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그리고, 사자는 오지 않을 거야. 은자림에도, 여우락에도, 한류천에도.”
용연은 귀암로의 세 축을 무슨 음식 이름 대듯 꺼내 놓았다.
당연히 비류와 세 사람은 놀란 표정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주군, 사자들은 구왕의…….”
“제자들이지.”
“그걸 알면서 죽이신 겁니까?”
“그래서 군림단원들을 부른 거야. 구왕이 노린다면 그나마 사야벌일 테니까.”
“……주군, 외람되지만 어째서 구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비류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제자 둘을 잃었으니 당연히 구왕이 나서지 않을까?”
“제 생각에는 오히려 구왕은 가만히 있고 다른 두 곳에서 움직일 것 같습니다. 한류천의 전신이 하오문인 것은 아십니까?”
“안다.”
“지금 정도는 아니지만, 그때도 철혈사자맹과 사혈명의 고수들이 한류천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용연의 반문은 어째서 한류천이 지금까지 무사했느냐는 뜻이었다.
“한류천주 계무는 이미 그럴 줄 알고 준비를 해 뒀을 겁니다.”
“좀 더 자세히.”
용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비류를 응시했다.
“한류천뿐만 아니라 다른 귀암로의 축들이 강호 전역에 지부를 두고 있음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는 이유는, 철혈사자맹과 사혈명이 저지르는 지저분한 짓들을 감춰 주기 때문입니다.”
“그게 뭐지?”
“살인, 강간, 강도, 밀매…….”
“사혈명이야 그럴 수 있다 해도 철혈사자맹도?”
용연은 어이없어하며 비류의 말을 끊고 되물었다.
“제가 아는 일만 해도 대여섯 가지는 됩니다.”
“그중 한 가지만 말해 봐.”
“사혈명 사패 중 서패의 고수 골타와 청성파 이대제자 중 어경서가 이틀 간격으로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둘 다 은자림이 암살한 것으로 밝혀져 난리가 났는데,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갔지요.”
“은자림은?”
“아무런 보복도 받지 않았습니다. 서패에서 골타를, 청성파에서 어경서를 청부했기 때문이죠. 위협하면 청부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하니 두 세력 모두 유야무야 넘어갔습니다.”
“엉망이군.”
“네 곳에 치부를 잡혔던 자들이 곧 몰려올 겁니다.”
“그렇다는 것은, 철혈사자맹이나 사혈명의 인물들이지만, 두 세력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무리다?”
“알면서 모르는 척할 수도 있겠지요.”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고.”
용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땅 위로 드러나 있는 나무의 형태만 봤지 뿌리까지 파 볼 생각은 못 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이 옳았다.
힐끗.
용연의 시선이 반대편 분지 위로 향했다.
교림들과 학림들이 해를 등진 채 서성이고 있었다.
‘교림 둘에 학림 둘, 선림 한 명이 뒤를 봐주게 하고. 회주님에게 가 봐야겠네.’
용연은 묵 노야를 떠올렸다.
비류가 한류천을 예로 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많은 더러움을 묻혀 놓은 곳일 테니까.
***
“허!”
묵 노야는 어렵게 들어온 석실에서 엄청난 기록들을 읽는 중이었다.
탄성을 터트릴 정도의 내용이 적힌 두루마리 천이 석탁 위에 쌓여 있었다.
“어리석은 계무.”
두루마리 천의 내용은 묵 노야가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었다.
철혈사자맹과 사혈명의 무인들이 저지른 실수들을 이름과 내용까지 상세히 적어 놓은 일종의 치부책이었다.
다 읽을 필요도 없었다.
“이것 전부 챙겨서 갖고 올라간다.”
묵 노야의 명령에 무투들이 두루마리 천을 몇 개씩 갖고 석실을 빠져나갔다.
***
“……투신, 안 그래도 뵙길 청하려고 했습니다. 비 협주는 무사한지요?”
묵 노야는 용연이 들어서자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비켜섰다.
“사야벌주는 방적 교림이 처리했고, 사야벌 쪽 낭인들은 잘 다독여 포용해서 피해는 크지 않았어요.”
용연은 사야벌 얘길 꺼내며 중앙 탁자 쪽을 쳐다봤다.
두루마리 천이 높게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입니다, 투신. 저 두루마리 천은 지하 석실에 보관되어 있던 것들입니다. 저것 때문에 뵙길 청하려고 했습니다.”
“혹시 비밀 장부 같은 건가요, 회주님?”
“……알고 계셨습니까?”
묵 노야는 놀라서 바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서둘러 돌아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에요. 비 협주가 그러더군요, 구왕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예?”
“알아서 움직여 줄 자들이 있으니 참는 거겠지만요.”
“저 두루마리에 이름이 올라간 철혈사자맹과 사혈명의 인물들이군요.”
“본인들의 치부가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겠지요.”
“으음.”
묵 노야는 용연의 말이 목에 탁 걸리는 것 같아 신음을 흘려야 했다.
“그런데…… 의외로 쉽게 해결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용연은 두루마리를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 묶음, 다 태우죠. 그것도 이곳을 방문한 자들이 보는 앞에서.”
“투신, 본인들 악행이 사라졌다고 오히려 더 날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 주면 더 좋지요. 다 쓸어버려도 철혈사자맹과 사혈명은 쉬쉬할 테니까요. 진짜는 일단 보관해 두세요.”
“진짜…… 아, 가짜를 태우자는 말씀이시군요?”
“어차피 타오를 자들이니 가짜 두루마리를 기름처럼 끼얹어 주자고요. 촉발제 역할로 충분할 거예요. 그렇게 스스로 타오르면 저절로 다른 곳으로 번져 가지 않을까요? 철혈사자맹이나 사혈명으로.”
용연의 머릿속에는 아직 오지도 않은 자들이 불타오르는 모습이 떠올랐다.
철혈사자맹과 사혈명에서는 불에 타는 자들이 누군지 확인하려면 손을 대야 한다. 당연히 불길에 손이 닿았으니 옮겨 갈 것이다.
‘사야벌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나?’
묵 노야의 눈에 걱정이 아닌 호기심이 담겼다.
첫 만남에서, 모든 계획을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사람처럼 즉흥적으로 쏟아 내던 어린 용연의 눈빛이 거기에 있었다.
당연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동안 심경에 변화가 있으셨던 겁니까, 투신?”
“산을 힘들게 올라갔는데, 원래 본인들 것이라며 아우성친다고 내줄 순 없잖아요, 회주님?”
“흘흘.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투신.”
“회주님, 최대한 많이 몰려오도록 길을 터 주라고 하세요.”
“명에 따르겠습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예 매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은자림을 비워 놓는다고 하네요. 여우락과 사야벌에도 몰려가겠지만, 두 곳 역시 그들에겐 지옥이 될 거예요.”
여우락엔 담영호를 보냈고, 사야벌엔 몽외를 남겨 두고 왔다.
용연은 두 사람을 떠올리며 웃었다.
“믿을 만한 선림을 보내신 모양이군요. 투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한류천을 지우고 그 위에 삼정일사회의 성지이자 총본진을 세울 생각입니다. 다른 세 곳 역시 무너진 것들을 세워야겠지요. 시간, 네 곳 모두 시간이 필요합니다, 투신.”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번 싸움을 압도적으로 눌러 버릴 생각이에요. 삼정일사회엔 투신이 있고, 다른 세 곳의 뒤엔 군림단주가 있다. 각인시켜 놔야 당분간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않을 테니까요.”
“……준비해 놓겠습니다.”
묵 노야는 숨을 길게 내쉰 뒤 허리를 숙였다.
조금 전에 본 들끓는 용연의 눈빛 때문에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얘기를 꺼낸 것인데, 용연은 이미 거기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
무너진 한류천 본거지 주변 마을에는 때아닌 횡재에 사람들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 있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헤진 신발과 허기진 배를 채워 줄 노포들과 객점이 그랬고, 투신에게 올릴 향이 필요하다며 몰려들어 창고까지 마련한 향 파는 곳이 그랬다.
행렬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보름 이상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건 팔아 좋기는 한데 삼정일사회가 뭐하는 곳이래?”
양이 엄마는 만드는 족족 신발을 가져와 가판대에 올려놓으며 좌측의 노포를 돌아봤다.
“몰라. 투신인지 뭔지를 모시는 집단이라고 하더라고.”
사는 곳도 가까워 친한 구표 엄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투신? 뭔 신 이름이 그리 사나워?”
“신은 무슨. 강호인이야. 무공이 엄청 세다던데?”
그때였다.
“쉿.”
우측 노포 주인인 칠십 대 노인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손가락을 입에 대며 주위를 둘러봤다.
“왜요?”
양이 엄마가 입을 삐죽이며 쳐다봤다.
“아유, 여편네들아, 수다 떨 게 없으면 남편들 흉이나 봐. 투신은 자네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이름이 아녀!”
노인은 혼내듯 눈을 부릅떴다.
“어머, 왜 화를 내세요, 할아버지?”
“우리도 신발 많이 팔아 줘서, 좋아서 그런 거예요.”
구표 엄마가 노인에게 삿대질을 하며 무안함을 감추다 말고 갑자기 허리를 굽신댔다.
노포들 앞으로 십여 명의 죽립인들이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발 사 가세요. 지금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만 십여 짝은 여분으로 있어야 돼요.”
“이쪽에도 많아요.”
가던 걸음도 멈추게 하던 구표 엄마와 양이 엄마의 목소리였으나, 죽립인들은 오히려 발걸음을 서둘렀다.
선두에서 움직이던 죽립인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죽립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서 자신들을 알아볼 사람들이 있을 리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죽립인들과 십 장 정도 거리를 두고 움직이는, 천으로 입을 가린 또 다른 무리가 멈춰 섰다.
“화산파?”
“보법을 교묘하게 변형시켰지만 미라보(彌羅步)인 것 같습니다, 사형.”
“씁.”
“죄송합니다, 사…….”
“닥치고 우린 보법 펼치지 말고 그냥 걷는다.”
“예.”
‘구대문파 중 몇 개 문파나 온 거야? 그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종남운룡 과윤의 앞길이 막힐 순 없지.’
칠 년 전, 사제들과 거나하게 술 한잔 걸친 뒤, 아녀자 네 명을 납치해 와 윤간했던 일이 있었다.
―언제고 한자리하게 될 인재들 아니오? 여자들 입 막느라 돈 많이 들었다오. 이번 일, 잊으면 안 되는 것 아시죠?
꿈틀.
능글거리며 독사 눈을 번들거리던 한류천 호법의 얼굴이 떠오르자,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들었다.
앞서가던 화산파로 추정되는 자들이 보이지 않자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 저기 저자들은 대놓고 사혈명 패거리인데요?”
함께 움직이던 사제가 골목 쪽을 가리켰다.
사제의 말대로 사혈명은 정체를 감출 생각이 없는지 대놓고 가슴에 혈(血) 자가 새겨진 무복을 입고 움직이고 있었다.
“미친놈들.”
과윤은 무의식적으로 욕부터 내뱉었다.
힐끗.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 옆을 돌아보다 종남파 무리와 눈이 마주치자 곧장 앞쪽으로 움직였다.
청년의 이마에는 동(東)이라 적힌 붉은 건이 둘러져 있었고 혈 자가 새겨진 무복을 입은 상태였다.
“부부장님, 철혈사자맹 쪽 무리가 다음 골목에서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무시해. 우린 우리 것만 챙기고 돌아간다.”
“예.”
“나, 역부(役斧) 장궐을 알아봤다면 알아서 숨겠지. 쥐새끼들이니까.”
‘물론입니다. 사혈명 동패주 살엽 장앙 님의 네 번째 팔이잖습니까?’
청년은 장궐의 당당함에 자신도 모르게 고무돼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