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하남성 서평(西平). 단주님 호출.]
남궁산산에게 돌아가는 중에 담영호는 기다리던 쪽지를 받게 됐다.
***
‘폭포?’
담영호는 서평에 도착하자마자 외연 구선 향주에게 연락했고, 외부 식구가 마중 나와 이곳까지 안내해 주었다.
시원하게 뻗어 내려오는 물줄기 우측에 교림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시선들이 모두 건너편에 닿아 있었다.
자세들이 썩 편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올라가고 있는 쪽 아래에 선림들이 있다는 뜻이다.
물줄기 위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동안 용연에게 주목받는 위치에 서는 취미가 생겼으려나?
씰룩.
괜한 생각을 해 봤다.
아마도 선림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겨하채하고 오동채의 두목들을 처리했습니다. 마을에 입 가벼운 사람 몇 명 데려가서 보여 주고 잘 지내라는 말까지 해 줬습니다.”
적휘는 칭찬을 바라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남 백주가 극찬했다고? 잘했다, 적 학림.”
용연은 엄지를 치켜들어 주고는 자연스럽게 옆을 돌아봤다.
담영호가 내려오는 기척을 느낀 것이다.
“선림 담영호, 단주님을 뵙습니다.”
담영호는 용연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이리 와서 앉아요, 담 선림. 다들 활약한 얘길 하던 중이에요. 몇 분 아직 오지 않았으니 모이기 전까지 같이 들으세요.”
용연은 벽 쪽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선림들을 가리켰다.
“선림 담영호, 인사가 늦었습니다.”
담영호는 선림들에게 다가가 예를 취했다.
“왔는가, 담 선림? 학림들 활약은 적 학림을 끝으로 다 들었어. 이제 교림들이 얘길 들려줄 차례인데, 단주님이 편한 곳에 앉으라고 하셨다고 저기서 오질 않네.”
현승은 담영호를 눈으로 맞아 주곤 건너편에 있는 교림들을 쳐다봤다.
“단주님이 부르신다. 모두 건너와.”
담영호는 지체 없이 나직한 목소리를 흘려 교림들을 불렀다.
그러자 교림들의 신형이 일제히 포물선을 그리며 건너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승의 눈가에 미미한 웃음이 그려졌다.
‘단주님을 만나기 전에 능력을 드러냈으면…… 아니지, 그랬을 리가 없을 사람이지.’
현승은 아쉬운 마음에 생각을 떠올렸다가 이내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용연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을 학림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사람이란 것을 이젠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의 앞뒤가 바뀌어야 했다.
용연 덕분에 담영호가 제 역할을 찾아가게 됐다는.
현승이 담영호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소황선은 건너온 형도준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형 교림도 할 말이 있지 않나?”
“예? 아! 서패주 파륵의 오른팔 영항을 처리하고 마을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긴 했습니다. 단주님, 언제고 파륵과 만나게 되면 제게 싸울 기회를 주십시오.”
형도준은 이때다 싶었는지 청을 넣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용연은 가타부타 대답을 해 주지 않고 담영호를 돌아봤다.
파륵이란 이름이야 들어 봤지만 그 외의 정보는 모르기 때문이다.
담영호는 용연의 시선을 받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그, 서른 명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한 고수입니다. 형 교림의 현재 실력으로는 피해야 할 상대이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형 교림, 혼자서는 그와 싸우지 마세요.”
용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형도준을 쳐다봤다.
“그럼 우 교림이나 다른 교림과 함께 싸우라는 말씀이십니까?”
형도준은 포기할 수 없는지 재차 물었다.
그러자 선림들을 제외한 학림과 교림들이 눈빛을 반짝였다.
사천성을 벗어난 뒤, 군림단원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선택이었다.
이전에는 임무만 완수하면 그만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인 까닭이다.
당연히 형도준의 질문에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틀렸어요.”
용연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까지 저었다.
“예?”
형도준은 갑작스러운 용연의 반응에 놀라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한 명이든, 백 명이든 그 싸움을 시작한 사람이 군림단원이라면, 끝을 내는 사람도 그 군림단원이어야 합니다. 기억나나요, 형 교림?”
“……물론입니다.”
“파륵이란 자와 싸워서 이기고 싶다고요? 그런 생각을 했으면, 어떤 단원도 이견을 내지 않도록 스스로 증명을 했어야죠. 모두 들으세요!”
용연은 형도준에게 일침을 가하고는 시선을 단원들에게로 돌렸다.
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지금, 전 단원에게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한 명이라도 죽으면 실패한 임무가 될 겁니다. 죽지 마세요. 죽을 이유도! 죽을 수 있는 상황도! 만들지 마세요. 형 교림, 그래도 피륵이란 자와 싸우고 싶나요?”
“……!”
움찔.
형도준은 대답을 못 한 채 몸을 떨었다.
사천성을 떠난 뒤로 언제나 진지하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 왔다고 생각했다.
돌아갈 곳이 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임무에 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콰우― 콰콰―.
‘저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구나.’
현승은 눈앞에서 몇 배는 거대해져 버린 용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폭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이니 들리는 건지, 들려서 보게 된 건지.
모든 단원들은 용연에게 집중하느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용연에게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실제로 이러저러한 경우 자신의 역할을 정해 놓은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나 용연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울컥대 폭포라도 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저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제가 안가에서 지내는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군림봉에 가고자 하는 이유를 댈 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와 외모는 똑같은데, 똑바로 쳐다봐선 안 될 것 같은 위화감이 느껴진다.
군림단주로서의 분위기?
그런 것이 있다면 저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단주님, 저를 비롯한 전 단원이 말씀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현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용연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모든 단원이 현승을 따라 같은 자세를 취했다.
용연은 과하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투신으로서 몇 백 명 앞에 섰을 때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다들 내려오셔도 됩니다.”
먼저 고개를 든 용연이 위쪽에다 말을 건넸다.
“크크크. 단주님, 늦었습니다.”
몽외가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솟은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며 특유의 위아래 치아를 맞물린 채 웃었다.
“대교 진류, 늦었습니다.”
“우리 때문에 그런 것이니 단주님께선 이 세 늙은이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국진세, 여벽, 잠사우가 진류와 함께 내려왔다.
“오랜만이네요, 세 분.”
용연은 몽외, 진류와는 눈인사를 나누고 국진세 등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었다.
진류를 통해 국진세 등이 무슨 일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고 할 줄이야.
“불러 주셔서…….”
“세 분은 군림단원이세요. 당연히 함께 있어야죠.”
용연은 국진세의 눈시울이 붉어지려 하자 말을 끊고는 자리하란 손짓을 하며 돌아섰다.
같은 말을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위에서 듣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모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용연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군림단이 강호삼대세력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군림단이 강호삼대세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군림단이 강호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여러 가지 질문들을 떠올리며 첫마디를 기다리는 단원들을 쳐다봤다.
사천성 내의 군림단과 현재의 군림단.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
먼저 군림단은 사천성을 벗어났다.
그리고 모든 단원의 목표였던 군림단주도 나온 상황이었다.
새로운 목표를 정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왜 강호삼대세력이라 불리는 곳들은 우리를 이백 년이 넘도록 견제했던 걸까?”
용연은 입을 뗀 뒤 단원들을 둘러봤다.
선림들과 교림 몇몇은 차분함을 유지했지만 서열이 낮은 교림 몇몇과 학림 전원은 동요를 보였다.
대답을 바라고 꺼낸 질문이 아니기에 용연은 바로 말을 이어 갔다.
“군림봉에서 지내던 어느 날, 불쑥 떠오르더라고요. 기록을 봐도 기록을 위한 기록만 나열되어 있어서 진심으로 궁금해졌지요. 그런데 한 사람을 만나고 나니 알겠더라고요.”
용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위에서 아래로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나눠 주고자 호흡을 조절해 가는 것이다.
“얼마 전, 사자궁주 호원이란 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호원!”
국진세, 여벽, 잠사우, 세 명이 동시에 부르짖듯이 외쳤다.
전 임주 담묵의 일을 떠올린 것이다.
“아는 분들도 있겠지만, 모르는 단원들을 위해 그에 대해 설명 좀 할게요. 호원은 전 임주셨던 담묵 선배님의 시험을 주관했던 자예요. 그런 자가 저를 찾아왔다면, 당연히 그동안 계속해서 군림단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왜 규칙을 어겼느냐고 따져 묻더군요. 그래서…….”
움찔.
진류는 용연에게서 이어질 말을 알고 있기에 미리 몸을 떨었다.
―나는, 전 임주님들과 달리 당신들을 혼자서 상대할 자신이 없다. 군림단이 받은 이백여 년 동안의 모욕을 나 혼자 감당할 자신이.
“……감당할 자신이.”
용연은 마지막 말을 마치고 눈을 감으며 격해진 마음을 눌러야 했다.
진류 한 명에게 말할 때와 전혀 달랐다.
‘아, 단주…….’
용연 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현승은 놀라움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수십 년을 고민해도 풀리지 않던 숙제가 용연의 한마디에 해소된 느낌이라니.
모욕.
느끼지 못하면 알 수가 없는 감정이잖은가?
전 임주의 주검을 거뒀던 손들이 아니고서야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저 어린 단주는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알리지 않기를 잘했다. 저 울림은 단주님의 목소리로 들어야 알 수 있어.’
진류는 이미 들었음에도 또 소름이 돋았다.
돌아보니, 학림 몇몇은 울고 있었다.
용연이 말을 끝냈을 때 시작된 일체화에 이끌려 선림이나 교림 들의 감동을 강제로 느껴 버린 것이다.
진류 역시 격정으로 인해 몸이 떨릴 지경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으허…… 맞습니다, 단주님. 우리는 그동안 모욕을 받았던 겁니다. 허허, 허허허.”
잠사우의 울분이 담긴 목소리로 인해 적막이 깨졌다.
“몰랐습니다. 진정 몰랐습니다.”
국진세도 눈시울이 붉어져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마디 꺼냈다.
“단주님, 감사합니다.”
여벽은 이 한마디 외엔 할 수가 없었다.
잠사우처럼 용연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고, 국진세처럼 그것을 몰랐기에 강호삼대세력을 이용해서라도 군림단을 담금질하려 했던 것이다.
‘왜, 왜, 왜. 그 의문이야말로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단원들이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던지던 질문이 아니었을까? 단주님과 다른 점은, 던지기는 하지만 답을 낼 수 없었던 것이겠지. 모욕. 이보다 더 정확한 내 심경을 말해 줄 단어가 있을까?’
군림단원 모두가 오랫동안 공감해 온 문제에 대한 답.
용연은 아무도 하지 못했던 것을 한 단어로 알려 준 것이다.
현승은 진심으로 기꺼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