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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167화 (167/232)

167화

인이예는 당당하게 정운의 시선을 받아 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아쉽…….”

정운이 마음의 결정을 입으로 내보내려 할 때였다.

짝! 짝! 짝!

“당연한 말씀입니다.”

전각 위에서 나이든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정운은 전각 위를 올려다보며 이채를 발했다.

육십 전후로 보이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서 있는 자세와 박수 소리로 집중시키는 능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저런 분이 뒤를 봐주고 있어서 그리 당당했던 거군요?”

‘누구지?’

인이예는 정운의 반응을 봤지만 소황선을 아는 척 연기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도움을 줄 사람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암로 사자 정운입니다. 어느 고인의 행차신지 알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정운은 인이예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바로 소황선에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정운의 태도를 인이예는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생각보다 수완이 좋은 자라 여겨진 것이다.

턱.

소황선은 인이예의 앞에 내려서며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은 못 들은 것으로 하지. 내가 나선 이유는, 강호의 이해관계에 상급 기관인 척 끼어들어 정리하려는 자네의 행태가 못마땅해서야.”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관계입니다. 단지 제 행동이 못마땅해서 나서셨다면 제삼자이실 테니, 잠시 물러나 주시길 정중히 권해 드리겠습니다.”

정운은 소황선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그건 곤란해. 제삼자가 아니니까.”

소황선은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관계있는 분을 예 소저가 몰라볼 리가 없잖습니까?”

“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예?”

“허허허. 그냥 너는 네가 할 일을 하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하자꾸나.”

“고인께서 하실 일이라면?”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하는 것?”

소황선은 슬쩍 뒤쪽을 보는 눈짓을 했다.

인이예를 보호하겠다는 뜻이다.

‘통천강(通天罡)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아?’

정운은 소황선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대화를 시작함과 동시에 소황선의 무공 정도를 파악하려 운용한 통천강이었다.

사부이자 귀암로의 암주인 구왕 사도천의 삼대무공 중 하나인 통천강을 칠 성까지 끌어 올렸음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소저, 하고 싶은 말 다 하세요. 제가 있는 한 저 녀석은 소저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릴 수 없을 테니까요. 허허허.”

인이예를 돌아본 소황선은 삼촌이 조카를 바라보는 표정 그 자체가 됐다.

“대협, 도움은 감사하나, 이유 없는 호의를 받고 싶진 않습니다.”

인이예에겐 정운이나 소황선이나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둘 모두와 거리를 두려는 것이다.

“그 태도 역시 매우 훌륭하네요. 깔끔한 손속만큼이나 성격도 똑 부러지는군요.”

소황선은 자상한 웃음과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인이예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말을 이어 가려 했다.

그때 소황선이 불쑥, 정운을 돌아봤다.

“아! 조금 전에 했던 질문. 그건 누가 정한 건가? 뭐는 귀암로 어쩌구 하던 것 말이야.”

움찔.

정운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낮췄다.

내보낸 통천강이 한순간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구지?’

정운의 동공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통천강을 십 성까지 끌어 올려도 이긴다고 자신하기 힘든 상대란 것을 온몸이 알려 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사자로서의 임무가 후계 경쟁에서 얼마나 많은 점수를 받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쳐서 돌아가도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두 사제가 온갖 수법을 사용해 자신을 죽이려 할 테니까.

진퇴양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의 수족들을 모두 데려왔겠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어느 한 사람의 결정이 아닙니다. 귀암로가 여섯 세력을 하나로 규합할 때 합의하에 만들어진 규율입니다.”

정운은 이를 악물며 소황선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주도권까지 뺏기고 말았다.

“곤란하겠어, 자네. 대장이 빚 받아 오라고 시켰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게 생겼으니.”

‘이대로는 안 돼.’

파학!

소황선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운은 통천강을 십 성까지 끌어 올렸다.

싸울 의지를 드러내면 달라질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정운의 예상과 달리 소황선은 자리를 지키며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둥근 원을 그렸다. 동시에 슬쩍 뒤를 돌아보며 인이예와 열한 명의 십이월의 안전을 살폈다.

그그그극!

소황선이 보호하고 있는 공간 좌우로 땅이 밀려나며 굉음을 만들어 냈다.

“대협, 괜찮으세요?”

인이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소황선의 상태를 살폈다.

피식.

소황선은 웃으며 괜찮다고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저희가 피해 드릴까요?”

인이예는 자신과 열한 명의 십이월 때문에 소황선이 방어만 한다고 여긴 것이다.

“허허. 소저, 그럴 필요 없어요. 그리고 자네, 힘 더 쓰면 정말 곤란해져.”

소황선은 정운이 힘을 더 끌어 올리자 짧게 혀를 찼다.

정운의 뒤쪽 하늘에 아주 작은 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

“태루주님, 도와야 할 것 같습니다.”

뒤늦게 도착해 상황을 살피던 일월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일월, 뭔가 이상하지 않니?”

추영영은 나서기는커녕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황선의 반응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정운이 강하다는 것이야 변해 가는 지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정운의 기세를 소황선은 한 걸음도 밀리지 않은 채 받아 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 시선…… 아!’

추영영은 소황선의 시선을 따라가다 속으로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한 점이 순식간에 사람의 형태로 커지더니 누군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용연이었다.

***

턱.

용연은 수십 명이 둘러싼 곳을 넘어가지 않고 내려섰다. 그러고는 빈 공간에 미닫이문이라도 있는 것처럼 양손을 좌우로 벌렸다.

그러자 용연 앞에 있던 무인 예닐곱 명이 양쪽으로 날아갔다.

쉭.

용연이 그 사이를 관통한 순간, 곧장 발을 굴렀다.

쿵!

일부러 낸 소리였다.

진동이 퍼지기 전에 정운은 돌아섰고, 이십 대 청년이 달려오는 모습을 봤다.

소리 때문에 놀랐던가?

정운은 다시 소황선 쪽을 돌아봤다.

통천강을 막아 내던 소황선이 반격은커녕 슬쩍 뒤로 물러나며 뒤를 보라는 눈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음?’

정운이 뒤쪽에서 다가오던 청년을 되돌아보려 할 때였다.

흔들―.

바람이 정운의 머리칼을 건드리며 지나갔다.

정운은 속으로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뒤쪽에서 달려오던 청년의 속도로는 자신을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정운의 생각을 깨뜨리는 소리가 소황선 쪽에서 들려왔다.

“고생했어요.”

젊은 목소리가 귀에 들렸으나, 정운은 무시하고 뒤쪽 공간을 쳐다봤다.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다시 소황선을 되돌아봤다.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귀암로 암주의 제자라고 합니다. 자세한 얘긴 여기 똑 소리 나는 소저에게 직접 들어 보시지요.”

등지고 선 청년에게 소황선이 존대를 하며 한 발 옆으로 비켜섰다.

통천강 십 성의 진기를 한 손으로 막아 내던 저 노인이 예를 갖춘 것이다.

하지만 정운의 놀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네요. 자.”

청년은 대뜸 여인을 향해 양손을 펼쳤다.

“힝.”

정운에겐 그토록 당당하게 대하던 여인이 청년의 손짓 한 번에 볼멘소리와 함께 안겨드는 것이 아닌가?

지켜보던 정운은 미미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정운이 복잡한 시선으로 용연과 소황선을 번갈아 쳐다볼 때였다.

“루주, 무사한 거지?”

반대편 대나무 숲에서 여인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자림의 주인은 바뀌어도 어차피 귀암로의 한 축임을 알려 주고 오너라.

사부이자 귀암로의 주인인 구왕 사도천이 서찰로 내린 명령이었다.

경험도 있기에 쉽게 마무리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쉬운 일이 생사를 각오해야 할 정도가 됐다.

“거래는 태루주님께 맡겨요.”

용연은 안겨 있는 인이예를 품에서 떼어내고 눈을 마주 보며 말을 건넸다.

“거래에 대해 알고 계셨어요?”

인이예는 놀란 눈이 됐다.

“들었어요, 노야에게. 거래는 거래고, 사적인 볼일을 좀 봐야겠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용연은 놓기 싫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인이예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고는 몸을 정운 쪽으로 돌렸다.

“구왕 사도천의 첫째 제자 정운, 맞나?”

“내가 누군지 묻기 전에…….”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 당신을 포함해서 이곳에 데려온 사람들 모두 죽어. 그래도 듣고 싶나?”

“이이…….”

정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더니 허리띠를 풀어 손에 쥐었다.

팟.

통천강이 주입된 허리띠는 쭉 뻗어나가 무형의 촉을 단 창이 됐다.

드드드드―.

무기를 쥐자 정운의 기세가 달라졌다.

“오히려 자극이 된 건가?”

용연은 고소를 지었다.

소황선을 ‘소 선림’으로 부르지 않고, 인이예에게 ‘예 매’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은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군림단주라는 것을 이 순간에는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허나 언제고 강호삼대세력은 군림단을 견제하게 된다.

그때, 정운이 이 자리에 인이예가 있었다는 것을, 군림단주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두지 않으려는 것이다.

“죽여 봐, 능력이 된다면.”

정운은 부릅뜬 눈으로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정운의 무게를 견대지 못하겠는지 바닥이 움푹 꺼지며 가라앉았다.

엄청난 기의 응축이 저 창에 담겼다는 뜻이다.

슥.

용연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운을 향해 발을 뗐다.

저런 시위는 정운보다 약한 상대나 비등한 상대일 경우에나 통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운용한 삼제의 첫 번째 원리에 닿아 있음을 몰랐다.

쾌엑!

정운의 창이 용연의 이마 정중앙을 노리고 뻗어왔다.

팟.

창이 지나간 자리에 용연의 머리칼이 내려앉았다.

정운이 노리는 위치에서 딱 그만큼만 옆으로 움직인 것이다.

“악!”

뒤쪽에서 인이예의 비명이 터졌다.

용연이 창에 맞은 줄 안 것이다.

쾌엑!

팟.

이번에도 정운의 창은 목표를 빗나갔다.

그리고 다시 창을 회수한 순간.

턱.

용연이 창을 쥐고 있는 정운의 팔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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