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조용히 듣기만 하던 담영호가 나섰다.
이대로 지나가면 언제고 일이 꼬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이죠, 담 선림. 말씀하세요.”
“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 제 다른 주머니는 묵성자입니다.”
“음.”
용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묵성자란 이름은 분명 놀랍기는 하지만, 굳이 말하지 말라는 데도 한 이유가 궁금한 까닭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말씀드립니다.”
“크크크. 흑천입니다. 담 선림도 알아 두고.”
몽외도 말을 보탰다.
‘한 번쯤은 부딪쳤다가 떨어졌으면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용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담영호의 묵성자와 몽외의 흑천.
생각을 바꿔야 할 모양이다.
큰 피해 없이 부딪쳤다가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부딪칠 상황을 만들지 않는 쪽으로.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오면서 묵성자의 부탁으로 처리한 일이 있는데, 대가로 귀암로 여우락의 호법 자리 하나를 받게 될 것 같습니다.”
“여우락요? 도대체 어떤 일을 처리하면 그런 거래가 가능한 거죠?”
용연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한 번이 아니라 그동안 누적된 거래가 있었습니다. 저는 필요한 정보를 얻고, 그들은 제거하고 싶은 자를 의뢰하고. 이번 일 같은 경우는 정보가 부족해서 말리는 걸 해치웠지요. 백궁천이란 자를 처리해 달라는 의뢰였습니다.”
“강조단장 백궁천을 말하는 건가요?”
“아는 자인가요?”
담영호는 용연이 정체까지 알고 있자 놀라서 쳐다봤다.
“그자의 부하들과 만난 적이 있어요.”
‘설마!’
담영호는 백궁천이 말하던 ‘젊은 놈’의 정체가 용연일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몸에 지니고 있던 기보가 네 부하들 몸에 박아 넣은 것들을 튀어나오게 만든 건가?
자신이 백궁천에게 했던 말이었다.
담영호의 시선이 용연의 손목으로 향했다.
소매에 가려져 응아린은 보이지 않았다.
응아린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북리란 도적패를 찾아갔는데 강조단의 무리들에 섞여든 상태였어요. 강조단이란 무리는 정상이 아니더군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강해지기 위해 뼈를 부러뜨리고 살을 찢다니.”
용연은 말을 하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단주님이셨네.’
“백궁천이 그러더군요. 부하들의 몸이 찢겨진 채로 몸에 박아 넣은 것들을 갖고 왔다고요.”
“죽는 것보다, 본인들 몸에 넣은 물건들이 얼마나 하찮은 건지 알길 바랐어요. 그렇게 빨리 움직일 줄 알았으면 마무리짓고 올 걸 그랬네요. 담 선림, 고생했어요.”
“여우락이 필요할 때 말씀해 주시면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담영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묻힌 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후임 용연의 모습을 잠깐이나마 볼 수 있어 좋았다.
“귀암로. 만만한데요?”
용연은 눈을 빛냈다.
“그런데…… 손해 보는 기분이 들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현승 선림은 왜 놀리시는 겁니까? 저기, 너무 편한 자세로 쉬고 있네요?”
꿈틀.
몽외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힐끗, 뒤를 돌아보며 불만을 드러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
“……현 선림이 돌아보네요. 단주님과 무슨 얘길 나누나 궁금하신 것 같습니다.”
담영호는 몽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나섰다.
몽외는 현승과 비교당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 크크크. 현 선배도 참.”
거짓말처럼 몽외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용연은 담영호에게 엄지를 들어 주었다.
***
“기에게서 연락은 왔느냐?”
문사모 아래 양쪽 구레나룻이 어깨 바로 위에서 흔들렸다.
각진 얼굴과 또렷한 이목구비의 사십대 사내, 오행각주 모용진은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모용현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아직은 일이 터진 곳들만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모용현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다고?”
“섬서성 북단 쪽입니다.”
“섬서성? 강남 쪽에 네 군데인가 사건이 터졌다고 하지 않았느냐?”
“……강조단장 백궁천이란 자가 부하들 수십 명과 함께 피살돼서 살피는 중이라고 합니다.”
“강조단?”
모용진의 시선이 처음으로 모용현에게로 향했다.
“산서성에서 활동하는 마적과 도적 들을 모아…….”
“몸을 개조해서 강해지려는 것들이지. 동 각주 쪽은 왜 이리 조용하지? 한번 알아봐.”
“예, 각주님.”
모용현은 대답을 하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궁주님께서 군림단 관련 일로 부르실 줄 알았는데 너무 조용하다. 괜히 헛물을 켜고 있는 건 아닌가?’
모용진은 상체를 의자에 기대며 인상을 썼다.
묘용기는 군림단에 대해 잘 아는 것 같다고 해서 불렀더니 엉뚱한 곳이나 쑤시고 다니고.
이대로는 호원의 부름을 받는다고 해도 다른 각주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긴 힘들었다.
***
‘직접 확인할 전서구가 있는 건가?’
모용현은 푹풍각으로 가다 판영필의 바쁜 걸음을 보고 뒤를 밟았다.
일각 이상 구분된 구획을 살피던 판영필이 관리하는 공 노인에게 뭐라고 말을 하더니 떠났다.
“공 노야, 판 선번주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모용현은 일부러 공 노인이 아니라 노야란 호칭을 붙여 주었다.
“노야라니, 당치 않습니다. 기다리는 전서구가 있는데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요.”
“어디서 보낸 건데요?”
“그건 모르고, 도와 도끼가 교차된 표식이 달렸을 거라고만 했습니다요.”
‘도와 도끼?’
모용현은 이채를 발했다.
***
“잠깐 비운 사이에 많이도 와 있었네. 어디 보…… 음? 여 교림님, 국 교림님, 이리로 와 보세요.”
잠사우는 열흘 사이에 들어온 전서구로 비좁아진 틀을 열고 한 마리씩 꺼내 살피다 여벽과 국진세를 불렀다.
[여우락 십호법 사(死).
―천(川).]
“여우락이라.”
국진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잠사우와 여벽을 돌아봤다.
“우리가 군림단인 것을 아는 거죠. 군림단의 손을 빌려 여우락의 십호법을 죽이려는. 후후후.”
여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우린 더 이상 삼정이 아니잖습니까? 의견 나눌 시간에 진 대교에게 알리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국진세와 여벽이 웃자, 잠사우는 손사래를 치며 진류에게 보낼 전서구를 챙겼다.
그 모습에 국진세와 여벽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이었다면 심각하게 토론을 벌였겠지만, 지금은 이 상황조차 재미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
[한류천에서 여우락 십호법을 죽여 달라는 요청을 보내왔음. 전에 하던 대로라면, 교림 중 한 명을 처리하는 조건으로 허락을했을 것 같음.
―청허루.]
“아! 이이제이(以夷制夷)!”
진류는 세 교림이 왜 ‘전에 하던 대로’라는 말을 적었는지 의아해 몇 번을 더 읽어 보다 탄성을 터트렸다.
한류천은 군림단의 손을 빌려 여우락을 치고 싶은 것이다.
“단주님과 담 선림에게 알려 줘야겠군.”
서찰을 쓰는 진류의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들어온 정보를 군림단 내에서 처리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
진류가 보낸 서찰은 곧 용연에게 전해졌다.
“한류천에서 군림단 손을 빌리고 싶다는군요.”
서찰은 용연이 손으로 몇 번 비비자 재가 됐다.
“흘흘. 계무가 잔머리를 자주 쓰긴 합니다, 투신.”
앞에 앉아 있던 묵 노야는 한류천주를 떠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 잔머리를 역이용할 계획 같은 건 없을까요?”
“당연히 있지요.”
묵 노야는 주저 없이 대답하고는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말을 이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대비해 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계무가 그런 요청을 했다는 것은, 군림단의 무력을 어떤 식으로든 접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시 묵 회주님.’
용연은 묵 노야에게 담영호가 강조단장 백궁천을 처리한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로 핵심을 뚫고 들어온 것이다.
“여우락을 노리는 계무로선 이번 요청으로 여러 가지를 재보고 싶을 겁니다. 군림단의 무력, 여우락의 허술한 응집력, 다른 세력들의 반응까지. 어리석은 잔머리의 한계지요. 흘흘.”
“한발 물러나서 재보려는 조건들이 오히려 본인을 덮치게 만들면 재미있겠는데요?”
“그겁니다!”
용연의 말에 묵 노야는 탁자를 치며 좋아했다.
“그럼 여우락과 연대를 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투신. 군림단이 여우락 호법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을 먼저 퍼뜨리는 겁니다. 그리고…… 적당히 밀고 당기기를 벌인 후, 군림단과 여우락 호법이 모두 계무를 향하도록 하는 거죠.”
“그럴 바엔 처음부터 한류천으로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판이 너무 작지요. 판은 키워야 합니다. 군림단은 강호의 이목을 끌고 가고, 여우락 호법은 나머지 호법들을 선동시켜 합류하게 만드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투신?”
묵 노야는 자신의 계획이 마음에 드는지 작은 눈을 반짝이며 용연을 쳐다봤다.
“멋지네요.”
용연은 만족한 표정으로 묵 노야의 손을 잡았다.
“이제 인 소저를 만나러 가실 겁니까?”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인 소저 때문이구나.’
용연은 묵 노야가 계무 때문에 본론을 꺼내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뵙자고 청한 이유가 인 소저 때문입니다.”
“……아니죠?”
“인 소저의 신변에는 아직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아직?”
“인 소저가 안와산에서 죽은 열네 명의 복면인 중 한 명이 은자림 살수란 것을 알고 무척 화를 냈다고 합니다.”
“설마 은자림과?”
“은영루의 입장에서 보면, 은자림은 떨어져 나간 지류에 불과합니다. 그런 곳에서 투신을 노렸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태루주님이 알려 줬군요.”
“……하나뿐인 제자이자 현 은영루주이니 저를 통해 투신께 알려지길 바랐겠지요. 너무 놀라지 말았으면 한답니다.”
“……예?”
“내용은 제게 보낸 것이고, 마지막 한 줄만 투신이 읽었으면 한답니다.”
묵 노야는 옆에 접어 놓은 서찰을 용연에게 건넸다.
[이예가 평소에는 조신하고 착한데, 마음을 준 사람 일에는 물불을 안 가려요. 소문은 항상 과장되기 마련이니 우리 용 단주께선 가려서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은자림과 싸운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용연은 이 심각한 글에서 왜 추영영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지 몰랐다.
“인 소저나 추 태루주님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혼내는 정도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알아봐 주세요, 회주님.”
“제 역량 밖의 일이라 뵙자고 청한 겁니다.”
“그럼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서찰을 보내신 거야. 은자림을 장악한 후에 암주의 사자와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는지 모르겠군.’
묵 노야는 추영영의 서찰을 받고 많이 놀랐다.
서찰 한 통으로, 인이예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포용하는 한편, 용연으로 하여금 지켜보기만 하게 선을 그어 놓은 것이다.
그 사부에 그 제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귀암로 암주 구왕 사도천.
그는 결코 쉽게 볼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