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용연은 서찰을 접어 봉투에 넣었다.
“초석(礎石)이 마련됐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고르고 골라 숨어 있던 가마를 찾은 느낌이다.
뒤에서 지켜봤던 강호란 곳.
수만 가닥의 머리칼이 서로 이리저리 엉켜 붙어 있어 어디서부터 빗을 대야 할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가마를 찾아냈다.
이제 그 가마를 기준으로 빗기기만 하면 된다.
강호에 정식으로 군림단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이 의미를 몰라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앞으로 차근차근 대가를 치르면서 깨닫길 바라. 군림단원들이 지난 이백여 년을 어떻게 참아 왔는지!”
용연의 눈에서 한광(寒光)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서찰은 곧장 진류에게 전해질 것이다.
***
“……화가 나셨나?”
적휘는 용연의 소집 명령이 적힌 서찰을 다 읽고 난 뒤에도 눈을 떼지 못했다.
글을 읽은 것뿐인데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사야벌로 가니 마을에 문제 생기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
“우 대인, 도대체 왜 마을을 떠나신다는 겁니까? 대인이 가시면 비적 떼들은 누가 막아 줘요?”
마을 촌장의 장남이 우곤 앞에 무릎 꿇고 양손을 펼친 채 결연한 표정으로 막았다.
“사야벌로 가요. 놈들이 나타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우곤은 그새 마을 사람들에게 정이 생겼는지 촌장의 장남을 일으켜 세워 주고는 떠났다.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리는 느낌이 들 즈음이었다.
***
드문드문 몇 채씩 모여 있는 촌락들을 지나자, 낮은 초목과 평야가 몇 번이나 번갈아 가며 나타났다.
그 지루함을 견디자 드디어 백야제가 한창인 공간을 볼 수 있었다.
“살벌하네.”
학림 무묵은 사야벌 무리들을 선두에서 막아 내고 있는 네 사람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특히 저 네 명.”
학림 양안은 다른 낭인들과 완벽하게 구별되는 움직임의 넷을 가리키며 무묵을 돌아봤다.
“저도 보고 있.”
무묵은 말을 멈추고 얼른 일어나 자세를 낮췄다.
그러자 양안도 무묵의 옆에 섰다.
“다른 교림들은 늦는 것 같다. 지금부터 이곳은 내가 지휘한다. 양 학림은 좌측으로, 무 학림은 우측으로 움직이며 사야벌 무리를 위쪽으로 몰아라.”
방적은 손가락으로 사야벌주 쪽을 가리켰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양안과 무묵은 대답과 함께 곧장 분지로 내려갔다.
방적은 두 사람이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뒤,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한 시진 가까이 분지 테두리를 지켜봤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 번 더 점검을 하는 것이다.
팟.
방적의 신형이 곧장 아래쪽을 향했다.
어차피 군림단원들이 오게 되면 정리될 곳이다.
―……전 단원에게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한 명이라도 죽으면 실패한 임무가 될 겁니다. 죽지 마세요. 죽을 이유도! 죽을 수도 있는 상황도! 만들지 마세요.
저번 소집에서 용연이 형도준에게 한 말이다.
한 시진을 살펴본 이유이기도 했다.
죽을 이유도, 죽을 수도 있는 상황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이러지 마라. 너희들은 낭인이야. 낭인왕의 신물을 보고도 덤빌 거냐?”
비류가 양손을 번쩍 치켜올리자 의제 셋도 보구에 진기를 운용해 빛이 나게 만들었다.
아무리 막아도 계속해서 밀려드는 낭인들을 더는 밀어내기만 할 수 없었다.
호법 넷을 처리하긴 했지만 아직도 여덟에다 사야벌주까지 뒤쪽에 남아 있었다.
“저것은 원래 사야벌의 신물이다. 놈들이 훔쳐 간 신물을 뺏자!”
뒤쪽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졌다.
호법 중 하나일 것이다.
“후우.”
비류의 눈빛이 달라졌다.
낭인들에게 기회를 줬음에도 조금 전보다 더욱 거세게 밀려든다면 더는 동료라고 생각할 필요 없었다.
“모두…….”
비류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뭐, 뭐, 케헥!”
“으아악!”
“저, 적이다!”
퍼벅!
비류는 달려든 낭인 둘을 내팽개치고 비명이 이어지는 곳을 쳐다봤다.
사야벌 낭인들 양쪽에서 계속해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꿈틀.
뒤를 돌아봤다.
세 의제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중간에 낀 사야벌 낭인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 비류와 눈이 마주쳤다.
황당하게도 살려 달라는 말을 입모양으로 하고 있었다.
“살고 싶은 자는 무릎 꿇고 일어나지 마라.”
비류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배려였다.
비류 앞에 있던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뒤를 돌아보며 눈치를 봤다.
퍽!
한 명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그것을 본 나머지 낭인들은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
“저 둘은 뭐지? 비류가 데려온 고수들인가?”
사야벌주는 인상을 쓰며 호법들을 돌아봤다.
마른 체격에 세모꼴 얼굴형, 세 가닥 수염을 한 육십 세의 노인으로, 목소리가 음침하고 신경질적이었다.
호법들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가 보라는 뜻이야. 저 둘을 막아야 비류 놈이 데려온 것들을 치울 것 아니야!”
사야벌주의 호통에 호법들은 일제히 자리를 떴다.
“백야제의 제물로 신물들을 가져왔는데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를 알게 해 줘야지.”
사야벌주는 비류와 세 의제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직 밀어붙일 낭인들이야 차고 넘쳤다.
좀 더 지치면 그때 호법들과 나설 것이다.
“고작 둘이서 뭘 하겠다고…….”
또르르.
혼잣말을 하던 사야벌주의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지키고 있던 자들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는데,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 하나가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누구?”
“널 죽일 사람.”
훙―.
흑발 사내, 방적의 몸은 가만히 있는데 등 뒤에서 팔이 튀어나오며 그대로 사야벌주의 이마를 노렸다.
양팔과 양다리를 앞뒤 구분 없이 펼칠 수 있는 역근번천(易斤翻天)의 수법을 처음부터 사용한 것이다.
사야벌주의 혼잣말을 들어 버린 까닭이다.
군림단을 모욕하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용서하지 않는다.
쩡!
“헙!”
사야벌주는 다급히 낭아도로 머리를 막자마자 기함을 하며 몸을 틀었다.
팟.
무언가 사야벌주의 앞섶을 지나가며 잘랐다.
잘렸다는 생각을 한 그 찰나의 순간.
사야벌주가 시선을 내린 것도 아니고 감각만 떠올렸을 뿐인데 묵직한 고통이 안면 가득 들어찼다.
쾅!
“컥!”
턱.
방적의 손이 사야벌주가 쓰러지지 못하도록 잡아챘다.
툭.
방적은 사야벌주의 뒷무릎을 눌러 아무것도 못 하게 꺾었고, 이어서 힘껏 두개골을 내려쳤다.
빡!
―와아아아아아!
함성이 폭발하듯 터졌다.
그러나 방적은 이미 사야벌주가 죽은 곳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호법들을 쫓아간 것이다.
***
“잡아.”
비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야벌 쪽 낭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사야벌주의 죽음을 본 호법들은 모두 도망갔다.
남겨진 낭인들은 배신감과 두려움에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비류의 행동을 본 낭인연합 낭인들도 모두 나서서 앞으로 동료가 될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힐끔.
비류는 어느 정도 수습이 끝나가자 위쪽을 올려다봤다.
처음엔 셋만 보였는데 좀 더 늘은 것 같았다.
‘도대체 저런 고수들이 왜 우리를 도와준 거지?’
올라가면서도 머릿속에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예고도 없이 나타나 사야벌 쪽 진영의 옆구리를 단둘이서 쭉 갈라 버리더니 사야벌주까지 처리해 주었다.
그러나 고마운 것과 이곳을 점유해도 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낭인연합을 지휘하고 있는 비류요. 여러 대협들의 도움에 감사드리러 올라왔소.”
비류는 단으로 올라서자마자 예닐곱 명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군림단 교림 방적이오.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우리도 단주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방적은 슬쩍 뒤쪽으로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무묵, 양안에 이어 도착한 우곤과 적휘까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류가 보기에 본인들도 방적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모습으로 보였다.
“단주님께 비 협주가 찾아왔었다고 말씀드리겠소.”
“그럴 필요 없소. 우리가 도움을 받은 분들은 방적 교림과 저 두 분이니 말이오.”
“흠.”
방적은 비류의 대답에 이채를 발했다.
할 도리 다했으니 자신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으로 올라온 또 다른 이유는, 군림단의 회합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 주길 청하기 위해서요. 주군께서 오셨을 때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불쾌하실 것 같소. 양해를 부탁드리겠소.”
비류는 정중하게 다시 한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주군?”
방적은 비류가 본인을 낭인연합 협주라고 소개했기에 되물었다.
“낭인왕의 진전을 이은 분이 따로 계시오.”
“이해했소. 모두 들었지? 분지 위로 올라가서 기다린다.”
방적이 먼저 움직였고, 뒤이어 우곤이, 세 학림이 분지 위로 올라갔다.
“휘유.”
비류는 빈 공간을 보며 숨을 내쉬었다.
그때,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아래쪽을 돌아보자 세 의제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비류를 돌아보고 있었다.
***
용연은 방적 등이 올라간 분지의 반대편으로 비류와 세 의제를 불렀다.
“주군을 뵙습니다.”
가면 쓴 용연을 보자마자 비류와 낭각 신방, 낭복 유배, 낭견 기오가 동시에 외치며 무릎을 꿇었다.
“비 협주, 공생공존이 무슨 말인지 알지?”
용연은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군림단과 함께 지내게 될 거야. 섞일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삼정일사회가 아니라 군림단입니까, 주군?”
비류로서는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얘기를 나눈 뒤인지 세 의제들 역시 용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삼정일사회도 낭협과 같아. 하지만 세상에는 두 곳 모두 별개의 세력으로 알려지겠지.”
“주군께서 의도하신 일이군요.”
비류는 용연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끄덕.
용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