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담영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쪽 숲에서 거대한 굉음이 일대를 울렸다.
쿠콰콰콰콰!
여우락의 무인들은 내지르던 함성을 멈췄다.
너무도 엄청난 광경에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입만 벌리고 있게 된 것이다.
등언의 장력에 이어 피항까지 손을 쓰자 막혀 있던 숲에 구멍이 난 것처럼 둥근 통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산산.”
담영호의 신호에 남궁산산은 놀란 표정을 수습하며 무인들을 향해 사자후를 터트렸다.
“한류천주를 응징하자!”
남궁산산의 외침에 멈췄던 여우락 무인들의 함성이 배는 크게 터져 나오며 일제히 오와 열을 맞춰 움직였다.
척.
남궁산산은 돌아서서 엄지손가락을 가슴골에 대며 담영호에게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담영호는 찰나의 시간도 반응해 주지 않은 채 돌아섰다.
“베…….”
남궁산산은 얼굴로 만들 수 있는 가장 못생긴 표정으로 혀를 길게 빼며 야유를 보냈다.
그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얄미워서 달려가 등에 매달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십 호법, 우린 언제 움직여야 하오?”
귀수 주혼이 남궁산산의 뒤로 다가오며 물었다.
“당연히 지금이지요.”
남궁산산이 돌아섰을 때는 단아함을 담은 얼굴이었다.
***
두웅! 두웅! 두웅!
거대한 북이 웅장한 소리를 길게 퍼뜨리며 위험을 알렸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은 북과 지근거리에 있는 무인들이 아니라, 가장 멀리 떨어진 전각이었다.
“오, 옵니다! 적이 오고 있습니다!”
한류천 십이호법 중 여덟 명이 동시에 긴 석탁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먼지가 피어나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안 좋아.”
다른 호법들과 떨어져서 창가를 내다보던 육십 대 호법 류홍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충 칠백 정도 되는군요.”
오십 초반의 모당이 류홍에게 다가오며 말을 받았다.
“아니, 아니야.”
류홍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모당은 미간을 찌푸리며 류홍을 돌아봤다.
“오와 열이 맞춰 있잖은가? 선두에서 지휘하는 자의 역량을 더해야지.”
“그렇군요. 그럼 천주님께는 몇이라고 보고합니까?”
“천주님?”
류홍은 오후 내내 보이지 않는 한류천주 계무의 빈자리를 쳐다봤다.
“보고를 드리면 오실 겁니다.”
모당은 류홍의 시선에 어떤 생각이 담겨 있는지 알고서 서둘러 말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 교성이 그치질 않았다고 하네. 교성이야, 교성. 이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
“불안해서 풀려고 그러셨겠지요.”
“모 호법, 내가 충성을 맹세한 천주님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류홍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같이 가시죠.”
“……어딜 말인가?”
“삼정일사회. 어떠세요?”
“자네.”
“류 호법님, 천주님 방으로 들어간 여자 말입니다.”
“음?”
“문형필 호법의 수족 중 한 명인 은형수 이탄의 여자라고 합니다.”
“큭.”
류홍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요 며칠 제 연락책들에게서 보고가 끊겨 이상하다 했더니, 그 자리를 삼정일사회원들이 꿰찼다고 합니다. 놀라운 건, 아무도 그들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류 호법님, 우린 거리에 뿌리를 두고 자란 하천(下川) 출신들이에요. 지금 그 하천을 연결해 주고 있는 곳은 삼정일사회입니다.”
“보고는 하고 오게.”
“그래야지요, 보고는 해야지요.”
모당은 다른 호법들을 돌아봤다.
분기탱천한 얼굴들로 욕과 자신들이 가진 전력을 떠들어 대고 있었다.
절레절레.
곧바로 계무의 방으로 갔다.
복도를 돌아서자마자 양쪽 귀를 막고 있는 두 하인이 보였다.
까딱.
눈짓으로 가 보라는 명령을 내리고 방문 앞에 섰다.
―나, 나 좀…….
―으어, 허엉, 좋아, 더, 더…….
색욕이 강하게 담긴 남녀의 교성.
“천주님.”
한 번,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두 번,
“천주님.”
세 번,
반응이 있길 바라며 끊어서 불렀으나, 안에선 계무와 여인의 쾌락에 들뜬 신음 외에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홱.
모당은 더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진 채였다.
***
끼이익―.
한류천 본거지 중앙 전각의 비밀 통로 중 한 곳이 열렸다.
“둘이오. 받아 줄 수 있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며 질문부터 던진 사람은 모당이었다.
“동지가 계셨나요?”
질문을 반문으로 받은 사람은 삼십육무투의 호위를 받으며 기다리고 있던 묵 노야였다.
“류홍 호법이십니다.”
“오! 흘흘. 류홍 호법이시라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삼정일사회 회주 묵 모라고 합니다.”
묵 노야는 인상을 쓴 채 밖으로 나오는 류홍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류홍이오. 서두르고 싶겠지만, 한 가지 대답을 듣길 원하오.”
류홍은 완전히 문에서 떨어지지 않고 묵 노야를 쳐다봤다.
“흘흘. 시간이야 내기 나름이지요.”
“음?”
묵 노야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류홍은 뒤쪽의 삼십육무투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삼정일사회 무장들입니다. 오늘은 제 호위이기도 하답니다.”
“안 들어가십니까?”
질문은 묵 노야에게 건네면서 류홍의 시선은 모당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모 호법에게 이 문을 열어 주십사 부탁드린 이유는, 내가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올 아이를 위해서예요.”
“……나올 아이?”
류홍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당 역시 대답을 바라는 표정으로 묵 노야를 돌아봤다.
“일단 두 분의 전력부터 북쪽 외곽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좋겠네요. 곧 폭풍이 시작될 테니까요.”
묵 노야는 대답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북쪽을 가리켰다.
“회주님…….”
“얘기야 얼마든지 나눌 수 있지만, 때를 놓치면 애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 아닙니까? 그 목숨 살리려고 저와 손을 잡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모 호법? 어서 부하들 이동 명령부터 내리고 오세요.”
묵 노야는 모당의 말을 자르며 재촉했다.
짝짝!
두 사람이 동시에 박수를 치자 비밀 통로 안에서 여섯 명의 무인들이 밖으로 나왔다.
“이들은…….”
“서두르세요.”
묵 노야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전했다.
모당을 건드렸더니 류홍까지 데려왔다.
이들 둘을 거두었으니 한류천의 수많은 지류들을 한꺼번에 솎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시간을 단축하게 됐다.
이 얼마나 좋은 징조인가 말이다.
***
“산산, 저항하지 않는 마을 사람들은 부모형제라 생각하고 해치지 말라고 해. 정리를 해 놓는다고 했다니까 곧바로 본거지로 가면 된다.”
담영호는 마을을 앞에 두고 남궁산산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예, 담 랑.”
대답을 마친 남궁산산은 여우락 무인들과 묵성자의 무인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전했다.
―우우우우!
칠백여 명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이 거대해지며 마을 쪽으로 몰려갔다.
“주 호법님, 여우락을 깔본 한류천주 목이나 따러 갈까요?”
남궁산산이 주혼을 돌아봤다.
“선봉에 서시죠, 십 호법님.”
주혼은 남궁산산을 향해 앞장서라는 손짓을 건넸다.
여우락 호법 중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남자도 아닌 여인의 몸으로 여기까지 끌고 왔다.
다음 대 여우락주로 남궁산산을 인정한다는 뜻인 것이다.
씽긋.
남궁산산은 거부하지 않고 주혼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웃음을 지으며 담영호를 돌아봤다.
“도움은 여기까지만 주기로 하지. 한류천주의 목, 잘 따라. 우린 따로 움직이겠다.”
“……?”
담영호의 말에 남궁산산의 눈이 동그래졌다.
따로 움직인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까닭이다.
“지켜보마.”
담영호는 남궁산산 앞에 섰다가 돌아섰다.
남궁산산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하기 위해서 취한 행동인 것이다.
히죽.
남궁산산은 듣고 싶은 말을 들은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숨을 들이쉬며 주혼 등을 향해 돌아섰다.
“가자!”
―우와와와와와와와!
거대한 함성과 함께 수백 명이 마을로 스며들어 한류천 본거지를 향했다.
***
“피 교림과 등 교림은 저 여우락 십 호법을 보호해라. 군림단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다.”
피항과 등언은 담영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남궁산산의 뒤를 쫓아갔다.
힐끗.
수백 명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공간이 휑해졌다.
여우락 무인들 사이에 섞여 있던 구선이 그제야 다가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담 선림.”
“단주님 계신 곳이 어디요?”
“마을에 계십니다. 저쪽이네요.”
구선은 한 곳을 가리켰다.
흐린 불빛이 둥근 원을 그리고 있었다.
***
“구 향주에게 담 선림의 무용담 전해 들었어요. 여우락 본진을 거의 혼자서 접수했다면서요?”
용연은 신이 난 표정으로 담영호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여우락 십 호법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해서 소리가 크게 나는 것들만 부순 탓일 겁니다.”
“음?”
“십 호법이 저와 만나는 걸 본 자들에게 떠벌릴 이유 같은 걸 줘야 하니까요. 여우락 다른 호법들은 십 호법이 잘 속여 넘겨서 나머지는 쉬웠습니다.”
담영호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 담담하게 말을 마치며 찻잔을 입에 댔다 내렸다.
“이거 흥미로운데요?”
용연은 담영호의 말을 듣다 눈을 반짝였다.
담영호가 누군가를 칭찬한다?
단 한 번도 듣거나 본 적이 없었다.
“어떤 것이 단주님의 흥미를 자극했습니까?”
“십 호법. 잠깐 동안 무려 세 번이나 나오네요?”
“아, 묵성자 사람입니다.”
“예에.”
“……착합니다.”
“그건 듣기만 했는데도 알 것 같아요. 지금까지 담 선림과 손발을 맞춘 분이잖아요.”
“손발은 단원들과도 잘 맞았습니다.”
담영호는 대답을 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십 호법에 대한 얘길 이어 가기 싫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여우락 십 호법. 누군지 궁금하네?’
용연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바꿨다.
“여우락에 사자가 갔죠?”
“단주님이 언질을 주지 않으셨으면 죽여 버렸을 겁니다.”
담영호는 사자로 왔던 구왕 사도천의 셋째 제자 염일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인상까지 썼다.
“이틀 전에 구왕의 첫째 제자가 사자로 이곳에 오는 걸 알고서 처리했어요. 조금만 빨리 그를 만났으면, 담 선림에게 여우락으로 간 사자를 돌려보내지 말라고 했을 거예요.”
“음?”
담영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용연을 쳐다봤다.
“언제고 부딪치게 될 구왕의 무공이라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고 싶었죠. 그러다 점점 과격해지더니 그자가 스스로 벽을 깨더군요. 한계를 넘어 버린 것 같다고 할까요?”
용연은 괜한 짓을 했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