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훙―.
일흔두 명의 무투들이 일제히 손을 뻗자 허공에서 수십 번의 짧은 폭음이 터졌다.
퍼퍼펑!
이어서 발을 찼다가 직각으로 내렸다.
쿵!
일흔두 명의 전각이 땅을 크게 흔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허리 높이까지 떠오른 뒤, 바닥에 등을 부딪쳤다.
쿠쿵―!
묵직한 굉음과 함께 일대가 내려앉더니 한 박자 느리게 수없이 많은 균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쩌저저저적!
각벽에 의해 펼쳐진 광경이었다.
***
“많이 늘었네요.”
용연은 칠십이무투가 펼친 각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교림 둘을 반 시진 정도 붙잡아 둘 실력들은 된 것 같습니다. 투신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묵 노야는 조심스럽게 용연에게 물었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칠십이무투의 실력을 판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글쎄요. 기준이 달라서 비교하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제가 교림 둘의 입장이라면, 일단 수가 많으니 줄이고 시작할 것 같네요. 초반에 전력을 다한 교림 둘의 공격을 칠십이무투가 막아 낼 수 있을까요? 관건은 거기에 있겠군요.”
“투신, 그 말씀은 교림 둘의 초반 공격을 막아 낸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묵 노야는 용연의 말에 반색했다.
“방안을 준비해 놓은 건가요?”
“저들 중 넷에게 지금보다 월등히 강한 내공을 줄 방법이 있어서 여쭤 본 것입니다.”
“넷이라.”
용연은 등언을 저 일흔두 명 안에 넣는 상상을 해 봤다.
초반에 적어도 둘 이상의 무투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격을 막는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가능할 것 같기는 하지만, 안 보고 하는 얘기는 의미 없지요.”
“오…… 아니, 이틀 뒤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투신.”
묵 노야는 오 일이라고 하려다 삼 일을 줄여 버렸다.
“이미 준비 중이셨군요?”
용연은 이채를 발하며 묵 노야를 쳐다봤다.
네 명의 내공을 끌어올릴 방법에 대한 고민이 끝나 있다고 여긴 까닭이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무리를 해 볼 생각입니다. 철혈사자맹과 사혈명, 그리고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부류들이 마을로 숨어든 숫자만 이백여 명이라고 하니 앞으로 몇이나 더 늘어날지 판단하기 힘듭니다. 칠십이무투의 능력을 배양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회주님, 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다 실수라도 하게 되면 아니함만 못하게 되니까요.”
“언제고 해야 할 일입니다. 차라리 투신께서 계시는 동안 치르는 편이 더 큰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묵 노야는 이미 마음을 정했는지 입술을 일자로 만들며 꾹 다물었다.
“이틀 뒤가 기대되네요.”
용연은 묵 노야의 계획을 멈추지 못할 것을 알기에 응원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이틀 뒤.
용연은 가면을 쓴 채 임시 대전에서 묵 노야 대신 총사 단림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단림은 마을에 스며든 적들의 수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며 다급해 했다.
그러나 용연은 명령 대신 화제를 묵 노야에게로 돌렸다.
“회주는 이틀 동안 두문불출한 건가?”
“……예. 회주 스스로 나올 때까지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측 못 했을 회주가 아니지. 언제 쳐들어와도 이상할 것 없다고 했더냐?”
“예, 투신.”
“그럼 얼마나 쳐들어오는지 기다려 보자.”
‘윽!’
단림은 용연의 예상 못 한 대답에 하마터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볼 뻔했다.
“음? 드디어 나온 모양이다.”
용연은 창가로 다가가 평평하게 땅을 고른 임시 연무장을 내려다봤다.
“투신, 늦었습니다.”
묵 노야가 지친 목소리와 함께 대전으로 들어섰다.
“회주, 시연은 됐고, 실전을 보지.”
묵 노야를 돌아보는 용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지어졌다.
일흔두 명 중 네 명이 단연 도드라져 보였기 때문이다.
“단 총사, 지금부터 주루와 객점, 노포 등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는 모든 곳을 닫는다. 놈들이 곧바로 쳐들어올 수밖에 없게 만들도록.”
“바로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단림은 묵 노야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의자를 굴려 밖으로 나갔다.
“무슨 마술을 부린 겁니까, 회주님?”
용연은 단림이 나가자 묵 노야에게 다가갔다.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실험인데, 재료가 좋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언제 또 그런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 냈습니다.”
묵 노야의 목소리는 많이 지쳐 있었다.
용연은 어떤 실험인지 묻지 않았다.
삼정일사회의 모든 것을 운영해 온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묵 노야이기 때문이다.
“태울 두루마리를 옮겨 놓으세요.”
무혈입성한 자들에게 선물을 줄 시간이다.
***
화르륵!
임시 연무장 한가운데에 마련된 거대한 향로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당신들과 관련된 내용이 적힌 두루마리들이오.”
단림은 향로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가장 가까이 있던 삼십 대 사내가 신법을 펼쳐 향로로 다가가 전부 타지 않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펼쳤다.
쉬악!
막 사내가 내용을 읽으려 할 때, 검기가 날아와 두루마리를 가로로 잘랐다.
사내는 이미 손을 떼고 훌쩍 몸을 띄웠다가 내려섰다.
“무슨 짓이냐!”
“남의 이름 봐서 뭐 하게?”
검기를 날린 자는 이마에 ‘혈’이라 새겨진 건을 두르고 있었다.
나선 자가 사혈명 무인임을 알아본 사내는 이를 바득 갈고는 향로를 올려놓은 단에서 내려갔다.
그런 사내의 뒤로 수백 명의 시선이 닿아 있었다.
사혈명을 제외하고 알려져선 안 되는 이름의 주인들이고, 더 나서는 자가 있으면 당장 손을 쓰려 살기를 흘리고 있는 자들이었다.
단을 내려온 사내는 조용히 일행들과 함께 서서 타오르는 향로를 응시했다.
순식간에 장내에는 침묵이 흘렀다.
타고 있는 두루마리 뭉치가 진짜라는 것을 사내는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다.
그때, 지켜보던 사람들 중 몇몇의 얼굴에 웃음이 짙어졌다.
―이번 한류천주는 배포가 콩알보다 작네? 흐흐흐.
―소문은 이래서 믿을 게 못 돼. 엄청 똑똑한 것처럼 포장만 해 놓은 거잖아?
―그러게. 우리들 이름을 지우려고 온 건데 알아서 지워 주겠다? 봐 달라는 거잖아? 크크크.
―어이구, 다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해 주고 가자고. 풉.
대부분의 대화가 이런 식이었으나 몇몇의 시선은 향로가 아닌 단림에 꽂혀 있기도 했다.
두루마리를 가져온 단림이라면 적힌 이름들을 봤을 테니 가장 먼저 죽이려는 것이다.
“당신이 새로운 한류천주인가?”
향로에서 재가 흩날릴 때쯤 되자 사혈명 동패 부부장 역부 장궐이 나섰다.
“삼정일사회 총본진 총사 단림이오.”
단림은 장궐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답했다.
“나 장궐이다.”
“사혈명 동패 부부장 역부 장궐. 알고 있소.”
“……뭐지? 알면서도 그따위로 쳐다본다고?”
장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까.”
단림은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이 짧게 말을 뱉었다.
슥.
장궐은 한쪽 입가를 비틀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 순간, 단림이 시선을 입구 쪽으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더 들어올 자들이 있느냐?”
“없습니다!”
입구 쪽에서 커다란 대답이 들려왔다.
“이곳에 들어온 여러분들은 모두 시험에서 탈락하셨습니다.”
단림은 말을 마친 뒤 의자를 돌려 부서진 전각으로 움직였다.
“놈!”
장궐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한 단림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부하 한 명이 쏜살같이 튀어나가 단림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려 했다.
퍽!
장궐의 부하가 무언가에 꿰인 채 움직인 방향과 정반대로 날아갔다.
“음?”
장궐은 깜짝 놀라 부하를 공격한 자를 찾았다.
그러나 부서진 전각을 감싸고 있던 자들 중 어느 누구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두―근.
장궐은 자신의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끼며 부서진 전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뒤에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까닭이다.
벽처럼 전각을 감싸고 있던 자들 사이가 벌어지며 인영 하나가 걸어 나왔다.
가면 쓴 평범한 체격의 사내였다.
그러나 사내가 엄청난 기세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대단한 무기를 꺼내 든 것도 아닌데 장내의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사내는 모습을 드러낸 뒤 천천히 단림을 향해 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꾸벅.
단림은 사내가 지나칠 때 고개를 숙였다.
“총본진의 총사가 목례를 해? 네가 삼정일사회주인가?”
장궐은 평소보다 목소리를 크게 냈다.
스윽.
가면 쓴 사내, 용연은 눈동자만 돌려 장궐을 내려다봤다.
그 눈빛을 본 장궐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쿵. 쿵. 쿵.
조금 전 두근댔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고 시선은 저절로 아래로 내리깔았다.
눈이 마주치면 맹수에게 사냥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용연의 걸음은 장궐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멈춰! 네 앞에 있는 우리들은 사혈명 사람들이다.”
모르면 용감할 수 있었다.
장궐의 부하들은 일제히 소리치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긋난 적 없는 방법이기에 이번에도 통할 거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용연의 걸음을 멈추진 못했다.
흔들.
장궐 등과 삼 장 남짓 가까워지자 용연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쾅!
장궐은 빠르게 반응해서 몸을 피했으나, 나머지 십여 명은 피할 생각도 못 한 채 장력에 휘말려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슷.
용연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떨리는 동공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찾는 장궐의 뒤로 내려섰다.
턱.
용연은 장궐의 목을 잡자마자 그대로 내던졌다.
“커헉!”
텅. 텅. 텅.
지면과 부딪칠 때마다 사람들은 우수수 좌우로 갈라지며 피했다.
“지금부터 나, 투신의 영역에 발을 디뎌 놓고 예를 갖추지 않은 대가가 어떤 건지 알려 주마. 칠십이무투는 명을 받으라.”
“칠십이무투, 투신의 명을 기다립니다!”
부서진 전각에 늘어서 있던 칠십이무투가 일제히 부복했다.
“이곳은 나, 투신만의 공간이다. 치워라.”
용연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크게 발을 굴렀다.
쩌―엉!
흙을 다져 놓은 땅에서 쇠와 쇠가 부딪친 것 같은 맑은 소리가 터졌다.
쯔어― 지지지직―.
용연의 발아래에서 시작된 균열이 사방으로 밀려 나갔다.
“으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사람.
“사, 살려 줘!”
곧이라도 땅속에 파묻힐 것 같은 공포로 비명부터 질러 대는 사람.
“도, 도망가자! 투신은 사람이 아니……으악!”
자신의 의도를 먼저 알리고 다 같이 행동하려는 사람.
콰콰콰콰콰!
누구도 도망가지 못했다.
용연이 바닥에 내려선 이상, 삼제의 첫 번째 원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갈라진 땅에 묻히거나, 치솟는 흙기둥에 들려서 허공으로 떠오르거나, 움직이기 시작한 칠십이무투의 손과 발에 맞아 죽거나.
용연은 발 구름 이후 움직이지 않았지만, 비명 소리는 더욱더 커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