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림단주-177화 (177/232)

177화

푸드덕―.

정운은 날아오는 전서구를 보며 눈을 빛냈다.

기다리고 있던 연락이 온 것이다.

전서구가 내려앉기도 전에 손을 뻗어 잡아챘다.

[한류천 호법을 사냥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본거지에서 나온 호법들의 수족만 여럿인 걸로 봐서 적어도 셋 이상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혼자서 서른 명 가까이 심장을 뽑아내는 마녀만 확인했고, 나머지 전력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한류천주는 더 이상 호법들을 내보내지 않을 것 같으니, 곧 사달이 일어날 것 같아 서둘러 연락드립니다.

―귀일사.]

꿈틀.

정운의 눈가에 잔경련이 일어났다.

사달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일어날 것 같아서 연락했다?

“후웁.”

짧게 숨을 뱉어 내며 쪽지를 와락, 구겼다.

마녀란 단어에 은자림주를 처리한 여인들을 떠올렸으나, 이어진 설명으로 아님을 알았다.

사실 누구든 상관은 없었다.

머뭇거리면 기회를 줘서라도 한류천이 뒤집어지게 만들고 싶은 심정이니까.

“한류천으로 간다.”

엎으려는 놈들이 만반의 준비가 안 된 상황이라면, 자신을 보고 서두르라고 일부러 드러내면서 갈 생각인 것이다.

***

―까르르르!

묵 노야가 자리 잡고 있다는 마을로 접어들자마자 용연의 귀로 가장 먼저 들려온 소리였다.

돌아보자 며칠 동안 씻지 않아 숯 칠을 한 것 같은 얼굴의 아이들이 신나서 장난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용연을 쳐다보다 들키자 쪼르르 골목으로 도망쳤고, 다들 그 아이의 뒤를 쫓아갔다.

‘아이들을 마을 입구에 풀어놓은 이유가 이거였나?’

용연은 아이들의 눈을 보자마자 누군가가 아이들을 부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인상착의를 알아오라고 했을 것이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마을은 흥겨웠다.

어른들의 얼굴엔 웃음이 피어났고 움직임들은 바빴다.

그렇게 골목을 따라 걸을 때였다.

개미 소굴을 방불케 하는 집들 중 한 곳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흘흘. 구경은 재미나셨습니까?”

묵 노야가 예를 갖추며 문 옆으로 비켜섰다.

“마을에 축제가 열렸나 했어요.”

용연은 집으로 들어가며 피식, 웃었다.

“원래 불안한 자들의 습성이지요. 원인부터 파악하기보다는 일단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안정을 꾀하는 겁니다. 호법 넷이 실종됐고, 찾아오라고 보낸 수족들 역시 돌아오질 않으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일 겁니다. 흘흘.”

묵 노야는 눈앞에 한류천주 계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방을 가리켰다.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개인적인 볼일은 잘 처리했나요?”

“그 일은……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투신.”

묵 노야는 방문을 닫으며 그리 크지 않은 탁자 앞을 손으로 가리켰다.

용연이 앉는 것을 확인한 뒤, 마주 앉으며 말을 이어 갔다.

“신녀 한 명 영입한 것으로 끝을 냈습니다. 전에 데리고 있던 아이를 다른 사람이 빌려갔었는데, 아이가 알아서 찾아왔더군요. 받아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용연은 무슨 말인지 의문이 들었으나 묵 노야의 입가에 달린 쓴웃음을 보고 고개만 끄덕였다.

“투신, 일 기 삼십육무투는 이곳에 와 있고, 곧 이 기 삼십육무투도 모두 불러들이려고 합니다.”

“담 선림을 기다리지 않고요?”

“예? 당연히 기다려야지요. 한류천 십이호법 중 여덟이 남아 있고 휘하에 있는 숫자만 해도 족히 몇 백은 됩니다. 그들을 무슨 수로 일, 이 기 삼십육무투들만으로 치겠습니까, 투신? 일 기는 담영호 선림이 여우락을 이끌고 올 때 합류시킬 것이고, 이 기는 싸움이 시작되면 근방에 박혀 있는 한류천의 뿌리들을 뽑아낼 생각입니다.”

“이곳 토박이들을 말하는 건가요?”

“비슷합니다. 촌장이나 그 일파들은 한류천에서 심어 놓은 자들일 테니 솎아 내야지요. 며칠 동안 있어 보니 삼정일사회 책을 숨기고 있는 자들이 꽤 되더군요.”

“아아, 그러니까, 그동안 폐쇄적으로 운영되던 이곳의 방식을 열어 버릴 생각이군요?”

용연은 눈을 빛내며 반문했다.

묵 노야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바로 꿰뚫어 본 것이다.

“흘흘. 역시 투신이십니다.”

“남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밖으로 나가게 만들면 자연스럽게 돈이 마을로 들어오니 여자들도 좋아하겠지요.”

“정말이지 할 말이 없게 만드십니다, 투신.”

“아이들을 봤거든요.”

“음?”

“노는 척하며 제 모습을 살피는 아이들요. 부리는 자들이 누군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회주님 얘길 듣고 나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용연은 묵 노야의 계획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바탕이 나와는 다르신 거야. 나는 아이들이 자라면 어떤 역할을 할지에 관심이 가 있는데, 투신은 아이들의 환경부터 생각하셔.’

묵 노야는 용연처럼 웃을 수 없었다.

불과 하루 전에 임료를 시켜 서른 명의 심장을 뚫게 만들었다.

용연이 본 어린아이들과 비슷한 또래들에게 서로 죽고 죽이도록 경쟁을 시켰고, 뚫고 올라온 아이에겐 팔신녀의 몸을 통해 새로운 육체를 받게 만들었다.

무투가 됐을 때, 서른여섯 명 모두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됐다고 감격했다.

용연이 아이들에게 주고자 하는 행복과 자신이 무투들에게 주고자하는 행복.

다르다, 분명 다르다.

그러나 다르면서 같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용연을 통해 행복을 확인받듯이, 삼정일사회에 속한 전원은 자신을 통해 행복을 확인받고 있으니까.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고 행복의 가치 역시 달라질까?

절레절레.

‘달라도, 같도록 만들어 주마.’

묵 노야는 자신의 손에 달린 수백, 수천의 인원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모두 끌고 가 주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회주님?”

용연은 묵 노야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다.

상념에 잠겨 있는 것 같이 기다려 주었는데 갑자기 주먹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예? 부르셨습니까, 투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짐이라도 하셨나 보죠?”

용연은 묵 노야가 쥐고 있던 주먹을 보며 슬쩍 웃었다.

“아! 제가 투신 앞에서 주책을 부렸군요.”

“그렇게 정색을 하시니 궁금해지는데요?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흘흘. 잠시 투신의 말씀대로 환경을 조성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떠올려 봤습니다.”

묵 노야는 머쓱해 하며 대답했다.

“마을이 형성되겠죠. 지금처럼 역할 수행자로서가 아니라 본인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마을을 제가 알고 있어요.”

용연은 피식, 웃으며 동동마을의 육문 등을 떠올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니, 할아버지의 모든 기록이 담긴 석실 안의 냄새가 기억났다는 것이 옳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묵 노야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한동안 그 상태로 용연과 묵 노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있었다. 다급한 목소리가 두 사람을 깨우기 전까지는.

“회주님!”

“무슨 일이냐?”

묵 노야가 돌아보자, 평복을 여러 겹 껴입은 청년이 머리를 바닥에 가까이 댄 채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수십 명의 무인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디서 온 연락이냐?”

“이좌칠주병(二座七株丙)입니다.”

묵 노야는 청년의 보고에 머릿속으로 이좌와 칠주, 그리고 병의 위치를 계산 후 입을 열었다.

“이틀. 알았다. 가서 좌주가 변할 때마다 연락하라고 일러라.”

“예!”

청년은 씩씩하게 대답하곤 무릎걸음으로 돌아갔다.

“회주님, 왜 저렇게 움직이는 거죠?”

“투신께서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도록 머릴 숙이고 다니라고 했습니다.”

“아.”

“누군지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제가 가죠.”

“……예?”

“정운이란 자일 것 같아요. 은자림과 한류천을 맡고 있으니 보고가 들어갔겠죠.”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아니어도 제가 가요. 어느 방향으로 이틀 거리인지 알려 줘요. 이번 계획,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켜야 해요. 회주님은 예정대로 이곳을 흡수할 준비를 해 두세요.”

용연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안 묵 노야는 백지 위에 이좌칠주병의 위치를 표시했다.

용연은 위치가 찍힌 백지를 가슴에 넣은 후 몸을 돌려세워 방문으로 움직이다 멈춰 섰다.

아주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부른 사람이 있나요?”

용연의 질문에 묵 노야는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자네요.”

‘임료!’

묵 노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다시 확 밝아지며 용연을 향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뜻이다.

끄덕.

용연이 허락하자, 묵 노야가 방문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료야, 기다리기 심심했던 모양이구나?”

문 앞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료야, 내가 방문을 열었을 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덜컹.

묵 노야는 말을 하는 와중에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임료가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손님이 오신 줄 모르고 와 버렸습니다, 주인님.”

임료는 애처롭게 보이려고 했는지 어깨까지 살짝 떠는 몸짓을 보였다.

“안 그래도 부탁할 일이 생겨서 찾으려던 참이었다.”

“주인님, 명령만 내려주세요. 제가 온몸을 바쳐서라도 완수하겠습니다.”

“흘흘. 네게 줄 선물을 가져오라고 시켰는데 이제야 도착했지 뭐냐. 방에 가 있으면 들고 가마.”

“예.”

임료는 일어나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제가 말씀드렸던 아이입니다, 투신. 계무를 찾는 데 큰 도움을 줄 아이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묵 노야는 허리를 숙였다.

아직 대법 전이라 임료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없어 몰랐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주다니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인인가 말이다.

묵 노야는 용연이 아무런 말이 없자 고개를 들었다.

“아!”

용연은 이미 방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

이좌칠주병.

용연은 되도록 높은 곳 위주로 달려 방향을 놓치지 않았다.

한류천으로 온 이유 중 하나인 정운이길 바라서였을까?

묵 노야에게 한류천으로 오고 있다는 무리 얘길 듣는 순간 정운을 떠올렸다.

그냥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동마을에서 동굴을 나갈 때 만날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듯이, 그 이후 여러 번 같은 상황을 경험했듯이,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았다.

구왕 사도천을 자극하게 될 수도 있으나, 군림단이 빠르게 자리만 잡으면 그 또한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삼키는 것과 지키는 것.

후자가 백 배는 수월하다.

그 이점을 사도천은 제자에게 맡김으로써 전부 잃게 될 것이다.

오고 있는 자가 정운일 경우라면.

용연은 선림들이 펼치는 창천비의 진화된 형태인 등천(登天)을 운용하며 허공 높이 신형을 쭉 끌어 올렸다.

쉬아― 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