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불안해서 내뿜는 땀 냄새.’
꿈틀.
보고를 하려던 무무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혀졌다가 펴졌다. 은자림주의 전신에서 두려울 때 맡아 본 냄새가 풍겨 오자 입을 닫았다.
팔위 다섯의 표정도 무무와 다르지 않았다.
“삼십육주에겐 언제든 기관을 움직일 준비를 하라고 일러.”
곽서는 입 다문 팔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으나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스물일곱…….”
“서른여섯! 채워! 왜 삼십육주가 스물일곱이야!”
무무가 입을 떼자마자 곽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방 안을 넘어가면 안 된다고 늘 가르치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쿵!
곽서는 무무의 대답에 앉은 채로 발을 굴렀다.
“벌써 했어야지, 그동안 너무 편하게 지낸 게냐? 왜 이리 대응이 느려!”
곽서의 살기가 담긴 시선이 다섯 명의 팔위를 훑었다.
―살수의 기본은 평정심이다.
‘사자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무무는 곽서의 목소리에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에 대해 안 것이다.
하지만 누군지 팔위에겐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응이 느리다고 한다.
자신이 그동안 많은 중소 문파를 멸문시키며 봐 왔던 문주들의 모습과 곽서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내색할 순 없었다.
드러내면 그 순간부터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숨기면 죽는 순간까지는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기에 림주님을 저렇게 떨게 만드는 거지? 천문 쪽에서 뭐라고 연락했는지만 알아도 좋겠는데.’
***
꿀럭.
목이 반쯤 잘린 시체가 입으로 피를 뱉었다.
“나도 예전 같지 않네.”
“다치셨습니까, 태루주님?”
일월이 추영영의 힘 빠진 말에 바로 다가왔다.
“다쳐?”
추영영은 다가온 일월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방금…….”
“피 묻어서 그랬어. 전에는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다 죽였는데.”
추영영이 입을 일자로 늘이며 볼멘소리를 했다.
일월은 그 모습에 놀라워 눈만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저런 농담을 할 수 있는 추영영이 존경스러웠기 때문이다.
“일월, 지금 이예였으면 더 깔끔하게 처리했을 거라고 생각했지?”
“아, 아닙니다, 태루주님.”
“다 알아. 에고고, 삭신이야. 그래도 이 나이에 이 정도 시간에 처리했으면 잘한 거 아냐?”
‘자, 잘한 거…….’
일월은 추영영의 질문에 할 말을 잃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팔위 중 하나는 심장이 열십자로 찢겼고, 하나는 뒷골에 작은 구멍이 난 채 절명했으며, 마지막 하나는 목이 잘려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이런 살수를 펼쳐 놓고 잘한 거냐고 묻는 것이다.
“태루주님은 제가 모신 최고의 살수십니다.”
일월은 한 손을 가슴에 대고 머리를 숙였다.
씨익.
추영영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이내 몸을 일으켜 팔위들의 몸을 뒤져 연락 온 쪽지를 찾아냈다.
“아아, 이런 식으로 쓰는구나.”
뭔가 알아낸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추영영은 이내 팔위가 데려온 다른 살수들 근처를 뒤졌다.
“찾았다.”
“뭐가 있습니까, 태루주님?”
“전서구.”
추영영은 맛있는 음식이라도 본 것처럼 입맛을 다시고는 팔위들 몸에 있던 도구로 쪽지를 적었다.
[은영루가 맞음. 스물하나 모두 처리. 복귀함.
―귀조.]
무한으로 가서 인이예와 합류하려면 이틀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이 쪽지라면 반나절 정도는 벌어 주지 않을까?
추영영은 웃으며 아직 껄륵대고 있는 팔위의 숨을 끊어 주었다.
***
슥.
인이예는 동이 터 오자 돌멩이의 위치를 바꿔 놓았다.
달빛은 흡수해서 감추지만 햇빛은 발산시켜야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음?’
퍼져 있던 꽤 많은 인영들이 은자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촉이 왔다.
인이예는 돌을 일제히 튕겨 냄과 동시에 소리 없이 이동했다.
토끼 모양 지형의 머리 쪽으로 가는 것이다.
스스스―.
서늘한 바람이 은신하고 있는 인이예의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툭.
바닥에 좌우 대칭으로 적힌 기묘한 모양의 글자 정중앙에 돌멩이가 떨어졌다.
돌멩이 위로 하나 더.
인이예는 손바닥에 입김을 불고 위에 올린 돌멩이를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돌멩이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것 같더니 이내 탄환처럼 쏘아져 올라갔다.
파학!
돌멩이가 터지며 낸 소리였다.
끼― 꾸― 끄아―.
하늘을 청명하게 울리며 끼꾸가 울어 댔다.
십이월 열한 명이 곧 도착할 것이다.
***
‘뭘 하려는 거지?’
인이예가 대나무 숲 밖에 멈춰 서는 것을 본 소황선은 나서야 할지 지켜봐야 할지 고민됐다.
며칠 전, 외연 구선 향주가 다급히 자신을 찾아와서는 대뜸 약도 하나와 용연의 명령을 전했다.
은자림으로 가서, 은자림과 싸우는 여인을 보호해 주라는 것이다.
당연히 소황선으로서는 어떤 여인인지, 왜 도와줘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주모가 될지도 모를 분의 안위 문제입니다. 단주님께서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아, 무한에서 가장 가까이 계신 소 선림에게 연락드린 겁니다. 다급한 순간만 아니면 지켜보라고 하십니다.
주모라니.
이 대 단주는 단원들과 달리 시간도 필요할 때마다 쪼개서 쓰는 능력을 가진 모양이다.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단주의 명령인 만큼 전속력으로 움직여 도착한 지 반 시진이 채 되지 않았다.
상황은 구선이 왜 그리 서둘렀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조용했다.
은자림과 싸운다면 살수일 테니 밤까지는 시간이 있을 거라 여기고 잠시 쉬려 할 때였다.
한 여인이 기척도 없이 다가오더니 대나무 숲 밖에 멈춰 서는 것이 아닌가?
혼자였다.
백 명에 달하는 살수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홀로 상대하려는 것인가?
솔직히 여인의 당당함에 감탄했다.
그러나 고개를 든 여인의 얼굴을 본 순간, 소황선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여인의 얼굴은 가히 이 세상의 미모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구선이 왜 그리 서둘렀는지 확, 이해가 됐다.
그러나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멈춰 선 여인이 갑자기 돌멩이 하나를 던지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끼― 꾸―.
매가 여인의 부름에 답하듯 울었고, 사방에서 검은 옷을 입은 인영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열한 명.
여인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진 못하지만 꽤나 은밀한 움직임들이었다.
‘부숴 줄까?’
소황선은 대나무 숲에 펼쳐진 진을 제거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지켜만 보라는 용연의 명령이 있었기에 애만 태웠다.
***
인이예는 대나무 숲 앞에 앉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바쁘게 손을 놀렸다.
진법에 대한 이해가 아무리 높아도 작정하고 닫아 버린 경우는 뚫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 시진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바닥에 이리저리 배치해 두었던 돌멩이 하나가 대나무 숲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됐다.”
인이예는 화사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열한 명의 십이월은 순간적으로 눈부시다는 생각을 했다.
인이예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온 착각을 한 까닭이다.
‘어떻게 잠입할지 고민하시는 줄 알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고안하셨어. 그 짧은 시간에.’
이월은 인이예와 함께 하는 여정 동안 진정으로 따르게 됐다.
현 은영루주라 따르는 따위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똑똑함과 판단력에 저절로 그런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루주님, 설마 조금 전에 그 돌멩이처럼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시겠다는 건가요?”
칠월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니. 다 같이 한 번에 들어갈 거야. 이월, 이리 와.”
인이예는 이월을 안은 채 열한 명에게 위치를 알려 주었다.
마지막으로 시월이 자리에 선 순간, 열두 명의 모습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
“어?”
소황선은 인이예의 소꿉놀이 같은 행동을 웃으며 지켜보다 놀라서 사라진 자리까지 단번에 뛰어내렸다.
더듬더듬.
인이예와 열한 명의 여인이 모여 있던 공간을 빙 돌며 손을 뻗어 봤으나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땅 역시 마찬가지였다.
“곤란해, 이러면 곤란해.”
소황선은 당황해서 혼잣말을 하다 힐끗, 위쪽을 올려다봤다.
은자림의 지형인 토끼 모양의 머리 부분 위로는 기암절벽이었다.
서둘러야 했다.
***
인이예와 열한 명의 십이월은 엄청난 속도로 대나무 숲을 관통해 갔다.
‘이대로 바깥으로 나가 버리면 반 시진 동안 노력한 보람이 사라지지.’
인이예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앞을 노려보다 한순간, 안고 있던 이월을 옆으로 밀쳤다.
이월이 대열을 벗어나며 놀란 눈으로 인이예를 쳐다볼 때, 다른 열 명의 십이월도 튕겨나가듯 흩어졌다.
“쉿. 이제부터 저기 저 전각으로 갈 거야. 되도록 부딪치지 말고 내 뒤를 맡아.”
열한 명의 십이월이 정신 차릴 시간도 주지 않고 인이예는 먼저 움직였다.
핏.
대나무 숲을 막 벗어나는 순간, 인이예의 양쪽 소매 속에서 침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힐끗.
이월은 인이예를 쫓아가다 뒤를 돌아봤다.
십여 개의 대나무가 혈죽(血竹)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미 적들의 위치를 안에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