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림단주-180화 (180/232)

180화

정운은 자신이 항상 원했던 방식의 무공을 처음으로 손끝에서 발현시킬 수 있었다.

통천강을 운용한 뒤, 주문을 외우듯이 순서를 정하고 그에 따라 진기를 내보내고, 검과 도와 창은 각각 어쩌고저쩌고.

다 필요 없었다.

한 번에 하나씩 사용해서 안 되면 무기 세 가지를 동시에 펼치면 되잖은가?

이 단순한 생각만으로 강기의 형태가 달라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창 옆에 검과 도가 달린 삼지창 형태의 강기가 용연의 머리와 양쪽 가슴을 노리며 날아갔다.

자신의 현재 무위는 아홉 사부와 동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각해 버린 자신의 공격을 피하기 급급한 투신으로서는 이번 공격을 막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콰쾅!

덜컥.

“……!”

정운의 어깨가 앞뒤로 크게 흔들렸다.

막힌 것이다.

세 개의 강기가, 그것도 이전처럼 선이나 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분명한 형태를 지닌 강기가.

“강렬하군.”

용연은 등을 돌린 채로 한마디 뱉고는 정운을 향해 돌아섰다.

“내가 본 것이 맞나, 투신? 지금 등으로 내 공격을 막은 것처럼 보였거든?”

정운은 홀린 듯 질문을 던졌다.

세 개의 강기를 튕겨 낸 벽.

두 눈으로 봤음에도 믿을 수 없어 물어본 것이다.

“조벽과 각벽을 사용하기 전에 준비 과정이 있었지만, 등을 사용한 것은 맞다.”

조아, 각지로 무형의 벽을 만들고 조벽으로 한 번, 각벽으로 두 번.

정운의 공격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마자 떠올린 순서였다.

조벽과 각벽은 등으로 펼치는 무공이니 등을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작 등으로 내가 만든 강기를 막아 냈다고? 고작 등으로?”

정운은 순순히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공 이름까지 알려 주는 용연을 보며 이를 악다물었다.

탈각하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자신은 공격을 가하지만 저 투신이란 자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크흣.”

정운이 갑자기 웃음을 토해 냈다.

―안 될 거야, 지금까지 이렇게 해 왔는데도 안 되면 앞으로도 안 될 거야.

궁지에 몰리면 떠올리던 생각이다.

버릇이었던 건가?

탈각까지 해 놓고도 여전히 그따위 생각을 하다니.

“그 등, 뚫어 주지.”

정운의 누그러지려던 기세가 다시 살아났다.

팟.

자리에서 사라진 정운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퓨퓨퓻.

첨강이 연속해서 용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등을 뚫는다더니?”

“닥쳐!”

용연의 웃음 섞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운에게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

꿈틀.

정운은 희끗한 형체가 폭발을 벗어나는 것을 보고 붉게 변한 눈썹을 역팔자로 만들며 아래쪽을 향해 검강을 휘둘렀다.

과― 우우―.

족히 삼 장은 늘어난 붉은 빛무리가 움직이는 형체를 잘랐다.

서걱.

‘잘렸다!’

땅으로 떨어지는 정운의 눈엔 분명 그렇게 보였다.

정운이 땅에 발을 댄 순간, 검강에 닿았던 부분이 쩍 벌어지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요란한 진동이 일대를 울려 댔다.

드드드드등―.

“아무래도 펼칠 수 있는 공격은 조금 전 것이 다였던 것 같군.”

“……!”

정운은 갈라진 땅으로 걸어가려다 자리에 굳고 말았다.

말이 안 되는 것이, 투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뒤쪽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검, 도, 창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합치기도 하는 무공이라니 아주 새로웠다.”

‘새, 새로웠다?’

번쩍.

정운의 붉은 동공이 빛을 뿌리며 돌아섰다.

다시 손을 쓰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정운은 팔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턱.

“이러면 어쩔 건데?”

용연이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돌아선 정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움찔.

손끝으로 정운의 떨림이 전해졌다.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우, 움직일 수가 없어. 이 느낌, 그때와 너무 똑같아.’

스르.

정운은 동공만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뭔가를 확인하고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손을 사용하는 무공은 익혔더라도 아주 미미한 정도인 것 같군. 미리 말해 주면, 박투로 내 손을 떼어 낼 고수는 많지 않을 거야.”

씰룩.

가면 아래 드러난 용연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너군.”

정운은 용연의 얼굴이 아니라 손을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은자림에서 자신의 어깨에 올려졌던 손과 같은 자리에 얹혀 있는 저 손이 똑같았다.

“너?”

용연은 정운의 단정적인 말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낮게 숨을 뱉었다.

정운의 시선이 닿은 곳을 봤기 때문이다.

“손이라니.”

피식.

용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런 실수를 할 줄이야.

“너…… 뭐야?”

“투신.”

“장난…….”

“또 다른 신분은.”

“…….”

“군림단주.”

“구, 군림단주? 네가? 어떻게?”

정운은 정리되지 않은 많은 정보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혼잣말을 계속 꺼냈다.

“은자림과 한류천을 관리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직접 왔다. 죽이려고.”

“왜…….”

푹!

용연의 손에서 뻗어나간 검이 정운의 목을 뚫었다.

“내 여자를 봤으니까.”

차라락.

낭수련이 다시 팔목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정운은 눈을 부릅뜬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용연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주위를 돌아봤다.

기감을 넓게 퍼뜨려 십 장 안에 숨어 있는 자가 있는지 살폈다.

더 멀리는 의미 없었다.

정운과 나눈 대화만 듣지 못했다면 큰 상관은 없으니까.

‘예 매가 보고 싶네.’

앞에 있었으면 이제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을 해 줬을 텐데.

용연은 이내 훌쩍 신형을 허공으로 뽑아 올렸다.

***

“음?”

인이예는 무심코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그러자 진지하게 은영루를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설명을 하던 추영영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루주, 내가 지금 누구와 얘기하는 걸까?”

“예? 아, 누가 부른 줄 알았어요.”

인이예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빌었다.

“누가 불렀다고? 어머, 우리 사제지간의 대화를 혹시나 듣는 사람이 있을까 봐 한쪽 귀를, 봐 봐, 이렇게 쫑긋 세우고 있었거든? 그런데 왜 내 귀에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을까?”

추영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연 랑 생각했어요. 갑자기 떠오르더라고요. 힝.”

“불쌍한 척하지 마.”

“예!”

“너무 씩씩한 것도 이상해.”

“예.”

“으구, 이 화상을 어쩌면 좋니? 연락도 없는데 막, 막 생각나?”

“……예.”

“하긴. 삼정일사회주가 보통 사람 같지 않아서 말해 주지 않고 오긴 했는데, 단주의 행보를 보면 모르는 것 같아 걱정되긴 한다.”

추영영은 쥐 잡듯 인이예를 몰아붙이다 상체를 뒤로하며 의자에 등을 댔다.

“뭘 말해 주려고 하셨는데요?”

인이예가 토끼 눈을 하며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별건 아니고. 이예야, 너는 왜 철혈사자맹과 사혈명 쪽에선 지저분한 말들이 안 나오는 것 같으니?”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사부님?”

“귀암로 여섯 축의 역할은, 귀암로에만 한정된 게 아니야. 철혈사자맹과 사혈명 쪽에서 저지르는 온갖 지저분한 일들을…… 음, 세탁? 빨아 주는 거니 그렇게 부를 수 있겠다.”

“왜요?”

“귀암로는 약점을 쥘 수 있어 기꺼이 하는 거고, 다른 두 세력은 그것 때문에라도 귀암로를 대놓고 적대시하지 않는 거지.”

“아! 사부님 말씀 듣고 보니 정말 그래 왔던 것 같아요.”

인이예는 큰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추영영을 존경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 사부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겠지?”

“그럼요. 그런데 그걸 삼정일사회주님이 모를까요?”

“……그래서 조금 전에 말해 주지 않았다고 했잖아.”

“예에. 사부님, 우린 은자림 얘기나 해요.”

인이예는 건성으로 인정하고는 원래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추영영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으나 이내 괘씸한 제자의 태도 따위는 툭, 콧방귀 한 번으로 털어 버리고는 은자림 얘기로 넘어갔다.

***

용연은 묵 노야가 은신하고 있는 집 창문으로 스며들어 갔다.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탁자 위에는 화선지에 글이 적혀 있었다.

[문을 두드리시면 저를 부르라고 시켜 놓았습니다.]

“역시 회주님이야.”

용연은 바로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똑. 똑. 똑.

소리가 나자마자 후다닥 내달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조용한 걸음이 방 앞에 멈춰 섰다.

“회주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용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방문이 열리며 활짝 웃는 묵 노야가 들어왔다.

“다녀오셨습니까, 투신.”

묵 노야는 선 채로 예를 갖췄다.

“이틀 동안 별일 없었나요? 일단 앉으세요.”

용연의 손짓에 묵 노야는 앉으며 입을 열었다.

“계무의 손발을 서서히 끊어 가고 있습니다. 전부는 아직 파악이 안 돼서 일단 이곳 주위부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자들을 잘라 내고 그 자리에 삼정일사회의 일꾼들을 심어 놓았습니다. 한동안은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지만, 신뢰를 쌓도록 도와야겠지요.”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잘 처리하셨어요.”

용연은 너무 쉽게 말하는 묵 노야를 보며 감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삼정일사회가 주류로 있는 거리라면 몰라도 폐쇄성 짙은 이곳 골목 안의 생리와 그들만이 공유하는 나름의 문화를 파악하지 못하면 이틀 만에 이룰 수 없는 성과였기 때문이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투신. 제가 잘하는 일이라 어렵지 않게 뚫을 수 있었습니다.”

묵 노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용연을 향해 다시 한번 예를 보냈다.

자신의 수고를 한 번에 알아봐 주는 사람과 일을 도모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지 새삼 느끼게 된 것이다.

“이제 여우락 쪽만 도착하면 시작이네요.”

용연은 눈을 반짝이며 단단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시작입니다.”

묵 노야의 눈도 반짝였다.

임료를 한류천 안으로 들여보내 놓은 상태이기에 여우락이 공격을 시작하면 곧장 계무의 위치를 알려 줄 수 있었다.

***

척.

앞장서던 담영호가 멈춰 서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일제히 사방으로 호각 소리가 퍼져 나갔다.

삐이익― 삐비―익―.

수십 개의 호각 소리에 뒤따르던 몇 백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삼삼오오 무리지어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식량이다. 배 속에 넣어 몸을 가볍게 해라.”

호법들의 명령에 소속 무인들은 대답 대신 살아 있는 눈빛과 강한 고갯짓을 보냈다.

힐끗.

다른 호법들과 마찬가지로 명령을 내린 귀수 주혼은 선두에 있는 담영호와 그 뒤에 선 두 무인, 그리고 지켜보는 남궁산산을 눈에 담았다.

‘군림단원이라는 저들 셋이서 락주를 처단하고 세 호법을 도망치게 만들었다. 얼마나 대단했는지 못 본 것이 한이 될 정도야. 그리고 십 호법. 군림단과 어떤 거래를 한 건가?’

주혼은 이마에 짙은 주름을 만들며 인상을 썼다.

여우락 본거지가 공격당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달려갔을 때는 이미 남궁산산이 저 군림단원 셋과 나란히 서 있었다.

―오해가 있었다고 해요. 저분들은 저를 잡으려고 움직였는데 외부 식구들이 한류천의 농간임을 밝혀냈다고 하네요. 그래서……(중략)……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나요? 저분들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흔쾌히 도와주시겠다고 하네요. 한류천으로 가실 분?

모든 것이 여우락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저 남궁산산이 주도하고 있기도 했다. 이미 많은 호법들은 남궁산산이 다음 대 여우락주가 돼야 한다고 지지를 알렸다.

‘나 역시 십 호법을 지지한다. 하지만…….’

주혼의 시선은 여전히 담영호와 두 군림단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산산, 북돋워라. 죽는 것 외엔 쉴 시간이 없을 테니.”

담영호는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들어라!”

남궁산산은 담영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자후를 터트려 주목시켰다.

“먼 길 달려온 것 같은가? 저기 보이는 마을이 목적지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여우천하! 락주무적!

―우오오오오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죽는 것 외에 휴식은 없다. 자, 가자. 가서, 여우락의 힘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려 주자!”

―우오오오오오!

거대한 함성이 수백 명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곧 노을이 지고 어둠이 드리운다.

어둠은 싸움의 적이 분명하지만, 담영호는 저 어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줄 사람이 저곳에 있음을 알기에 웃었다.

씰룩.

가슴이 두근댄다.

아버지를 죽인 강호삼대세력의 전대 고인 서른 명을 사냥할 때 외에 이런 기분은 느껴 본 적 없었다.

힐끗.

담영호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함성을 지르며 투기를 일으키는 무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등 교림, 저들의 소리를 묻어 버리려면 어디를 무너뜨려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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