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모용기는 용연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용연에게 말려드는 것 같아 생각을 흩트리려는 것이다.
‘뭐지?’
용연의 말 몇 마디에 휘둘리는 모용기의 모습을 보고 판영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대로 뒀다가는 상황이 이상해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연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조금도 관심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용 단원, 군림단주는 지금 어디 있나?”
‘호원 궁주에게 아무런 지시도 내려오지 않은 거야.’
용연은 군린단주가 젊다는 것도 모르는 판영필의 협박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장소를 말하면 군림단주가 누군 줄 알고 찾으려는 거죠?”
“군림단 교림을 내 손으로 처리한 경험이 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교림을?”
판영필의 말에 용연의 눈빛이 달라졌다.
“왜, 이제 말하고 싶어지나?”
“아.”
용연은 판영필의 말에 긍정적이지도 않고 부정적이지도 않은 반응을 꺼냈다.
국진세 등이 삼정으로 있을 때 강호삼대세력에 보냈던, 벽을 넘지 못한 교림들 중 한 명에 대한 얘기였음을 안 까닭이다.
‘설마 흑천에 속한 사람은 아니겠지?’
용연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정문 쪽을 향했다.
진류에게 하남성으로 움직인다고 연락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다급한 내용의 서찰이 전해졌다.
―몽 선림에게 단주님이 홀로 움직이는 중이라고 했다가 크게 혼났습니다. 단주님도 아시겠지만, 몽 선림의 결정을 제가 만류할 힘이 없습니다.
오싹.
용연은 진류가 보낸 서찰의 내용을 떠올리자 살짝 오한이 드는 기분이었다.
판영필의 말을 몽외가 듣지 못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시간 끌어 좋을 것 없어. 군림단주의 위치만 말해 주면 자네가 이곳에 왔다 간 걸 아는 사람이 없게 만들어 주지.”
판영필은 용연이 정문 쪽을 돌아본 이유가 도망가려 한다고 여기고 더욱 압박을 가했다.
‘아, 아냐, 저 표정은 겁먹은 얼굴이 아니야. 정문에 누가 와 있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태연할 리가 없어.’
모용기는 이미 예전에 용연의 진짜 모습을 봤다.
교림을 보좌하는 신분이었음에도 말 몇 마디로 그 공간을 완벽하게 장악한 자였다.
재빨리 용연의 시선을 좇아 백거루 정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어차피 내가 이곳에 온 건 아무도 모르게 될 거야.”
용연은 판영필의 경고를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에 있는 중앙 전각을 돌아봤다.
“당장 자리에…….”
“구 향주, 밖에 도착한 단원들 안으로 들여요.”
용연은 판영필의 말을 자르며 허공에 대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반응이 정자 근처가 아니라 정문 가까이에서 일어났다.
인영 하나가 훌쩍 솟구쳐 백거루 담장을 넘어간 것이다.
동시에 정자 안에 있던 용연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정자 밖으로 옮겨졌다.
“헙!”
용연을 먼저 발견한 모용기는 다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한 번은 실수일 수 있지만, 두 번은 실력이지. 대가를 치르는 건 본인의 몫이고.”
용연은 모용기를 딱한 눈으로 쳐다보곤 몸을 돌렸다.
“말도 안 돼…….”
판영필은 자신의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진 용연을 보며 혼잣말을 흘렸다.
“오행각 식구들은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백거루에서 벗어나 복귀하도록 해라!”
모용기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곧장 좌측 담장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삼사 장씩 건너뛰며 막 담장에 도착한 순간, 멈춰 서야 했다.
“크크크. 벼룩처럼 잘도 통통거리며 달리는구나. 나는 단주님처럼 너그럽지 않다.”
모용기가 넘으려는 담 아래 머리 하나는 큰 괴인이 윗니와 아랫니를 모두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오싹!
보는 것만으로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모습에 한 번, 괴인의 말뜻을 이해하고 두 번.
“다, 단…… 설마 군림단주?”
모용기는 자신이 마치 군림단주를 만났던 것처럼 말하는 괴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며 전력을 끌어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노력으로는 몽외의 표정조차 바꾸지 못했다.
“저쪽으로 가시는구나.”
몽외는 모용기의 노력이 가상하다는 듯이 눈짓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모용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몽외의 눈짓이 가리키는 방향에 백거루 중앙 전각이 있음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자였다고? 학림…….’
쉬악.
용연을 떠올리는 모용기의 머리 위로 붉은 빛이 떨어져 내렸다.
‘용 단주였…….’
모용기의 생각은 거기서 끝이 났다.
죽은 자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툭.
“크크크. 단주님, 이런 하찮은 일을 저는 매우 즐긴답니다. 노구, 이번에도 지면, 넌 내 손에 죽어.”
몽외의 시선은 이미 한 번 판영필에게 졌던 흑천의 일원인 노구를 향해 있었다.
***
“사, 살려……. 컥!”
몽외의 손에 머리가 잡힌 무인의 단말마였다.
흑천의 일원인 노구가 판영필을 몰아붙이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것이다.
핏물이 흘러내렸으나, 몽외의 손은 물론이고 옷자락 어디에도 붉은 반점 하나 없었다.
“크크크. 늘었…… 아, 들고 있었지? 쯧.”
몽외는 손에 묻은 피를 털며 걸음을 정문 쪽으로 옮겼다. 아니, 옮긴다 싶은 순간 이미 정문으로 도망치는 무인들을 향해 손을 횡으로 긋고 있었다.
쉬악!
붉은 빛이 넓게 퍼지며 무인들을 쓸고 지나갔다.
콰콰콰콰!
정문과 좌우 담이 가로로 잘리며 이내 뒤로 넘어갔다.
***
“향주님, 도왑!”
외연의 향주인 구선은 백주 치원의 입을 손을 틀어막았다.
“치 백주,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떤 임무에 투입되든 명심해. 몽외 선림이 있는 곳 근처 백 장 내 접근 금지야. 알아들었어?”
“읍. 읍.”
치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구선은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손을 뗐다.
몽외가 정문 쪽이 아니라 안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확인한 까닭이다.
“……될 뻔했다. 휘유.”
구선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몽외의 싸움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데, 너무도 잔인하기 때문이다.
본능에 충실한 학살.
특정 인물을 목표로 할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지금처럼 일정한 영역이 정해지면 극대화된다.
그 상황을 경험하게 되면 누구라도 구선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반가운 얼굴들이네.’
족히 이, 삼십여 년은 못 본 얼굴들이 몽외의 지시에 따라 날뛰고 있었다.
군림단을 떠났던 사람들을 몽외가 거둔 것이다.
콧날이 다 시큰해지는 구선이었다.
***
“저들이 누군데 내 백거루를 저리 망치는 거야?”
중앙 전각 꼭대기 층에서 연못 쪽을 내려다보는 사십 대 여인, 백거루주 여주희의 목소리에 분노가 담겼다.
“루주님,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철혈사자맹 폭풍각과 오행각의 무인들을 애처럼 다루는 자들입니다. 최대한 냉정을…….”
철썩!
올해로 육십오 세가 되는 백거루 수석총관 마광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장난해, 마 총관? 냉정? 어머니께서 어떻게 지켜 온 백거루인데!”
여주희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옳습니다, 루주님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허나, 일단은 천주께 연락을 했으니 지원하러 올 때까지는 견디셔야 합니다.”
마광은 화끈거리는 볼의 통증 따윈 무시하고 조언을 건넸다.
“마 총관, 저들이 누군데?”
“…….”
“폭풍각과 오행각의 무인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고 있어. 저런 자들을 상대로 한류천주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무성전과 진천전에도 전서구를 보냈습니다.”
“알았으니 나가.”
여주희는 보기도 싫다는 듯 손을 흔들어 마광을 내쫓았다.
밖에서 서둘러 달려가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무성전과 진천전에 전서구를 보냈다면 저렇게 뛸 리가 없었다.
톡. 톡.
긴장할 때의 버릇이 나왔다.
손톱 끝을 물어뜯는 것이다.
이십여 년 동안 백거루를 지키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친구도 팔아먹어 봤고, 이놈 저놈의 첩처럼 지내 보기도 해 봤고, 목에 칼날이 닿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 깨달았다.
세상에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어디지? 어디서 저들을 움직이는 거…… 음?’
여주희의 눈이 갑자기 커지며 손톱 뜯는 소리가 멈췄다.
방 안에는 자신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꿀꺽.
비밀 호위들에게서 아무런 신호가 없다.
“칠백위 누구든 나와라.”
만금(萬金)을 써서 옆에 붙인 일곱 명의 호위, 칠백위 중 나타나는 자가 없었다.
“나올 수 없을 거예요.”
“……!”
여주희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들어 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
칠백위들이 모두 제압당했다는 뜻이다.
움찔.
저절로 몸이 떨려 왔다.
“그 상태가 좋을 거예요. 제 얼굴을 보면 죽여야 하니까요.”
“……원하는 게 뭐죠?”
여주희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칠백위를 소리 없이 처리하고 방 안으로 들어온 자가 말을 건넸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나 가능한 반응이었다.
“조금 전에 마 총관? 그와 나누는 대화를 듣다가 흥미로운 이름을 들어서요.”
‘그때 이미 들어와 있었구나!’
여주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생각 이상으로 엄청난 고수란 뜻이기 때문이다.
“백거루는 한류천 소속인가요?”
“소속 같은 건 없어요. 지금이야 철혈사자맹과 친하게 지내지만, 이전에는 한류천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도움?”
“뒷배 같은 거죠. 누구나 될 수 있으나, 누구나 될 수 없는.”
“굉장히 유연한 운영 방식인데요?”
“저들을 데리고 가 주신다면, 대협도 백거루의 뒷배가 되실 수 있으세요.”
“다 죽이는 게 더 쉽지 않을까요?”
흠칫.
여주희는 뒤에서 들려온 말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뒤를 돌아볼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아 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농담이에요. 데려온 사람들을 물리는 조건으로 정보를 원해요.”
‘정보?’
여주희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사자궁주 호원이 왜 꼼짝도 안 하는지 알아봐 주세요. 가능할까요?”
“……그, 그분은 제가 접근할 수 있는 영역 밖에 계세요.”
“강호에 흑천이란 조직이 있어요. 타도 강호삼대세력을 목표로 삼는 곳이죠. 그들이 오늘, 감히 철혈사자맹의 폭풍각과 오행각의 무인들을 도륙했네요? 자, 철혈사자맹에서는 어떻게 대응할까요? 사자궁은?”
용연은 묵 노야와 대화할 때처럼 말투를 바꾸었다.
자신이 알고 싶은 정보를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예까지 곁들여 설명해 준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어요.”
“적당히.”
“예?”
“너무 들어가지 말고 동향만. 이 말도 알아들었나요?”
낯선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예.”
“며칠 뒤에 사람을 보낼 테니 좋은 성과 기대할게요.”
“만족하실 겁니다, 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