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이틀 전에 구왕의 첫째 제자가 사자로 이곳에 오는 걸 알고서 처리했어요. 조금만 빨리 그를 만났으면, 담 선림에게 여우락으로 간 사자를 돌려보내지 말라고 했을 거예요.”
용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담영호의 표정에서 어마어마한 인내를 읽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주님,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담영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언제고 부딪치게 될 구왕의 무공이라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점점 과격해지더니 그자가 스스로 벽을 깨더군요. 한계를 넘어 버린 것 같다고 할까요?”
용연은 정운의 전신이 홍화(紅化) 되던 모습을 떠올리다 말을 이어 갔다.
“처음엔 눈만 빨개졌는데 조금 더 지나니 털까지 붉은색으로 물들더군요. 그렇다고 역혈대법이나 사혈을 자극해 내공을 높이는 류의 방식은 아니었어요. 그런 방식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요, 담 선림?”
“음. 온몸이 붉어지며 강해진다……. 그런 쪽은 몽 선림을 불러 물어보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몽 선림요?”
“한계를 벗어나는 걸 즐기시니 그쪽에 대해 공부나 경험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 확, 이해가 되네요.”
용연은 탄성을 터트리며 격하게 공감한다는 듯 활짝 웃었다.
‘음?’
담영호는 용연의 반응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미미하게 갸웃거렸다.
분명히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사자들 얘기 때문에 부른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직감이 그랬다.
용연이 자신에게 말하기 곤란해 할 만한 일이 뭘까?
“담 선림, 한류천은 삼정일사회가 흡수할 거예요.”
용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미안함이 담겼다.
“한류천의 응징이 끝나면 여우락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겠습니다.”
“아니요. 담 선림은 가 줘야 할 곳이 따로 있어요. 이곳은 다른 분에게 맡기고 사야벌 쪽으로 가 줘요. 그동안 쉬지도 못했을 텐데, 또 부려 먹네요.”
“……단주님, 사야벌에도 심어 둔 사람이 있는 겁니까?”
담영호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용연이 군림봉에서 나온 지 고작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은자림, 여우락, 한류천은 물론이고 사야벌까지 무너뜨릴 판을 짜 놓았다는 뜻인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현재 사야벌은 두 파로 나뉘어 있어요. 사야벌 소속 낭인들과 그렇지 않은 낭인들의 연합인 낭협. 내 사람은 낭협의 주축인 비류와 세 명의 의제예요.”
“…….”
담영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단주는, 무공에 대한 이해가 남달라서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깨우치는 것은 물론이고 응용까지 해 버리던 사람이었다.
자신으로 하여금 교림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도록 밀어 올리고, 선림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도록 다시 밀어 올리고, 결국은 먼저 가 있을 곳도 없게 하던 사람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그렇게 성장할 거라 확신했던 자신이었는데, 어느새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 역시 용연에게 놀라고 있었다.
두근.
그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길을, 마치 가 본 적 있는 사람처럼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용연.
그 행보에 가슴이 뛴다.
‘이제 단주님보다 먼저 갈 수 있는 곳은 하나뿐인가?’
씰룩.
담영호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죽음.
용연이라면 대신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틱.
마음 안에 닫아 둔 벽이 눈에 보이는 사물이었다면 저런 소리가 났을 것이다.
아주 미세한 틈이 벌어지며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그들을 도와주면 되는 겁니까, 단주님?”
“아니요. 그곳으로 갈 사자가 돌아가지 못하게 하세요.”
“아…….”
담영호는 그제야 용연이 사자에 대한 얘길 왜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단원들은 앞으로 많이 바빠질 거예요. 제자 둘을 잃은 구왕이 가만히 있을 리 없을 테니, 그때를 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출발하겠습니다.”
담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고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왜 신이 나 보이는 거지?”
용연은 방을 나가기 전, 담영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것을 보고 의아했으나, 생각을 이어 갈 여유가 없었다.
묵 노야가 돌아올 시간이 다 됐기 때문이다.
***
콰콰콰!
담이 무너지고 전각이 부서지며 내는 굉음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묵 노야는 한류천의 마지막을 돌아봤다.
“참으로 허무한 광경이 아닐 수 없구나.”
“역시 주인님이세요.”
임료는 얼른 묵 노야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가슴으로 묵 노야의 팔을 감싸는 건 잊지 않았다.
“흘흘. 료야, 네가 없었으면 오래 걸렸을 게야. 잘했다.”
묵 노야는 이십 대 피부가 된 임료의 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임료는 손가락에다 고양이처럼 볼을 댔다.
‘이젠 무슨 행동을 해도 색기(色氣)가 넘실대는구나. 때가 됐다는 뜻이지.’
묵 노야는 흐뭇한 시선으로 임료를 바라봤다.
자신에게 임료는 이미 포동포동하게 살찌운 돼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였다.
“료야, 선물 하나 줄까?”
“예! 저 선물 주세요, 주인님.”
임료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을 동동 굴렀다.
묵 노야는 품에서 작은 환약 하나를 꺼냈다.
“냄새 한 번 맡아 보련?”
묵 노야가 손을 들어 올리자 임료는 코를 갖다 대며 몇 번인가 냄새를 맡다가 이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지고 말았다.
턱.
임료를 받아 든 묵 노야는 무투에게 마차를 가리켰다.
백일몽(百日夢)을 맡았으니 이제 대법만 펼치면 된다.
―와아아아아…….
뒤쪽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오자 묵 노야는 다시 한번 돌아봤다.
이번에는 한류천의 몰락을 눈에 담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계무, 너의 수많은 실수 중에 가장 큰 실수가 뭔지 아느냐? 마을 사람들이 한류천을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거야. 안 보여야 보고 싶지. 자꾸 보면 만만해지기 쉽거든. 물론 삼정일사회가 어떻게 지어져야 하는지 참고는 됐다. 흘흘.”
묵 노야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
“……(중략)……그들 둘이 삼정일사회로 넘어오니 호법 여섯의 전력으로는 버틸 수 없겠지요. 지금쯤이면 상황은 끝났을 겁니다, 투신. 오는 길에 삼정일사회의 본진을 어떻게 지을지 구상하느라 즐거웠습니다.”
얘기하는 내내 묵 노야의 입가에 웃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한류천과 관련된 모든 이름들은 삼정일사회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호법을 흔든 것이 주효했네요. 저 같았으면 깨뜨리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을 텐데. 회주님에게 또 한 가지 배웁니다.”
용연은 묵 노야의 방식에 감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습니다, 투신.”
“겉이 아무리 단단해도 안이 부실해지면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직접 보여 주신 거예요.”
“투신, 과찬이십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세력들이 왜 명멸하는지, 조금만 관심 있게 살펴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뿐입니다.”
절레절레.
용연은 묵 노야의 겸손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묵 노야이기에 살펴봤다는 말이 가능한 까닭이다.
“누군가가 책을 통해 읽을 수는 있겠지요. 허나 회주님처럼 실전에 적용시킬 수는 없을 거예요. 그것이 회주님의 특별함이니까요.”
움찔.
묵 노야는 용연의 말에 몸을 떨었다.
특별함.
이보다 듣기 좋은 말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투신의 인정을 받으니 진심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호법을 불러내지 않았다면, 그 순간 호법에게 접근하지 않았다면, 그 순간, 그 순간. 결국 한류천주는 순간을 잃어서 몰락한 셈이네요.”
용연은 묵 노야의 활약을 직접 본 것처럼 차례로 짚어 봤다.
“모든 성패는 한순간에 갈린다고 하잖습니까?”
“순간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
용연은 읊조리듯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허. 대화 속에서도 이제는 깨달음을 얻으시는구나.’
묵 노야는 용연의 한마디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고개를 미미하게 가로저었다.
지금 그 한마디로 용연이 더 커진 것 같았다.
용연은 혼잣말 이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뭔가 생각할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막혔던 부분이 풀리신 건가?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계셨던 건가? 다음이라…….’
묵 노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가 됐다.
‘아, 사자!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묵 노야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용연이 정운일지도 모르는 무리를 만나러 갔다 온 것이 기억났다.
“회주님, 왜 그리 인상을 쓰세요?”
용연은 상념에서 깨자마자 묵 노야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투신, 아직 사자가 남아 있습니다.”
“사자? 정운 말인가요?”
용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묵 노야가 왜 사자 얘기를 꺼내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류천을 관리하는 자가 정운입니다.”
“아! 정운을 만나고 왔다는 얘길 회주님에게 하지 않았던가요?”
“그때, 정운을 만나셨습니까?”
“가 보니 그가 맞더군요. 다시 그를 볼 일은 없을 거예요. 참, 혹시 갑자기 몸이 붉게 변하는 무공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요?”
“정운이 변했습니까, 투신?”
“눈부터 빨개지더니 나중에는 털까지 붉은색으로 변하더군요.”
“홍화입니다. 탈각할 때 일어나는 변화라고 합니다.”
“홍화? 탈각? 회주님, 구왕의 무공에 대해 잘 아세요?”
“통천홍화, 나후청화, 번천백화. 구왕의 무공에 대해선 그 정도밖에 모릅니다.”
“그런 이름들로 불리는군요? 통천홍화가 그런 현상을 보인다면 나후청화는 푸르게, 번천백화는 하얗게 변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네요.”
“좀 더 알아볼까요?”
“아니요. 그 정도면 됐어요. 어차피 그들 둘과 만날 일은 없으니까요.”
“둘? 투신, 정운만 처리하신 것이 아닙니까?”
“담 선림을 사야벌로 보냈어요. 그곳에 올 사자를 죽이라고요.”
“투, 투신, 위험합니다. 지금은 구왕을 자극할 때가 아니라 다음을 준비해야 할 시기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하셨잖습니까? 순간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 그래서, 잃기 싫어서, 내린 결정이었고 순간을 잃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는 확신을 조금 전에 얻었어요.”
용연은 격해진 묵 노야를 응시하며 차분하게 말을 끝냈다.
담영호를 사야벌로 보낼 때 이미 결정은 내린 상태였다.
척.
묵 노야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 하자 용연은 손을 들어 막으며 말을 이어 갔다.
“구왕은 은자림, 여우락, 한류천, 사야벌 중 어디도 공격하지 못해요. 아니, 공격할 수 없게 될 거예요.”
“음?”
“전에 제가 만든 아이 둘의 무덤을 성분(聖墳)으로 만드셨죠? 이번엔 이곳, 새로운 삼정일사회 본진이 세워질 이곳을 성지(聖地)로 만들어 주세요. 삼정일사회원들이 몰려들도록 연무장도 제공하고 또…….”
“임시로 연무장을 만들어 삼십육무투가 직접 심사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러면 강호 각지에서 회원들이 몰려올 겁니다.”
묵 노야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용연의 머릿속 그림에 더했다.
용연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