. 멀어서 모양까지는 못 봤지만 오대세가 중 한 곳의 수실이 달려 있었어요.”
‘음? 오대세가?’
담영호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왜요, 담 랑?”
“오대세가를 움직이는 건 사자궁이지?”
“사자궁의 명령을 무시할 세가가 없기는 해요. 철혈사자맹과…… 구별해야 하는 거예요?”
“느낌이 그래, 느낌이.”
담영호는 확답을 주지 않고 남궁찬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봤다.
***
[여우락 내에 첩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오대세가 중 한 곳의 식구로 예상되는 자를 발견했습니다. 여우락주의 말로는, 발견한 자의 허리에 매달린 수실이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의 것이라고 합니다.
―선림 담영호.]
“투신, 호원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묵 노야는 용연이 보여 준 서찰을 읽고서 깊게 숨을 토해 냈다.
“회주님, 그 서찰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뭔지 아세요?”
용연의 목소리는 무척 차분했고 눈빛에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서찰에서 내가 보지 못한 뭔가를 보신 거야. 뭐지?’
묵 노야는 대답을 의아한 표정으로 대신했다.
“다행이란 생각을 했어요.”
“……다행?”
“말은 안 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일은 진행되고 있는데, 당연히 나설 거라 여겼던 호원 궁주는 보이지 않았죠. 처음엔 그가 나서지 않아서 서둘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서 삼정일사회에 집중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는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도 도처에 사람들을 심어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어요?”
‘변했다, 그 호원이!’
용연의 긴 설명이 끝나자마자 묵 노야는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이전의 호원이었다면 용연이 말했던 식으로 움직여서 본인의 의도가 들키도록 만들 리 없었다.
“호원 궁주는 지금까지 암중인으로 살아온 사람이에요. 자신을 감추고 숨기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 지금까지 참아 왔던 욕망을 드러낸 거죠.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투신, 단기간에 그렇게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다행이라기보다 오히려 더 위험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묵 노야 역시 용연의 말에 상당부분 공감하지만, 확신을 갖는 건 이르다 여겨 자신의 생각을 꺼냈다.
“회주님, 내겐 그 위험조차 다행으로 여겨져요.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새삼 깨닫게 되네요.”
“……예?”
묵 노야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위험조차 다행이다?
타오른 불씨가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물을 부었다고 여겼건만, 용연의 반응은 마치 자신이 기름을 부은 것처럼 더욱 타올랐다.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해도 나타나지 않고, 한꺼번에 네 곳을 차지해도 나타나지 않더군요. 아닐 거라 생각을 하면서도 ‘나 때문에 더 숨은 건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였죠. 그런 그가 저 서찰을 통해 내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린 거예요. 이보다 더 다행인 일은 없어요.”
“호원이 욕망 때문에 스스로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왔다는 말씀이십니까, 투신?”
“아마도. 그는 그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무언가를 준비 중이었다는 것이 옳겠네요.”
용연의 눈이 반짝였다.
그 정도로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리 있는 말씀이야. 투신의 성장 가능성을 봤다면, 멈춰 있는 본인에 대한 불만족이 생겼을 수도 있어. 그래서 완벽해지는 쪽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려 했는데…… 투신의 눈에는 오히려 평범해졌다?’
묵 노야는 용연의 해석에 공감했다.
용연은 고작 서찰 한 장을 받았을 뿐인데 그것만 갖고 자신을 설득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