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화 전주, 이곳은 사자궁주님의 집무실입니다. 묵자성 맹주님 집무실 앞에서나 유세 떠시고 자중하세요. 오성위, 궁주님께 백거루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찾아왔다고 전해 주겠나?”
화일악과 비슷한 연배의 중년인, 무성전주 남궁창이 오성위에게 예를 갖춰 말을 건넸다.
꿈틀.
화일악은 표정을 일그러뜨렸으나 발끈하진 않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집무실 안까지 전해지길 바라서 일부러 큰 목소리를 낸 것뿐이기 때문이다.
남궁창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호찬진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문을 열었다.
“궁주님께서 두 분을 뵙겠다고 하십니다.”
호찬진이 옆으로 비켜서자 화일악과 남궁창이 동시에 걸음을 옮겼다.
“진천전주, 무성전주, 오랜만이오. 백거루 일 때문에 찾아왔다고요?”
호원은 탁자를 가리킨 후 중앙 끝자리에 앉았다.
“궁주님, 제가 무성전을 맡은 지 십 년입니다. 흑천이란 집단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오행각과 기린각의 분노가 도를 넘어서기 일보 직전입니다.”
남궁창은 앉자마자 열변을 토해 냈다.
듣고 있던 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징징대는 건 여전하네.’
호원이 보는 남궁창의 모습이었다.
전주 자리를 실력이 아닌 성과로 결정해 달라고 징징, 남궁세가의 인재들이 많은데 왜 중요한 곳에 등용시켜 주지 않느냐고 징징,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요구 사항이 많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의논이 아닌 일방적으로 자신의 불만을 해결해 주길 기대하는 모양이다.
“남궁 전주, 안 그래도 평소 해 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잘됐소. 앞으로는 보고받은 것만 확인하지 말고 직접 찾아보시오.”
“구, 궁주님!”
남궁찬은 호원이 화일악 앞에서 대놓고 창피를 주자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부르짖듯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호원의 시선은 이미 화일악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진천전에선 무슨 일로?”
“몇 년 전, 폭풍각주였던 가무경이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몇 명이 그랬는지, 어떤 무공을 사용했는지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요. 혹시 궁주께선 그 일에 대해 아십니까?”
“그런 일이 있었소? 몰랐소.”
“궁주님, 두 사건은 연관이 있습니다.”
두 전주는 서로 먼저 말을 하려 싸우듯이 목소리를 내기 바빴다.
둘의 모습은 마치 먹이 든 주인에게 개 두 마리가 머리 터지게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들은…… 쓰레기다.’
호원은 차마 입을 열고 싶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굳이 더 들어 볼 것도 없었다.
“궁주님의 지혜를 빌려주십시오.”
“궁주님, 흑천이 먼저입니다.”
“남궁 전주, 일의 경중부터 따져 보시오.”
“경중? 그렇게 급한 일을 왜 공사다망한 우리 궁주님께 가져온 거요?”
“남궁 전주, 궁주님께서 조금 전에 해 주신 말씀 못 들었소? 알아서 하라잖소?”
화일악과 남궁창의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언쟁은 몇 번이나 더 오갔다.
화일악은 구대문파 원로들에게 제안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 찾아왔을 테고, 남궁창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해법을 구하러 온 것이다.
‘내가 그동안 저런 시시한 투정들이나 받아 주며 좋아했구나.’
호원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예전이었다면 화일악의 용기를 칭찬하며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수를 썼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이 아니었다.
“화 전주, 남궁 전주, 잘 들으시게.”
호원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화일악과 남궁창의 몸을 동시에 움찔거리게 만들 정도의 힘이 실려 있었다.
“경청하겠습니다.”
화일악과 남궁창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집무실 안의 공기 양이 갑자기 반의반으로 줄어든 것처럼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기 때문이다.
“화 전주, 앞으로 나를 찾아올 때는 맹주님의 허락을 받으시게. 그래야 오해가 없어. 물론 그런다고 내가 만나겠다는 뜻은 아니야.”
화일악이 뭐라고 대답하려 입을 벌렸으나, 호원은 무시하고 남궁창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남궁 전주, 앞으로는 내게 오기 전에 먼저 오행각, 유성각, 기린각의 각주들과 회의부터 한 후 의견을 모아 보게. 역시나 내가 그 의견에 대해 판단해 주겠다는 뜻은 아니야.”
할 말을 끝낸 호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사의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까지 화일악과 남궁창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호원은 그것이 자신 때문임을 모르고 오성위에게 손짓했다.
“두 전주를 밖으로.”
호원은 명령을 내린 뒤 손등 위에 볼을 대며 눈을 감았다.
예전이었다면 저 둘이 나가서 하고 다닐 말을 모으라고 했을 텐데,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쿵.
집무실 문이 닫혔다.
“찬진아, 세가로 가자. 돌아온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피곤하구나.”
“……안내하겠습니다.”
호찬진은 떨리는 양손을 꼭 잡으며 허리를 직각으로 접었다.
화일악과 남궁창조차 두렵게 만든 힘을 호찬진이 감당하기엔 버거웠던 것이다.
“호씨세가 수장이 될 놈의 몸이 그리 약하면 어째. 이번에 가면 다른 놈들과 함께 지하 석실로 들어가.”
‘다른 놈들? 전에 세가에 갔을 때 아버님을 만나셨던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호찬진은 기대감으로 눈이 커졌다.
***
[투신, 백거루주를 만나고 한류천 쪽으로 향하는 길에 서둘러 몇 자 적습니다.
철혈사자맹에서 조사차 사람을 보내왔는데, 사자궁 쪽 무인은 한 명도 없고 모두 진천전 무인들이었다고 합니다.
툴툴대는 몇몇을 매수해 물어보니, 무성전에선 진천전이 조사를 마치면 나온다고 했답니다.
제가 호원이라면, 진천전의 전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아무래도 호원이 맹 내의 일에 손을 놓은 것 같습니다.
회주.]
스스스―.
묵 노야가 보낸 서찰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주루에선 흑천과 관련된 얘기가 화자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로써 호원 궁주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추측이 확실해졌다.’
용연은 눈을 빛냈다.
자신이 펼쳐놓은 일들에 호원이 끼어든다면 마지막까지 안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원이 손을 놓고 있다?
군림단주로서든 투신으로서든 조심할 필요가 없게 됐다.
강호삼대세력의 최상위에 올라 있는 자들 중에 자신의 얼굴을 아는 자는 호원뿐이니까.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던 용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여기요.”
누군가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여전히 풍채 좋은 외연 향주 구선이 막 앉으려는 순간, 용연은 앉지 못하도록 팔을 잡고 주루 밖으로 나갔다.
“얘기는 가면서 하죠.”
“예? 저는 아직 식사도 못 했는…….”
“여우락 본거지를 공격했다는 담 선림과 두 교림은 어때요?”
용연은 걸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단주님, 일단…….”
슥.
용연이 구선의 코앞에다 보자기 하나를 갖다 댔다.
맛있는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보자기였다.
구선은 군침이 나오는지 침을 삼키며 받았다.
“허기만 속여요.”
“안 그래도 만두가 유명하다고 해서 음? 으음…….”
구선은 만두 두 개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바로 삼켜 버리고는 용연이 원하는 대답을 꺼냈다.
“담 선림과 등언 교림, 피항 교림의 공격은 대단했지만, 여우락의 전력도 만만찮았다고 합니다. 일차 공격에서 세 단원은 여우락 정예 백 명을 해치웠으나, 노리는 호법 중 한 명이 본거지에 남아 있던 전력을 모두 내보내 치 향주의 고람 식구들과 묵성자의 무인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답니다.”
“피해가 큰가요?”
“예? 그럴 리가요. 단주님의 지시로 우리 외부 식구들이 제법 강해졌잖습니까? 큰 피해 없이 막아 냈고, 등언 교림과 피항 교림이 가세해 주어 오히려 여우락의 전력이 사방으로 도주하기 바빴습니다.”
“담 선림은요?”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잖습니까? 당연히 혼자서 치고 들어가서 전각이 있던 자리를 평지로 만들었고, 기어코 여우락주를 처리했다고 합니다.”
“세 호법이 보호하고 있지 않았나요?”
“그 세 놈은 담 선림의 공격을 몇 번 받아 보곤 앞다퉈 몸을 빼내기 바빴답니다. 여우락주는 이미 약물에 중독돼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잘 해냈군요, 담 선림이.”
용연은 구선의 설명을 들었을 뿐인데 그 광경을 직접 본 것처럼 뿌듯해졌다.
“단주님, 이제 여우락은 어떻게 될까요?”
구선은 이미 예상을 하고 있음에도 모른 척 물었다.
용연의 계획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무너져야죠. 그리고 빈자리에 담 선림 사람을 앉혀야겠지요.”
“단원이나 우리 외부 식구들이 아니라…… 담 선림의 사람인가요?”
용연의 대답이 의외였던지 구선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담 선림에게 맡겼으니 알아서 할 거란 뜻이에요. 구 향주, 외부 식구들은 한 곳에 머물러선 아직은 곤란해요. 나중이라면 몰라도.”
용연은 구선이 서운해 하는 것을 보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또 표정에 드러났구나. 쯧.’
구선은 용연의 설명에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몇 번째 실수인지 몰랐다.
용연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구 향주, 가서 담 선림을 만나요. 만나서, 여우락을 접수하면 사람이 방문할 텐데, 굳이 싸울 필요 없이 적당히 거래를 하라고 전하세요.”
“예?”
구선은 집중해서 듣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담영호의 사람에게 여우락을 맡긴다고 하더니, 적당히 거래를 하라?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귀암로가 하부 조직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얼마 전에 알게 됐어요. 여섯 축의 수장들이 바뀔 때마다 사자를 보내요. 그리고 새로운 거래를 하는 거지요. 약해진 하부 조직에서는 귀암로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한 채 끌려갈 수밖에 없게 되지요. 누가 해도 되니 굳이 군림단의 이름을 드러낼 필요는 없죠.”
“아!”
구선은 그제야 용연의 말을 이해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서둘러요.”
“단주님,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직접 가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아니요. 여섯 축 중 다른 한 곳에 가 봐야 해요.”
“다, 다른…… 설마 다른 축까지 이미 공략을 시작하신 겁니까?”
“총 네 곳.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우리 사람으로 채울 생각이에요.”
“……!”
꿀꺽.
구선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뒤늦게 등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이 느껴졌다.
강호삼대세력 중 한 곳인 귀암로를 상대로 이토록 쉽게 싸움을 할 수도 있단 말인가?
“구 향주?”
“아, 갑니다. 단주님, 정말…… 굉장하십니다.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진심입니다.”
구선은 말을 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군림단원들은 모를 수 있겠지만, 외부 식구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무공, 임무, 독립적 위치까지 그 어느 하나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것들을 이 대 군림단주 용연이 해결해 주었다. 당연히 자신들 역시 군림단의 일원이란 생각을 품게 됐고, 자존감이 커지게 된 것이다.
‘우리 단주님은…… 나 따윈 엄두도 내지 못할 큰 생각을 가진 분이셔.’
“구 향주 덕분에 힘이 나네요.”
용연은 구선을 향해 활짝 웃었다.
구선이 진심이듯 용연 역시 진심으로 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