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여주희는 말할 때마다 마른침을 삼켰다.
말 몇 마디 한 것뿐인데 심장이 조여 들다 못해 아팠다.
마음에 들지 않는지 뒤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죽이려는 건가?
아니지,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겠다고 했는데 그럴 리가 없잖은가?
“대, 대협?”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주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푸스스―.
창문 쪽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되돌려 무슨 소린가 하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아…….”
여주희는 몸을 부르르 떨며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허리 바로 위쪽 부근의 창문 양쪽에 손바닥 하나 정도의 균열이 가 있었다.
텁. 텁. 텁.
물러나며 몸을 만져 봤으나, 다행히 자신의 몸까지 자르진 않은 것 같았다.
꿀꺽.
“마, 마 총관! 마 총관!”
여주희의 입에서 뾰족한 괴성이 미친 듯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
“몽 선림, 흑천은 강호삼대세력을 타도하는 것이 목표예요.”
용연은 멀쩡한 정자로 가서 널브러진 시체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려고 만들었지요. 크크크.”
“평소 마음에 안 들던 철혈사자맹의 폭풍각과 오행각 무인들이 백거루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 상황을 만든 거예요.”
“마음에 듭니다, 단주님.”
“저는 이제부터 철혈사자맹과 사자궁이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려 해요.”
“몇 군데 더 털면 반응이 빨라지겠군요. 크크크.”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단주님,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무것도 안 보이는 동굴 안에서는 조심합니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움직여서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는 거죠. 크크크. 그럴 때는, 일단 밖으로 나오게 해 줘야 됩니다.”
몽외는 말을 마치고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은 사람처럼 입맛을 다셨다.
“아!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네요. 이곳은 몽 선림에게 맡길게요.”
용연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몽외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몇 배에 달하는 경험이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소황선에 이어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됐다.
말을 마친 몽외는 정자를 내려갔다.
‘이제 호원에 관한 정보를 백거루주에게 받으면 된다. 그러려면 묵 노야의 도움이 필요한데…….’
용연은 묵 노야를 떠올리다 미간을 찌푸렸다.
한류천주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던 것이 떠오른 까닭이다.
일단은 움직이면서 방법을 찾아야 했다.
***
쩌저적!
몽외의 간단한 손짓 몇 번으로 땅에 글자가 새겨졌다.
흑천(黑天).
“크크크.”
몽외는 글자가 마음에 드는지 흑천 소속 무인들을 모이라고 손짓했다.
“천주님, 글에서 힘이 느껴지는데요?”
“내 이럴 줄 알았지. 천주님이 말은 거칠게 해도 어휘력은 장난 아니시잖아? 그렇지? 어이, 그렇지? 제발, 누구라도 대답해 줘. 아니면 내가 내 손으로 목 졸라 죽는 꼴을 보게 된다?”
“그러게 아부도 적당히 좀 해야지.”
“우헤헤헤.”
몽외의 주위로 몰려든 열다섯 명의 무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왁자지껄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 냈다.
평소 흑천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다.
“크크크. 누구 입부터 찢어 줄까?”
뚝.
열다섯 명의 입이 동시에 닫혔다.
“노구, 이전보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냐? 좋아, 좋은데, 다음엔 시간 끌지 마라. 너 신경 쓰다 다른 동료들이 다칠 수 있다. 알았냐?”
“그…… 다, 다친…….”
노구는 몽외의 고급스러운 당부에 놀라서 대답도 미루며 동료들을 돌아봤다.
꿈뻑.
몇몇 동료들이 눈을 감았다 떴다.
알아들은 척하란 뜻이다.
“예, 천주.”
노구는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좋아, 이것도 나름 괜찮아. 크크크.”
몽외는 노구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듯 윗니와 아랫니를 모두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해골 같다고 말하면 죽겠지?’
‘응. 하지 마.’
‘뭔가 있지?’
‘아니면 우릴 병풍처럼 두르고 계실 리 없지.’
이젠 익숙한지 흑천 무인들은 눈빛과 표정으로 대화를 능숙하게 나눴다.
‘감동했군. 크크크.’
몽외는 지금의 실험으로 왜 군림단원들이 용연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자신은 똑같은 말이라고 생각했으나, 용연처럼 말하니 다들 감동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아닌가?
‘천주님이 좋아하시네? 우리가 감동한 것처럼 보여서 그런 건가?’
피식.
가장 오래된 몇몇은 몽외의 표정을 보고 어떤 상태인지 짐작하고는 들키지 않게 소리 없이 웃었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흑천 열다섯 무인들은 몽외를 위해 언제든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군림단.
흑천 무인들의 자부심이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
몽외는 무너진 백거루 정문을 향해 발을 뗐다.
“천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학규가 가장 먼저 대답하며 뒤를 따랐고, 곧바로 열네 명의 흑천 무인들이 웃으며 쫓아갔다.
어디로, 왜 가는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항상 그래 왔듯이, 따르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 앞장섰으니까.
***
푸드덕―.
날아온 전서구는 창가에 놓인 먹이를 쪼며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까지 연결된 봉을 타고 내려간 전서구는 빛이 들어오는 구멍 쪽으로 뒤뚱거리며 움직였다.
“……많이 망가졌네. 쯧.”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구멍을 통과하자 전서구는 가슴 쪽 깃털을 부리로 비벼 댔다.
구멍은 커다란 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방 안의 분위기는 전서구가 도착했다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료, 주인을 팔아먹었으면 잘살 것이지, 얼굴이 왜 그 모양인 게야?”
늙수그레한 목소리의 주인, 묵 노야는 임료에게 다가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주었다.
바르르.
임료는 눈을 질끈 감으며 온몸을 떨었다.
하오십랑 중 일인이자 그녀의 낭군인 은형수 이탄이 옆에 엎어져 있었다. 아니, 이탄의 시체였다.
‘주인님께선 아직 나를 원하시는 건가? 아니면 죽는 걸 직접 보려고…….’
임료는 묵 노야의 손짓과 목소리를 파악하기 위해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눈동자를 마구 굴려 댔다.
“네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달았단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그걸 왜 해야 하는지를 모르면 성공시킬 수가 없다는 것, 사람 하나 잘못 쓰면 손만 뻗으면 될 거리가 영원만큼이나 멀어진다는 것, 또, 또…….”
묵 노야의 입가에 자상한 웃음이 지어졌다.
“주인님, 그때는 제가 정신이 나가서…….”
“아니야, 그렇지 않아.”
“……?”
반성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임료는 묵 노야의 완강한 부정에 다시 동공이 흔들렸다.
“당시의 너는 그 어느 때보다 똑똑했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한 것뿐이야.”
“그, 그런가요?”
“그럼.”
“주인님, 절 데려가 주세요. 그동안 저 한량 때문에 속 썩은 걸 생각하면…… 흑.”
“그래, 그래야지. 너를 거둔 사람이 난데 그 속을 누가 나보다 더 잘 알겠느냐? 자 자, 울지 말고 일어나. 안 그래도 중요한 자리가 비어서 채워 줄 사람이 필요했단다.”
“제가 할게요. 주인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지옥에 가라고 하셔도 가겠습니다.”
임료의 눈에서 절절함 가득한 눈물이 기어코 쏟아졌다.
죽지 않게 됐다는 안도의 눈물이었으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묵 노야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지옥은 무슨.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꾸나. 매일이 천국일 게야.”
묵 노야는 임료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안아 주었다.
이제 팔신녀들이 익히는 내공만 심어 주면 그 어떤 신녀들도 해내지 못한 강한 무투들을 탄생시킬 수 있게 된다.
‘너는 누구보다 욕심이 많은 계집이지. 배신을 이해해 달라고 했더냐? 이해하마. 그러니 너도 투신을 위해 희생 좀 해다오.’
씨익.
묵 노야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얹혔고,
배시시.
임료의 입가에는 한 번 더 살게 됐다는 안도의 미소가 그려졌다.
“지, 지금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주인님.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 주세요.”
“은하소수는 얼마나 성취를 이뤘지?”
“칠 성이지만 주인님이 도와주시면 금방 완성할 자신이 있어요.”
임료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묵 노야를 쳐다봤다.
“당연히 도와주려고 물은 게야. 가자, 네 몸을 정화시켜서 은하소수부터 완성하자꾸나. 흘흘.”
묵 노야는 임료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임료가 배신하기 전의 그 표정과 눈빛이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임료의 입에서는 연신 애처로운 목소리가 흘어 나오고 있었으나, 눈빛에서는 차가운 한광이 흐르고 있었다.
‘이 성만 더 올리면 은하소수는 완성돼. 칠 성의 은하소수만으로도 이탄 저 개자식의 공격을 막아 내기까지 했어. 완성만 되면…… 당신 심장을 이 손으로 꺼낼 거야.’
임료의 턱 근육이 불룩 일어났다.
그런 임료를 내려다보는 묵 노야의 입가엔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 그런 오기야말로 팔신녀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지.’
묵 노야는 몸을 일으키며 방 안에 들어와 있는 네 명의 삼십육무투에게 시체를 치우고 임료를 데려가라는 손짓을 했다.
임료가 나가고 문이 닫혔을 때.
구구구―.
“음?”
묵 노야는 전서구 우는 소리에 눈을 크게 뜨며 서둘러 줄을 잡아당겨 벽을 열었다.
그르륵.
“네가 왔구나?”
묵 노야는 전서구 다리에 묶인 쪽지를 풀었다.
[백거루의 주인이 호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네요. 나와 회주님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흑천’에 대한 소문 좀 내세요. 몽 선림이 이끌고 있는 전 군림단원들이 모인 곳이에요. 군림단과 무관한 세력으로 포장해 주고요.
몽 선림은 회주님도 알고 있을 거예요.
동태병과 그 무리들을 쓸어버린 사람이니까.
―투신.]
“아!”
묵 노야는 자신도 모르게 동태병이란 이름을 보고 탄성을 터트렸다.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단둘이서 동태병과 관련된 모든 것을 부수고 찢어 놓은 광경을.
꿀꺽.
묵 노야는 숨어서 지켜보던 그때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숨이 가빠 왔다.
“투신께서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긴, 그 호원조차 인정했으니.”
용연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몽외와 비교를 하려다 호원을 떠올리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적어도 묵 노야의 기준에선, 호원이 몽외보다 강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임료를 이용해 한류천주 계무의 양손을 묶어 두려 했더니, 백거루까지 챙기려면 다른 방법을 써야겠구나. 어차피 임료의 몸이 필요하기는 하네.”
툴썩.
묵 노야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임료에 대해 조사하던 중 변하지 않은 버릇을 알게 됐다.
은형수 이탄과 함께 살고는 있지만 몸을 더 많이 섞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하오십랑의 대형이자, 십이호법 중 한 명인,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오문주라고 소개하는 문성필이 바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