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림단주-164화 (164/232)

164화

용연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하나로 정리된 까닭이다.

인이예의 소식 때문에 미루고 나눴던 일들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예 매에 대한 생각에 꽂혀서 연계 가능한 두 세력을 놀릴 뻔했어. 왜 사야벌과 여우락을 다음으로 미뤄야 하는 거지? 그럴 필요 없다.”

용연은 환하게 웃으며 아무도 없는 공간에 대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순서를 정하려 했다.

매번 자신이 그 장소에 있어야 될 것 같은 불안함에 기인한 탓이다.

혼자서 다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지금도 습관처럼 하나씩 처리하려 했던 것이고.

인이예의 뒤에, 비류의 뒤에, 담영호의 뒤에는 반드시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야 <이선 암중인>의 저자처럼 행동한 것과 뭐가 다를까?

절레절레.

머리를 털 듯이 고개를 저었다.

―습관으로 굳어진 생각이나 행동은 잘 바뀌지 않는다.

많은 책에 나와 있던 글귀였다.

‘상황은 같아. 그럼 이전의 습관이 잘못임을 알게 된 지금! 바꾸면 돼. 다른 생각, 다른 행동으로 이전의 습관을 덮어 버릴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버릴 거야!’

한 가지씩 해결하려 하지 말고, 같은 비중의 다른 일들도 같이 살필 것이다.

시야를 지금보다 더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부로 새겨야 하는 습관 하나를 만들었다.

***

용연의 새로운 습관은 변화를 갖고 두 곳으로 날아가 내려앉았다.

[사야벌을 자극해 벌주를 숨어 있는 곳에서 끌어낼 것. 투신께서 내린 명령이네.

―묵.]

전서구로 전해진 쪽지를 본 비류는 의제 셋에게 건네주었다.

“벌써 시작하는 겁니까, 대형?”

“호법 하나는 제가 작살낼 겁니다.”

“원앙각과 금강각은 제가 구슬리지요.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알아들을 겁니다.”

세 의제는 의욕이 가득한 눈빛으로 한마디씩 꺼냈다.

“시작하자.”

비류는 용연의 명령이란 글을 보자마자 폭발하듯 일어난 열정 때문에 가슴이 벅차올라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용연에게 받은 진짜 선물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자신감.

세 의제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인지 보구에서 흘러나온 은은한 빛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

[귀암로의 은자림이 은영루와 싸우는 중이고, 사야벌은 곧 낭협이란 곳이 흔들기 시작할 것임.

청허루를 통해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한류천주 계무가 여우락 십호법을 군림단에서 처리해 주길 바란다고 한다.

담영호 선림은 여우락 ‘십호법’을 제압해서 한류천주 계무와 만나도록 하라.

귀암로 여섯 축 중 네 곳을 흔들 수 있는 기회니, 동원 가능한 숫자를 대동하길.

한류천에 큰 피해를 입혀 십호법의 여우락 내 영향력을 높이고, 한류천주는 다른 일에 쓸 수 있게 살려서 돌려보내라.

―군림단주.]

씰룩.

담영호는 날아온 서찰을 읽고 입가를 비틀었다.

용연이 명령조로 글을 쓰며 곤란해 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힐끗.

침상에 풀어진 나삼과 나른한 자세로 엎드린 남궁산산이 눈에 들어왔다.

십호법이 될 사람이다.

철썩.

“악! 담 랑, 왜요?”

남궁산산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뒤를 돌아보고 엉덩이 한쪽이 붉은 손바닥 모양으로 부풀어 있자 울먹이는 표정으로 담영호를 쳐다봤다.

“반항할래? 이 정도로 제압당할래?”

“예?”

“더 아프게 해 줘?”

“아뇨! 저는 담 랑에게 제압당했어요. 이것 보세요, 항복이에요, 항복.”

남궁산산은 침상에 배만 댄 채 양손과 양발을 모두 들어 올렸다.

배시시.

눈에는 눈물이 글썽하지만 얼굴에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가자.”

담영호는 옷가지를 들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어, 어디로요?”

“한류천주 계무 만나러. 널 데려오라고 했대.”

“예? 누가요?”

남궁산산은 갑작스러운 담영호의 행동에 놀랐으나, 일단은 쫓아가야 놓치지 않기에 얼른 따라나섰다.

***

[두 개의 서찰, 모두 잘 전달됐다고 합니다.

낭협 쪽은 삼십육무투를 투입시켜 낭인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지원할 계획이고, 여우락 쪽은 담영호 선림이 알아서 할 테니 지켜보기만 할 생각입니다.

한 가지, 한류천주 계무에게 개인적인 빚이 좀 있어서 받아 내려고 합니다.

한류천의 전신인 하오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대부분 구세력이라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들을 삼정일사회로 흡수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계획은 인 소저 일을 마무리 지으신 뒤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추 태루주님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팔위 중 셋을 끌어내 천문에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합니다.

은자림주의 직속인 팔위와 삽십육주가 몇이나 남아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회원들 능력으로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묵 회주.>

탁.

용연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화자에게 전해 준 묵 노야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막 주루의 주렴을 걷고 나가려 할 때였다.

“이제 사야벌 얘기할 차롄가?”

걸걸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용연 역시 사야벌이란 말에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아 왜, 그 비류 대협 기억 안 나? 몇 년 전인가 사천성에 세 각주 모두 모였던 적 있잖아? 그때 비류 대협 혼자서 낭인들 전부 데리고 갔던 일 기억 안 나?”

“기억하지, 기억해. 솔직히 사야벌에 비류 대협 빼면 누가 있냐.”

“그때 우리 박수 치고 좋아했잖아.”

일행들이 호응을 하자, 걸걸한 목소리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듣고 있던 사람들의 귀를 울리는 박수 소리가 터졌다.

짝! 짝!

“비류 대협이 아니라, 이젠 비류 협주라고 해야 합니다. 허허허.”

화자가 박수를 쳐 준 사내에게 고맙다는 손짓을 했다.

“협주? 대협이면 대협이지, 협주는 뭐야?”

“에헤이, 뭘 만드신 거지.”

“아, 그런 건가?”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사야벌 십이호법과 벌주가 낭인 출신이 아니란 건 다들 아는 사실일 테니 넘어가고. 이건 어떠신가요? 비류 협주에게 낭인왕이 남긴 신물 네 가지가 있답니다.”

화자는 손가락 네 개를 들어 보였다.

그러자 사람들 눈이 커지며 서로 묻기 바빴다.

“신물? 그런 게 있어? 자넨 알고 있었어?”

“낭, 낭…… 뭐라는 물건이 신물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웅성거림이 이어지도록 화자는 흐뭇하게 웃으며 지켜봤다.

촤라락.

용연은 주루를 나서며 하늘 저쪽을 쳐다봤다.

비류에게 맡긴 일은 잘 진행되는 모양이다.

이제 인이예에게 달려갈 일만 남았다.

‘구 향주, 부탁해요.’

혹시라도 자신이 늦게 될 경우를 대비해 구선에게도 연락을 해 놓았다.

***

퓨풋.

빛을 먹는 암기, 흑섬(黑纖)이 날아갈 때마다 쫓아오거나 은신하고 있는 자들이 죽어 나갔다.

은자림의 형태는 대나무 숲으로 두른 토끼 모양이고, 허리 부근의 중문을 통해서만 위아래로 오갈 수 있는데, 팔위와 삼십육주는 위쪽에 상주하고 나머지는 아래쪽에 머물며 명령을 받고 움직인다고 했다.

인이예는 토끼 모양의 발 쪽을 향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월, 거기까지.”

명령이 떨어지자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무복을 입은 열한 명의 여인들은 경계를 풀고 등을 맞대며 인이예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슬슬 나타날 거야. 흩어져서 신호를 줄 때까지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 둬.”

인이예는 근처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들어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고는 토끼 모양의 머리 부분을 콕 찍으며 말을 이었다.

“신호는 여기서 줄 거야.”

인이예가 가리킨 곳을 확인한 열한 명의 십이월은 예를 갖춘 뒤, 검은 해바라기가 펼쳐지듯 빠르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홀로 남은 인이예는 발끝으로 슬며시 몇 개의 돌을 건드리듯 찼다.

툭.

조금 위로 하나 더, 우측 옆으로.

‘달빛을 흡수하도록 감(坎) 괘의 위치에 삼 푼, 이(離) 괘에는…….’

총 여덟 개의 돌을 달의 위치에 따라 진을 형성하자, 인이예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이내 모습을 감췄다.

간단하지만 언제나 큰 효과를 내 주는 진법이다.

몇몇 은자림 살수들이 지나가겠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자신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음을 알 리 없을 것이다.

인이예는 반쯤 눈 감고 호흡을 평소의 삼분지 일 정도만 사용하며 몸의 온도를 낮추어 갔다.

한 시진 정도 지나자, 십여 장 밖에서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척도 없이?’

인이예는 나타난 인영의 조용한 움직임에 놀랐다.

모습을 드러낸 뒤에야 알게 될 정도로 상당한 훈련이 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끊겼어. 왜 여기지?”

혼잣말을 꺼낸 인영은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옷을 몸에 딱 붙여서 소리를 죽이고, 입과 코로 나오는 온기도 가리고, 눈썹이 없는 것을 보니 털까지 모두 제거한 것 같네. 누구지? 팔위 중 한 명일까?’

인이예는 심장박동을 유지한 채 나타난 인영의 신분을 추측해 갔다.

“……은영루는 아니라고 하셨지만…….”

인영은 혼잣말을 이어 가며 땅과 공기 중에 남아 있는 냄새까지 추적할 것처럼 세밀하게 공간을 파악해 갔다.

뚝.

한순간, 인영이 움직임을 멈췄다.

‘감이 좋네.’

인이예는 인영이 자신의 바로 앞에 멈춰 섰음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멈춰 선 이유가 자신과 무관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무(無無), 자네도 이곳으로 왔군.”

먼저 나타난 인영과 같은 곳으로 또 다른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무라 불린 자와 달리 잘 벼린 칼날과 같은 기운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자였다.

“인일(刃日), 곧 간다.”

‘둘 다 팔위군.’

인이예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팔위가 어느 정도 급의 살수인지 알 것 같았다.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목표가 근방에 있는 것처럼 조심하고 있었다.

이들을 죽이려면 십이월 중 한둘은 잃어야 할지도 몰랐다.

“천문 쪽에서 연락이 왔다고 모이라신다.”

“가지.”

‘사부님이 벌써 움직이신 건가? 그럼 조금 여유를 가져 볼까?’

인이예는 여전히 발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지는 둘을 보며 입가에 웃음을 묻혔다.

추영영의 안위?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인이예에게 턱없이 부족한 경험을 은영루주로 이십 년 가까이 지내 오며 다 겪은 분인 까닭이다.

현 강호에 추영영이 죽이지 못할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으나, 추영영을 죽일 수 있는 사람? 장담하건데, 없다.

금룡상단으로 스며든 이후 단 한 번도 추영영을 추적해 온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추영영의 흔적 지우는 능력은 탁월했다.

시간을 조금 더 번 것 같다.

***

촤라락.

흑갈색 얇은 갑옷을 몸에 두른 후 양쪽 어깨 위로 고정시켰다.

팔뚝과 어깨에는 또 다른 갑옷을 착용하고, 사타구니에도 불룩 튀어나온 가죽 속곳을 입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수투(手套)까지 꼈다.

“어디까지 왔다고?”

오십 대 중년인은 살짝 나온 배를 아래로 밀며 말끔하게 관리한 수염과 눈썹을 흔들었다.

은자림주 곽서.

팔위들에겐 가히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여겨지는 존재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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