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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174화 (174/232)

174화

묵 노야는 임료에게 자신을 따라 계단만 밟고 오르면 되는 길을 제시했다.

투정이 많은 아이라 힘들면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 있으라고, 사람 시켜 데리러가겠다고 배려도 해 주었다.

너무 친절했었다는 것을 배신 후에 깨달았다.

자신이 알려 준 계획이 임료에겐 쉬웠던 모양이다.

본인도 만들 수 있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지만, 임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은 돌다리도 두드리며 걷는데, 그 속도를 쫓아오기엔 임료가 너무 젊었다.

원하는 것을 빨리 손에 쥐고 싶을 나이였으니 당연히 본인만의 방식으로 서너 계단씩 올라가고 싶었을 것이다.

실패는 그렇게 안착하게 된다.

확인해야 하는 것보다 원하는 것의 무게가 더 클 때.

“다음은 없다, 료야. 남은 생을 바쳐서 배신의 대가를 지불하렴. 첫 선물인 하오문은 잘 받아먹으마. 흘흘.”

묵 노야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얹혀졌다.

***

수십 개의 전각과 그 주변에 달라붙은 집들.

여우락의 본거지답게 엄청난 규모의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치 향주, 저기다.”

담영호는 특유의 무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데려온 고람의 인원은 육십 남짓입니다, 담 선림. 뭘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고람 향주 치령은 육십을 넘긴 노파답지 않게 목소리에 다부짐이 실려 있었다.

“우리들이 들어가서 휘젓는 동안 도망치는 자들을 처리하면 돼.”

담영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발 뒤에 서 있던 등언과 피항이 앞으로 나섰다.

“……세 분만 들어가시겠다는 겁니까?”

치령은 담영호의 말을 확인하듯 되물었다.

그러나 담영호는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 듯 시선을 고람의 무인들보다 조금 더 뒤쪽에 있는 자들에게 향했다.

“묵성자, 너희들을 통솔해 줄 치령 향주다.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고, 대가를 가져갈 것이다.”

―우우우우!

크지 않은 환호.

묵성자의 무인들은 담영호의 약속에 투기를 끌어 올렸다.

‘묵성자?’

치령은 처음 듣는 집단에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담영호를 쳐다봤다.

“고람 식구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제가 알아서 지휘하지요.”

치령은 빠르게 수긍했다.

담영호가 묻는다고 대답해 줄 사람이 아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경험하고 들어 왔기 때문이다.

“등 교림은 서쪽, 피 교림은 동쪽, 나는 정면을 맡는다. 목표는 여우락주와 세 호법이다. 여우락은 호법 한 명당 오백 명을 부릴 수 있지만, 대부분 각 호법들의 영역에 주둔하고 있다. 전멸을 목표로 하고, 최단시간 내에 끝낸다.”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담영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언과 피항이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움직여.”

팟.

등언과 피항의 신형이 사선으로 허공을 갈랐다.

방향을 확인한 담영호는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물론 첫발을 뗄 때만 느리게 보였을 뿐, 엄청난 속도로 정문과의 거리를 좁혀 갔다.

“세상에…….”

치령은 담영호가 교림일 때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다가 방금 지휘하는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엄청난 존재감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

쾅!

한류천주 계무는 탁자를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성필, 이 개자식은 어딜 갔어!”

십이호법 중 셋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하오문주 문성필, 쇄월랑 이덕, 구궁장 낙허.

셋이 빠진 아홉 명의 호법만으로는 불안해서 진정할 수가 없었다.

“가! 가서, 당장 모가지라도 끌고 와! 안 가? 안 가!”

콰지직!

계무는 기어코 탁자의 모서리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아홉 호법들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하오문주란 별호를 사용할 정도로 하오문에 애정이 각별한 문성필의 거처는 미로처럼 골목골목 이어진 곳이었다.

문앞엔 비루한 옷차림의 하인이 앉아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문 호법 안에 계시냐?”

“힉! 아…… 읍읍.”

절레절레.

하인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대답 대신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으나,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문 안쪽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들려오는 열락(悅樂)의 신음이 인영의 귀에 들렸기 때문이다.

“계집질? 고작 그 짓 때문에 천주님의 소집 명령을 거부한 거라고? 미쳤군, 미쳤…….”

인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다 멈춰 섰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을 정확히 서른여섯 명의 청년들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기척을 내지 않을 정도로 훈련된 자들이다. 누가…….’

“거비(巨鼻) 도포, 오랜만이야? 흘흘.”

청년들 사이에서 촌로 한 명이 빠져나오며 알은척을 했다.

거비(巨匕).

보통 검 삼분지 일 크기의 비수를 사용한다고 해서 붙은 별호였다.

그러나 사내를 아는 사람들은 큰 코란 뜻의 거비로 불렀다.

“나를 아는군.”

“거비 도포를 어찌 몰라? 잘난 척할 게 없다고 툴툴거릴 때 내가 만들어 준 별호인데. 흘흘.”

“……!”

도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 사연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기억났군그래. 맞아, 나야, 묵 노야.”

히죽.

묵 노야는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 묵 노야…… 나는 정말, 정말 천주가 그리할 줄 몰랐소. 정말이오.”

도포는 부지불식간에 인사가 아닌 변명부터 꺼냈다.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하면 자연스레 본능이 나올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잘못한 게 있으니 부정하는 말로 시작을 하는 것이다.

“사람도, 참. 알지, 내가 자넬 몰라주면 누가 알아줘?”

“몇 년 동안 보이질 않아 궁금했소, 묵 노야. 그래, 그동안 또 무슨 일을 벌인 거요?”

도포는 묵 노야가 대화를 유도하자 너스레를 떨며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서른여섯 명의 청년들이 묵 노야 앞을 막아서며 투기를 드러냈다.

순간적으로 집중된 투기는 도포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도록 만들었다.

“어디 보자, 이제 곧 한 시진이 되어 가니 조금만 기다려 주게.”

묵 노야는 삼십육무투 뒤에서 말을 건넸다.

“한 시진? 그게 무슨 말이오, 묵 노야?”

“문성필과 임료가 밀회를 나누고 있는 시간이라네.”

“이, 임료?”

“이탄이 내게서 데려간 임료 말일세.”

‘능구렁이 같은 노인! 임료가 나와 만났던 걸 다 알면서 시간 끌고 있는 거야.’

도포는 큰 코에 주름을 만들며 인상을 썼다.

“괜찮아, 이탄이 데리고 살았다고 여자가 아닌가? 임료 정도면 매력이 있잖아?”

“묵 노야, 나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말리던 입장이었소.”

도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묵 노야의 말을 부정했다.

“곧 나오면 알게 되겠지. 흘흘.”

묵 노야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웃었다.

그때였다.

덜컹.

“무, 묵…… 노야, 이제 돼, 됐소? 하, 한 시진…… 사, 살려 주시오…….”

‘문 호법?’

도포는 청년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만으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들어가 보겠나? 료야, 도포가 왔다. 들여보내 주랴?”

“예!”

묵 노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료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포, 선택하게. 방으로 들어가면 죽지는 않아.”

“당치 않소, 묵 노야. 나는 그런…….”

스스스.

도포가 거절하려는 순간, 삼십육무투 중 넷이 뒤쪽을 포위했다.

“즐기게. 그거면 돼. 열어 줘라.”

차자작.

삼십육무투가 길을 열어 주었다.

“문 호법은 어디 있소?”

도포는 청년들이 길을 비켜섰음에도 문형필이 보이지 않자 좌우를 빠르게 훑었다.

“이쪽으로 빼놓았네. 알잖나, 나는 깔끔한 걸 좋아해. 뭐 좋은 거라고 다 보여 줘.”

“…….”

도포가 망설이며 눈동자를 사방으로 굴릴 때였다.

“도 호법님, 몸 식기 전에 어서 들어와요, 네?”

서른을 훌쩍 넘긴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임료의 나신이 방 안에서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들어가지 않으면 죽지만, 일단 들어가면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꿀꺽.

도포는 끌려 들어가듯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탕.

방문이 닫혔다.

“계무의 성격상 열둘 중 넷이나 비었으니 발광하겠군. 흘흘흘.”

힐끗.

묵 노야는 혼잣말을 하다 고개를 돌려 방 쪽을 쳐다봤다.

임료에게 혈교의 비전대법 중 소녀환희대법 흡열락(吸悅樂) 구결을 알려 주자, 한 시진 동안 문성필과 실전을 벌였다.

그 결과.

묵 노야는 무투 둘을 비켜서게 만들고 핏기 없는 얼굴의 문성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득!

문성필의 목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부러졌다.

“료야, 도포의 진기까지 흡수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구나. 다 채우고 나면 무투들에게 베풀어 주는 법까지 알려 줄 테니 아무 걱정 마라.”

툭. 툭.

묵 노야는 가까이에 있는 무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신녀는 참 잘하는구나. 어쩌면 너희들 다음 기수 중에 최고의 무투가 나올 수도 있겠어. 흘흘.”

묵 노야의 입에서 잔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류천주 계무의 몰락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 담영호가 여우락을 손에 쥐었다는 보고를 받은 뒤 한류천 본거지에서 합류하면 된다.

―아아, 으음…….

방에선 또다시 열락의 시간으로 접어든 것 같았다.

원하는 대로 순서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부들부들.

묵 노야는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내려다봤다.

몇 년 만에 느껴 보는 쾌감인지 모른다.

모든 조건들이 원하는 대로 착착 요철처럼 짝이 맞아 가는 느낌.

―저를 무기로 사용하세요. 묵 노야가 만든 계획을 완성시켜 드릴게요.

용연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흘흘. 투신을 만나기 전의 내 삶은, 투신께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묵 노야는 자신의 생각이 비약임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말을 끝냄과 동시에 미친 듯이 뛰어 대는 가슴이 좋았다.

턱. 턱.

가슴을 매만졌다.

이 기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번 계획의 정상까지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귀암로의 명령을 무시하는 한류천주.

단림을 새로운 한류천주로 만들 생각이었다.

***

사자궁주 집무실 앞.

오성위와 중년을 넘긴 두 사내가 대치하고 섰다.

“오셨다는 것 안다. 내가 왔다고 알려라.”

화산파의 예리한 기세를 고스란히 드러낸 오십 대 중년인, 진천전주 화일악은 오성위가 아닌 사자궁주 집무실 문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셔야 보고드릴 수 있습니다.”

호찬진이 앞으로 나섰다.

다른 오성위들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냥…… 알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까득.

화일악의 턱 근육이 불룩하게 일어났다.

오성위라고 해 봐야 일개 호위에 불과한 자들이었다.

자신의 말에 토를 달아선 안 되는 존재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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