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고오―.
소황선은 양손에 모은 진기를 최대한 압축하며 발현되는 것을 막았다.
인이예가 쉽게 들어가서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대나무 숲을 감싸고 있는 기의 흐름이 생각보다 대단했다.
그러나 그 정도였다.
압축시킨 기를 천천히 내밀자 안으로 파고든 구체가 순간적으로 크게 확산되며 통로 같은 공간을 만들어 냈다.
슷.
소황선은 공간을 지나자마자 진기를 갈무리해서 원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진법이 흐트러졌으면 알아챌 만도 한데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각으로 들어갔나?’
주위를 둘러봐도 인이예가 보이지 않자 바로 아래에 위치한 전각 지붕에 내려섰다.
‘찾았다.’
소황선은 웃으며 지붕 안으로 스며들었다.
***
번쩍. 번쩍.
은잠사가 공간을 가르며 춤을 출 때마다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위치 파악이 끝나면 열 명의 십이월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인이예를 중심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인이예는 그 상태로 잠시 기다렸다가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척.
인이예가 손을 들어 따라오려는 열한 명의 십이월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팔위?”
인이예는 계단 위를 향해 물었다.
앞쪽에 팔위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일부러 소리를 냈다.
십이월에게 알려 주며 뒤를 돌아봤다.
십이월은 경계에 여념이 없었다.
삼십육주 중 살아남은 자들이 올 것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제 위쪽의 팔위 중 한 명을 어떻게 처리할지만 결정하면 된다.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기다려.”
“루주님?”
이월이 깜짝 놀라 돌아봤다.
“너희들도 다칠지 몰라. 아직 완성했다고 자신하기 힘들어.”
“아…….”
이월은 인이예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검극현천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
쉬악!
소황선이 날린 수강(手罡)이 이 장 가까이 주욱 펼쳐지더니 벽을 타고 올라오는 살수들의 몸을 반으로 잘라 냈다.
“주모님의 능력이 상당하시네.”
소황선은 수강을 파리 쫓을 때처럼 사용하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안 보일 때는 걱정이 돼서 다급했는데, 막상 인이예의 능력을 보고 나니 어디까지 올라갈지 지켜보고 싶어졌다.
***
번쩍!
팔위 중 한 명인 삼무살(三無殺)은 갑작스러운 빛에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들었다.
팟.
‘큭!’
어깨가 따끔했다.
잘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 오른손은 남아 있다고 생각한 순간.
서걱!
빛이 좌우로 갈라졌다.
삼무살의 갈라진 머리 위를 인이예가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갔다.
***
‘깔끔하시네.’
소황선은 인이예의 검극현천이 펼쳐지는 과정을 보며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저 작은 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진기로 만들어 낸 광휘였다.
‘단순한 살수가 아니셨네. 웬만한 고수도 저 수법에는 잠시 주모님의 기척을 놓치겠어. 그 정도만 시간을 벌면 끝인 거지. 놀랍군.’
소황선은 처음 보는 수법에 절로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러나 아직도 다섯이 남아 있었다.
힐끗.
―나가! 나가서 머리를 가져와!
작은 소리지만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은자림주인 모양이다.
‘음?’
죽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돼지 멱따는 듯한 소리가 그쳤다.
***
“컥! 네, 네가…….”
은자림주 곽서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목에 검을 꽂아 넣은 무무를 손으로 가리켰다.
“겁도 적당히 먹어야지. 은영루가 그렇게 두려웠으면 진즉에 처리를 하든지. 뒤룩뒤룩 살쪄서 금보기갑도 채워지지 않는 몸으로 뭘 한다고.”
무무는 은자림주가 몸에 두르고 있던 금보기갑을 풀어낸 후, 척추를 잘근잘근 밟아 댔다.
“입을 사람?”
무무가 돌아서며 올라온 두 팔위에게 물었다.
“삼무살과 요관이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인일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무무의 시선이 막 올라온 섬전비(閃電匕)에게로 향했다.
“전혀.”
섬전비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죽으면 둘은 은영루주를…… 벌써 올라왔군.”
무무는 인일과 섬전비에게 양쪽으로 흩어지란 눈짓을 했다.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내 목표는 은자림주뿐이었으니까.”
이미 올라와 벽에 어깨를 기대고 있던 인이예가 몸을 틀며 무무를 쳐다봤다.
은신하고 있을 때 주위를 살피던 사내였다.
“그게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은. 내가 너희 셋을 살려 주겠다는 뜻이지.”
인이예는 무무의 반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유는?”
“스스로 판단해서 머리를 잘랐잖아. 네가 은자림을 맡아.”
“나보고 은자림을 맡으라? 설마 이 난리를 쳐 놓고 그냥 가겠다는 뜻인가?”
“내가 은영루주니까. 더 설명이 필요한가?”
인이예는 당연하다는 듯이 무무에게 되물었다.
“은자림이 당신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응징을 하러 온 것이오?”
무무는 인이예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들었다.
“너희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노렸거든.”
꿈틀.
무무뿐만 아니라 인일과 섬전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은자림을 이 꼴로 만들었단 말인가?
“누구요?”
무무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몰라. 앞으로도 모를 거야. 그때는 다 죽여 버릴 테니까.”
인이예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
‘은영루라. 허허허.’
소황선은 너무 통쾌해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막아야 했다.
능력이면 능력, 강단 넘치는 성격까지.
고작 한 번 봤을 뿐인데, 어디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어 보이는 인이예였다.
이제 돌아가는 길까지 지켜보면 될 것 같았다.
‘음?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꿈틀.
소황선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
[심상찮은 움직임이 포착됐답니다.
고수 수십 명을 이끌고 무한으로 향하는 정운을 봤다는 회원들의 제보가 쏟아집니다.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묵 회주.]
용연은 무한 쪽 하늘을 올려다보다 전력을 다해 천상비를 펼쳤다.
파스스―.
허공에서 몇 번이나 방향을 틀던 용연의 신형이 아래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
짝! 짝! 짝!
단 세 번.
두근!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박수 소리에 따라 크게 뛰었다.
‘고수!’
인이예의 모든 신경이 나타난 자에게 쏠렸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쪽을 머리 얹었고 옷차림은 단정했다.
삼십 대, 굵은 눈썹, 각진 하관, 큰 키.
모든 조건이 무골임을 알게 해 주었다.
“서둘러 달려왔음에도 하마터면 어긋날 뻔했군요. 소저, 어떻게 불러 드리는 것이 편한지 모르겠네요?”
“은자림주를 죽이고 가는 길이니 임시 은자림주?”
인이예는 정체를 밝히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둘러대며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재미난 여인이군. 내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 미인인데, 저런 냉혹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사내는 인이예의 대답에 고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곤란하군요. 아직 거래가 끝나지 않았잖습니까?”
“거래?”
인이예로선 처음 듣는 말이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자 자격으로 온 정운입니다.”
“예인. 그렇게 불러 주세요. 그런데 거래라면 무슨?”
인이예는 적의를 거두고 정운과 정면으로 마주 섰다.
거래라면 누구보다 잘 주고받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 소저? 아니면…….”
“편하게 부르세요. 어차피 은자림이 거래 조건인 것 같으니 상관없을 것 같네요.”
“하하하. 저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좋아요. 예 소저, 밖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안에 들어가 앉아서 대화를 이어 가는 것은 어떤가요?”
정운은 인이예의 반응을 보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자림이 귀암로와 거래로 이어진 관계라는 것도, 누구도 여섯 축의 주인을 자처할 수 없다는 것도, 거부할 때는 사자가 새로운 사람을 자리에 앉힐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
“어차피 제가 주도할 수 없는 상황인데 정 사자님의 편의까지 봐주기엔 너무 불리하네요. 그냥 이대로 진행하시죠?”
‘음? 웃어?’
정운은 인이예가 스스로 불리함을 인정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자 이채를 발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인의 정체까지 확인하고 올 것을.
“편하신 대로 하시죠. 제가 제안드릴 조건은 세 가지예요. 먼저 은자림은 귀암로와 거래로 이어져 있음을 인정하시나요?”
“아직은.”
인이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귀암로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여섯 축의 주인을 자처할 수 없어요. 인정하시나요?”
“역시.”
이번에도 인이예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마지막 조건입니다. 사자의 제안을 거부할 시, 제 재량으로 새로운 사람을 은자림주 자리에 앉힐 겁니다. 인정하시나요?”
“놀랍네요. 이건 거래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도 되니까요.”
정운은 인이예의 반문에 바로 답을 건넸다.
귀암로 암주의 제자란 신분은, 영역 내에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정운이었으니 너무도 당연한 대답인 것이다.
“거절…….”
“거절할 시, 마지막 조건에 위배되니 전원 몰살될 겁니다.”
척.
정운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은자림 주위의 대나무들이 쉴 새 없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사사사삭―.
“얼마나 데려온 거죠?”
인이예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 보며 물었다.
“한 사십 명쯤 될 겁니다.”
“겨우 그 인원으로 우릴 몰살시키겠다고요?”
“하하하. 충분히 오해할 만해요. 저들은 뒤처리를 할 겁니다. 제가 손을 쓸 테니까요.”
정운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인이예로서는 다소 의외의 반응이 아니었다.
자신이 은자림을 어떻게 접수했는지도 모르면서 저런 자신감을 드러낸다?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 살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 같았다.
“조금 전엔 처음 들어 보는 거래 조건이라 혼란스러울 수 있겠다 싶으니, 다시 한번 기회를 드릴게요. 제가 요구한 세 가지, 인정하시겠습니까?”
정운의 서늘한 눈빛이 인이예의 눈을 파고들었다.
“우격다짐으로 거래를 하시겠다고요? 듣기만 해도 손해인 거래를 왜 하겠어요? 뭐, 손해를 감수할 만한 대가를 제시해 준다면 달라지겠지만요. 인정 못 해요.”
인이예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