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거저예요, 거저!”
이마에 건(巾)을 두른 이십 대 청년이 좌판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산에서 직접 캔 약초와 뿌리 등을 펼쳐 놓고 있는데 영 인기가 없었다.
“밥은?”
청년 옆에서 마의(麻衣)를 파는 사십 대 중년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판 게 있어야 먹죠. 헤헤.”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쯧. 가서 소면 한 그릇 먹고 와. 내 앞으로 달아 놓고.”
“그, 그럼 잠시만 봐주시겠어요?”
청년은 반색을 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좋은 일을 해서 그런지, 청년이 객점에 들어가자마자 이십 대 여인이 다가왔다.
“열 벌 주세요.”
“누가 데려갈지 복이 터졌네, 터졌어.”
중년인은 얼른 마의 열 벌을 접어 여인에게 건넸다.
“이런, 이건 제일 나중에 샀어야 하네.”
여인은 마의를 받으려다 아미를 찡긋했다.
“이제 장 보실 참이시구나…….”
“예. 혹시 저 골목 안에다 가져다줄 수 없을까요? 셈은 지금 할게요.”
“자리 비우기가…….”
중년인은 여인이 가리키는 골목을 힐끗 쳐다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다녀오실 동안 제가 기다리면 되지 않나요?”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정조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에 중년인은 아주 잠시 떠올렸던 의심을 떨쳐 냈다.
“금방 다녀오리다.”
“감사해요. 안으로 들어가면 더벅머리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더벅머리.”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이곤 마의 두 벌을 갖고 골목으로 달려갔다.
피식.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여인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걸음을 옮겼다.
우뚝.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중년인, 오수(五手)는 멈춰 서서 양손을 늘어뜨렸다.
“감각은 좋네.”
안쪽에서 더벅머리 사내 대신 여인의 청아한 목소리가 오수를 맞아 주었다.
오수는 여인이 살수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살수인 것 같은데, 목표를 잘못 정했으니 손목 하나 남기고 가라.”
여인이 자신의 말대로 할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반응을 살피기 위해 경고했다.
그러는 중에도 눈동자를 빠르게 사방으로 굴렸다.
오수의 분위기는 이미 살수의 그것이었다.
“은자림 삼십육주 중 하나인 오수. 특기는 손이 다섯 개? 호호호. 그럼 세 개는 없어도 괜찮겠다.”
‘여자. 내게 접근했던 여자도 한패. 여자로만 구성된 살수 조직. 갑자기 등장했을 리 없으니 예전부터 존재해 온 곳.’
오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살수 조직들을 빠르게 떠올려 봤다.
“하나.”
여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색 선이 오수의 손가락 하나를 지나갔다.
팟.
“어?”
오수는 저 백색 선이 자신의 오른손 중지를 잘랐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땅에 닿기 전에 받으려 몸을 굽혔다.
순간, 위에서 비수 두 개가 오수의 등에 꽂혔다.
퍼벅.
“다음은 누구지?”
비수를 던진 여인이 내려섰다.
“팔위 중 한 명인 미파(美琶).”
오수에게 말을 걸었던 여인이 머리칼을 헝클어뜨리자 골목 안에 퍼져 있던 은잠사가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수가 골목 안으로 들어온 순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두 여인은 이내 골목을 떠났다.
꿈틀.
‘향기가 사라졌어.’
오수는 심박수까지 조절하며 무려 일각 가까이 죽은 척하며 버티다 누운 상태로 간신히 일어났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그러나 여인들에 대해 알려야 했다.
“팔월, 미파에게 갈까? 사신에게 갈까?”
은잠사를 머리칼처럼 사용하는 여인이 오수가 골목을 벗어나는 것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어느 쪽이든 삼월과 사월이 알아서 할 테니 칠월은 신경 꺼.”
비수를 사용하는 여인, 은영루 십이월 중 팔월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데.”
“루주님께 말씀드려 봐. 루주님도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미시잖아. 아마 칠월의 은잠사를 가닥가닥 끊어서 실타래로 사용하시지 않을까?”
“충분히.”
“오월이 쫓아가네. 돌아가자.”
“그래.”
칠월은 대답만 하고 눈으로는 오수의 뒤를 좇았다.
***
“삼십육주 중 열둘의 위치가 파악돼서 바로 움직였어요. 십이월을 시켜 셋을 죽이고, 셋은 살려서 팔위나 다른 삼십육주를 찾아가게 했어요.”
인이예는 십이월의 보고를 받자마자 탁자 전체에 그려진 지도에 색칠한 돌을 올려놓았다.
“현재 은자림주는 포사(褒死)라고 하더라. 육십도 넘은 노인이 욕심도 많아.”
“포사!”
추영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인이예가 놀란 눈으로 돌아봤다.
포사란 별호를 듣자마자 유명한 서너 가지의 일화들이 떠오른 까닭이다.
구대문파 일대제자의 암살, 같은 귀암로 여섯 축의 핵심 인물 암살 등.
“놀랄 것 없어. 포사 전에 사용했던 별호는 영인(領印)이고, 이름은 곽사야. 알지? 십일 년 전에 전 림주를 암살하고 자리에 올랐대.”
“아! 그래서 대처가 매끄럽지 못한 거였군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고상이 살인은 잘해도 사람은 못 다룰 테니까.”
“직접 처리하시려고요?”
“네가 직접 팔위 중 넷 정도 처리해. 십이월에게 걸리지 않은 나머지 팔위와 삼십육주 들은 알아서 숨을걸?”
“사부님, 역할이 바뀐 거 아녜요?”
“지금 역할이 중요하니? 들어 봐. 지금은 직접 나서지 않고 있지만 고상보다 더 영향력이 강한 노인 셋이 있어. 삼살이라 부른다고 하네? 그들 앞에서 고상의 목을 벨 거야.”
“그 일까지 하시겠다고요?”
“아니, 더 있어.”
“예?”
“들어 보니 삼살은 고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살수답게 원칙대로 운용하려고 했대. 아무튼, 나는 삼살과 적당히 타협점을 찾을 거야. 그들 말대로 다 해 주겠다고 하면 되겠지. 그리고 팔위와 삼십육주 중 살아남은 자들 앞에서 삼살이 새 은자림주를 발표하려는 순간, 그들을 죽이는 거지. 그리고 팔위 중 한 명에게 은자림주 하라고 하고 복귀. 어때?”
“너무 좋은데요?”
인이예는 손뼉까지 치며 활짝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상단주님 곁을 떠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만들어 낸 일석이조 계획이야. 내가 생각해도 완벽해. 호호호.”
추영영은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자신의 말에 허점을 콕콕 찌르기만 하던 인이예가 두 손을 든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통쾌해서 목젖까지 드러내며 웃었다.
“한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일월을 데리고 가세요.”
“혼자가 편……해도 루주의 부탁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추영영은 홀가분하게 움직이고 싶었으나, 인이예가 고집 부리기 전의 얼굴을 하고 있어 거절할 수 없었다.
“일월, 사부님 모시고 무한(武漢)으로 가. 사부님, 저는 그럼 천문(天門)으로 가서 팔위 중…… 셋만 부를게요.”
“어머, 우리 이예가 달라졌네? 기특해, 기특해!”
추영영은 인이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도 효도란 걸 해야죠.”
“어머! 어머! 지, 지금 효, 효도라고 한 거야? 어머!”
“사부님은 제게 엄마와 마찬가지세요.”
인이예는 추영영을 꼭 안아 주며 뒤에 있는 일월을 쳐다봤다.
일월은 그 눈빛의 의미를 알겠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태루주님, 마차에 오르시지요.”
일월은 마차 앞에 서서 머리를 숙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추영영은 잊었다는 듯 마차에 오르다 말고 일월을 돌아봤다.
“루주님이 무한으로 모시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야지.”
‘설마…….’
일월은 추영영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오르며 불안한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너무 똑똑해서 우쭐댈 게 없어. 그렇지 않아, 일월?”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쫄 거 없어. 팔위 셋이면 일월 혼자서 해치울 수 있잖아?”
“예?”
“뭐야, 그런 배짱도 없이 날 천문으로 데려가려 한 거야?”
“…….”
꿀꺽.
일월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최대한 빨리 해치우고 무한으로 가자. 아직 루주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게 있어.”
추영영은 일월을 보고 풋, 웃고는 아미를 찡그렸다.
은자림을 장악한 뒤, 한 번 더 거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왕 사도천이 돈줄 중 하나인 은자림을 그냥 넘겨줄 리 없다.
‘셋 중 누가 오려나.’
추영영의 머릿속에 세 명의 이름이 떠올랐다.
사도천의 첫째 제자 정운, 둘째 제자 명진, 셋째 제자 염일.
귀암로의 여섯 축 중 두 개씩 맡아 관리하는 이름들이었다.
***
―……인 소저가 은자림주를 죽인다고 해도 완전히 장악할 순 없을 겁니다. 틀림없이 암주의 첫째 제자인 정운이 귀암로 암주를 대신하는 사자로 찾아갈 테니까요.
용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묵 노야가 알려 준 정보였다.
‘귀암로.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힌 세력이었어. 담 선림이야 암주의 제자들과 만나도 걱정이 안 되지만, 비 협주와 세 사람은 곤란해. 거래로 이루어진 관계다? 포장일 뿐이야. 그렇게 해야 사도 암주의 강력한 무력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위안을 가질 테니까.’
용연은 묵 노야의 설명에 귀암로 암주 구왕 사도천이란 사람을 한 번 만나 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읽은 강호삼대세력에 대한 기록들에는 귀암로의 조직력이 철혈사자맹과 사혈명에 비해 약한 것처럼 적혀 있었다.
[귀암로를 지탱하는 힘은 여섯 축에 있고, 그중 한 곳이라도 무너지면 모래성처럼 알아서 해체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철혈사자맹과 사혈명은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귀암로를 이용할 뿐, 동등한 위치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언뜻 떠올린 글귀만 해도 벌써 두 개다.
당연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구왕 사도천은 왜 저런 말들이 퍼지도록 내버려 둔 것일까?
왜? 왜? 왜?
자꾸만 듣지 못할 질문을 던져 댔다.
언젠가부터 버릇처럼 갖게 된 방식으로, 뭔가를 파고들 여지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저절로 입에 달라붙는 한마디였다.
―스스로를 약해 보이도록 방치시키는 것도 생존을 위한 훌륭한 전략이야.
불쑥, 만승서고의 종 노야가 해 주던 말이 떠오른다.
상황 대처 훈련이라 이름 붙였던 놀이 중에 해 주었던 말로 기억된다.
그때, 공부하라고 건네준 책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책 하나.
[이선 암중인]
한 걸음 뒤에 선 자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자와의 싸움에 대한 기록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글귀는,
[그들만 봤어도…….
그들의 정체만 알았어도…….
그들이 자신을 내버려 두기만 했어도…….
제길.]
한 걸음 뒤에서는 목표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어둠 속이라면 목표와 그 목표를 둘러싼 환경까지 모두 볼 수 있다.
책을 읽을 때 용연은 왜 그 간단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왜 다른 요인 탓으로 돌리려 했던 것일까?
‘이제야 이해가 되네.’
이선 암중인이란 기록을 쓴 저자는 목표의 한 걸음 뒤에 서는 습관을 끝내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습관?
우뚝.
용연은 달리던 걸음을 멈춰 세우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보고도 의식하지 않고 지나치던 많은 것들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길과 방향만 눈에 담았다가 그 주위까지 모두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마구 떠올랐다.
아직 무한까지 가려면 오 일은 더 걸린다.
“비류 협주와 담 선림에게 연락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