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림단주-178화 (178/232)

178화

정운은 서두르지 않았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 멈춰 섰다.

멀리 한류천의 본거지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규모의 마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어. 이러다 손님으로 도착하는 건 아니겠지?”

실없이 혼잣말을 던진 정운은 뒤쪽을 돌아봤다.

일곱 검귀와 오십여 명의 제일 귀령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거기, 자네, 검사부님은 여전히 수련에 열심이신가?”

정운이 자신을 보고 있는 일곱 검귀 중 한 명을 가리켰다.

“허궁이라 부릅니다. 사부님은 매일이 다른 분들과의 경쟁이라 바쁘십니다.”

“그렇군. 암주께선 도태되는 사람을 곁에 두지 않으시니까.”

정운은 자조 섞인 말을 꺼냈다.

이번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도태.

그 말의 주인이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부님께선 첫째 공자님이 세 분 중 가장 자질이 뛰어나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허궁은 정운이 무시할 것을 알면서도 한마디 거들었다.

“음? 검사부님이? 뭐라고 하시면서?”

“검에 재능이 있다고…….”

허궁은 정운의 빠른 반응에 놀라 엉겁결에 원론적인 대답을 꺼냈다.

“검? 그렇지, 한때는 검을 좋아했지. 암주님께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드리기에 적당한 무기가 아니란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정운의 눈이 아련해졌다.

스무 살 때로 기억하고 있었다.

가벼운데 날카롭고 점, 선, 면 어느 공간에서도 제대로 된 위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강의 무기, 검에 푹 빠졌던 때였다.

두 사제의 빠른 성장이 눈에 밟히지만 않았다면 지금도 검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공자님, 통천강 십 성은 아무나 이룰 수 없는 경지라고 들었습니다. 꼭 다음 대…….”

“이봐, 허궁, 말 아껴.”

정운은 허궁이 선을 넘으려 하자 바로 제지시켰다.

잠시였으나 기분은 좋았다.

마지막 말만 하지 않았어도 좀 더 나았을 것을.

다시 움직이려 막 손을 들어 올리려 할 때였다.

“음?”

아래쪽에서 빠르게 올라오는 인영을 발견했다.

인영은 정운이 이곳에 멈춰 선 것을 확인하고 오는 것처럼 아무런 주저함이 없어 보였다.

“첫째 공자님, 귀이륙입니다.”

인영은 곧장 다가와 정운 앞에서 무릎을 꿇더니 뭔가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매듭 둘?”

정운은 서찰의 둘레에 붉은 띠 두 개가 둘려진 것을 보자마자 서둘러 집어 들었다.

“여우락 쪽에서 귀사이가 보낸 서찰입니다.”

귀이륙의 말은 이미 정운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우락 십 호법의 반란입니다. 여우락 본거지를 무력화시킨 자들이 지켜보니 십 호법의 사람들…….]

힐끗.

정운은 여우락에서 벌어진 일을 왜 자신에게 가져왔느냐는 눈으로 귀이륙을 내려다봤다.

“저는 그저 받자마자 가져온 것뿐입니다.”

귀이륙은 정운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자 몸을 더욱 낮췄다.

[……첫째 공자님, 한류천을 노리는 세력을 알게 돼서 급히 연락드립니다. 사자로 온 둘째 공자님과 거래를 마친 새로운 여우락주 십 호법이 사람들을 끌어모아 곧장 한류천으로 출발했습니다.

―귀사이.]

“여우락!”

정운은 서찰을 와락, 구겨 버리며 멀리 보이는 한류천 근방의 마을들을 노려봤다.

여우락이 한류천을 노리고 있다면 저곳에 있는 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귀이륙, 저곳에서 온 거냐?”

“예. 마을에 있다가 곧장 달려왔습니다.”

“네가 이곳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지?”

“하루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전서구가 여우락에서 마을까지 날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하루나 이틀……은 넘지 않습니다.”

“이틀.”

“제 신법으로 마을까지 오려면 오 일은 잡아야 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정운은 귀이륙의 계산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우락을 전복시킬 정도의 고수들인데 귀이륙을 기준으로 잡으면 안 된다.

하루나 하루 반나절을 빼야 한다.

내일이나 모레.

여우락의 전력이 도착할 시간이다.

정운은 품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옥병과 하얀 천에 감싸인 붓을 꺼내 글을 적기 시작했다.

“귀이륙, 너는 마을로 돌아가지 말고 곧장 귀영일을 만나 이걸 전해라. 중요한 것이니 실수하면 안 된다. 알았느냐?”

“예!”

귀이륙은 정운의 서찰을 받아 품에 넣었다.

“우리는 마을로 움직인다. 가자.”

정운은 상기된 얼굴로 아래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육십 명에 달하는 인원이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귀이륙의 머리 위를 넘으며 쫓아갔다.

홀로 남은 귀이륙은 일어나 품에서 양끝과 중간이 좁은 얇은 쇠를 꺼내 작은 돌멩이 위에 올려놓았다.

동서남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귀영일이 있는 위치를 파악한 뒤 쇠막대를 품에 집어넣고 일어나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의지와 무관하게 제자리에 선 채 굳어 버렸다.

“정운과 나눈 얘기 좀 들어 볼 수 있을까?”

먼저 도착해 정운 등을 지켜보고 있던 용연이 귀이륙을 막아선 것이다.

“누, 누…….”

“정운이 왜 갑자기 서두르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툭.

귀이륙은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용연은 귀이륙의 품을 뒤져 정운이 건넨 천에 적힌 서찰을 꺼내 읽었다.

[은자림, 여우락, 한류천을 뒤엎은 세력이 어쩌면 하나일지도 모른다. 최대한 빨리 암주님께 알려 드려라.

―정운.]

“흠. 뭔가를 듣고서 세 곳을 연결시킨 건가? 그게 뭘까? 앞쪽에서 기다리려면 좀 더 힘을 써야겠는데?”

용연은 벌써 개미 정도의 크기로 줄어든 정운 등을 바라봤다.

팟.

용연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척.

용연은 품에서 투신의 가면을 꺼내 썼다.

그러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상단전을 닫으니 넓게 퍼져 있던 색이 몸 안으로 들어와 단단해지는 느낌이야.’

전에 십사객과 싸울 때 중단전의 진기만 운용한 이후 처음이지만, 그때와 또 달랐다.

좀 더 명확해졌다고 해야 할까?

다른 곳에 퍼져 있던 진기들을 오장육부가 끌어당겼다는 표현이 옳을 수도 있었다.

이대로라면 상단전을 운용할 때와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때, 용연의 고개가 위쪽을 향했다.

정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발을 들었다가 가볍게 내려놓았다.

턱.

용연의 발아래에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나, 삼제의 첫 번째 원리를 운용한 진각이기에 시선이 닿은 곳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콰콰!

땅이 일어서서 그대로 정운을 덮쳐 버린 것이다.

콰콰콰콰!

“윽!”

정운은 다급히 신형을 멈춰 세우며 들고 있던 허리띠를 검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허리띠에서 수십 가닥의 광채가 그물처럼 빛을 발하더니 그대로 거대한 흙더미를 가루로 만들어 날려 버렸다.

“누구냐!”

정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곧장 사자후를 터트려 먼지구름을 앞쪽으로 보냈다.

그러자 정운의 내공에 휩쓸린 먼지구름이 수평으로 누운 기둥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텅!

기둥 끝에서 뭔가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힐끗.

정운은 시선을 소리가 난 앞이 아니라 위쪽을 올려다봤다.

인영 하나가 솟구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귀윙―.

허리띠로 만든 검강을 사선으로 날렸고, 손을 들어 귀령대에게 공격하란 명령을 내렸다.

사사사삭.

제일 귀령대 전원이 양옆으로 퍼졌다가 허공으로 솟구친 인영을 에워쌌다.

쩡!

정운이 날린 검강은 인영과 부딪친 뒤 소멸됐다.

“지금!”

정운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퉁― 퍽!

가장 먼저 공격했던 귀령대원이 새우처럼 등을 휜 채 뒤쪽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무완주슬 조아.’

용연은 날아간 귀령대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몰려드는 다른 자들에게 다가갔다.

턱.

무기를 손가락으로 잡아 내자 몇 개가 더 날아왔다.

티디딕.

잡고 있던 무기를 사선으로 흘리며 막아 내자, 귀령대원들은 당황하며 용연이 이끄는 방향으로 쏠렸다.

턱.

다른 한 손을 한 명의 가슴에 댔다가 뗐다.

터더― 텅―.

서너 명이 붕 떴다가 뒤쪽으로 떨어졌다.

척.

용연의 자세가 달라졌다.

‘이번엔 각지.’

손을 거둬 양쪽 허벅지 위에 놓은 것이다.

촤아아악!

기회라고 여겼는지 십여 명의 검이 용연의 몸을 노리고 일직선으로, 사선으로, 아래로 스며들듯이 밀려왔다.

슥.

용연은 기마자세처럼 내렸던 하체를 세웠다.

‘각벽.’

등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카가― 캉캉캉!

용연의 가슴과 등에서 요란한 쇳소리가 수십 번 연속 터졌다.

빙글.

검을 모두 몸으로 받아 낸 용연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돈 후 멈춰 섰다. 아니, 멈춰 선 것처럼 보였다.

쿠앙!

“크아악”

“으악!”

“커헉!”

용연을 공격한 십여 명의 입에서 단말마가 터지며 관절을 감싸고 있던 갑옷들이 찢기더니 사방으로 날아갔다.

‘저런 움직임이라니!’

정운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십여 명 남짓의 귀령대원들은 망연자실 선 채로 죽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희가 나서겠습니다.”

정운이 막 물러나라고 입을 열려 할 때, 검사부가 보내 준 일곱 검귀 중 허궁이 투기를 드러내며 나섰다.

저 광경을 보고도 싸우고 싶다고?

정운은 다른 여섯 검귀를 쳐다봤다.

모두 허궁과 같은 생각인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귀령대보다 강한 일곱 명을 상대로는 어떻게 싸우는지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끄덕.

정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일곱 명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귀령대와는 분명 다르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정운은 허리띠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저자…… 그와는 달라, 다른데, 왜 나는 자꾸 그가 떠오르는 거지?’

통천강 십 성의 내공을 손짓 하나로 무산시켜 버린 자.

가면을 쓴 것과 싸우는 방식, 풍기는 기도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 가면 뒤의 얼굴이 은자림에서 만났던 용연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쩡!

일곱 명의 무인이 합세하자마자 엄청난 굉음이 일대를 휘몰아쳤다.

드드드드―.

진동까지 전해지자 정운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쳐다봤다.

오십여 명의 귀령대와 일곱 명의 검귀들이 커다란 바위를 물 한가운데 던져서 만든 포말처럼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아홉 사부가 전력을 다한다면 저런 광경을 만들 수 있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