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해도 되는지 내게 묻지 마요, 진 대교. 단원들이 어떤 일이든 시작했으면,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해 줘요.
용연이 자신의 계획을 모두 설명해 준 뒤 가장 중요한 것이니 명심하라고 해 준 말이었다.
진심으로 감동했다.
더 놀라운 것은, 용연의 계획 어디에도 강호삼대세력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초행인 곳이라도 사천성에서 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위해 주세요. 거기서부터 군림단의 행보는 첫발을 내디딜 겁니다.
―모든 싸움은 그 자리에 있던 단원, 혹은 단원들에게만 맡길 겁니다.
‘최고였지.’
진류는 용연이 두 번째로 한 말을 떠올리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조금 더 생각을 이어 가려 할 때, 계단 위로 용연의 얼굴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단주님.”
진류는 일어나 예를 갖췄다.
“자리 좋은데요? 둘뿐이라 그런가?”
용연은 텅 빈 이 층을 둘러보다 진류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앉았다.
그러자 진류도 따라 앉으며 계단 쪽을 향해 가볍게 손짓을 했다.
“보고드릴 일이 산더미라 눈이라도 즐거우시라고 좋은 자리로 마련했습니다.”
말을 마친 진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번 보라는 뜻이다.
“……좋네요.”
진류를 따라 밖으로 고개를 돌린 용연은 잘 정돈된 화원과 연못, 중문을 지나 담장까지 눈에 담았다.
동동마을에서 늘 보던 광경이 이곳에도 있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단주님, 누가 보면 이런 곳에 처음 와 보는 줄 알겠습니다.”
“목적지가 아닌 곳으로는 처음이 맞아요.”
“…….”
진류는 용연의 편안한 표정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목적지.
지난 몇 달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는 것을 그 한마디로 알 것 같은 까닭이다.
잠시 숨을 내려놓고 용연이 눈으로라도 쉴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나라면 사방이 거대한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적진 한 가운데에서 단주님처럼 쉴 수 있을까?’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용연을 군림봉으로 보내자고 제안하던 몽외와 담영호나, 그 제안을 허락한 현승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십여 년 넘게 실질적인 군림단 서열 일 위를 지키고 있던 현승이라면.
선림으로 승격하자마자 서열 이 위였던 서하를 누르고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 몽외라면.
마지막으로 교림에서 이 년도 안 돼 선림으로 승격해 버린 담영호라면.
군림단 사상 가장 놀라운 자질을 보였던 세 사람이지만, 모두 한 명에게 양보했다.
그가 눈앞에 있었다.
세 선림은 용연의 어떤 점을 본 것일까?
“시작합시다.”
진류의 상념을 자르며 용연이 자세를 잡았다.
“예? 아, 예.”
진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계단 쪽을 향해 가져오라는 손짓을 했다.
턱. 턱. 턱.
탁자에 자료를 정리한 두루마리들이 쌓여 갔다.
“이걸 다 봐야 하는 건가요, 대교?”
용연은 다소 의외란 표정으로 진류를 쳐다봤다.
“아닙니다. 단주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려고 가져온 자료들입니다.”
진류는 고소를 지으며 품에서 얇은 책자를 꺼내 탁자 위로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학림과 교림 들이 지내고 있는 지역과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는 외부 식구들을 적어 놓았습니다.”
“세 달이나 지났더라고요.”
“……맞습니다.”
“철혈사자맹 내에 사자궁이란 곳이 있나요?”
“있지요. 오대세가연합을 사자궁이라고 부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답하는 진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잊혀지지 않는 이름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한 번도 호원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없는데 갑자기 사자궁 얘기부터 꺼낸다?
저절로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 궁주 이름이 호원이고요?”
“……!”
심장박동이 빨라진 것에 이어 진류의 동공까지 크게 흔들렸다.
“대교, 벌써 그렇게 놀라면 그자와 만났던 얘기는 어떻게 들으려고 그래요?”
“마, 만났다고요? 호원, 그자를!”
“찾아왔더라고요. 왜 임주가 아니냐고 물어서, 군림단원 모두의 인정을 받아 단주가 됐다고 말해 줬어요.”
“……듣기만 하던가요, 그가?”
진류는 삼십 년 가까이 된 기억을 떠올렸다.
젊은 청년 한 명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던 서른 명의 고수들.
누구도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친 자가 없었다.
젊은 청년을 인정하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 젊은 청년이 호원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담묵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됐다.
그런 자가 용연의 앞에 나타났다.
“그럴 리가요. 규칙을 어겼다며 체계, 규모, 강호의 정의 등에 대해 한참을 떠들더군요.”
“그, 그와 대화를 나누신 겁니까, 단주님?”
“나는, 전 임주님들과 달리 당신들을 혼자서 상대할 자신이 없다고 했어요.”
말을 잇는 용연의 시선이 창밖을 향해 있었다.
목소리에서 분노가 진하게 느껴졌다.
진류는 입을 꾹 다물고 용연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군림단이 받은 이백여 년 동안의 모욕을 나 혼자 감당할 자신이.”
“아!”
쫘악!
진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눈은 크게 치떠졌고 손과 발이 미친 듯이 떨렸다.
“제 말이 맞는 거죠?”
용연은 창밖을 향해 있던 시선을 진류에게로 옮겼다.
척.
진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한 걸음 옮긴 뒤, 양 손바닥을 아랫배 쪽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군림단주가 한 말은 언제나 옳습니다. 세상을 뒤엎어서라도 그렇게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맹세.
군림봉을 살아서 나왔을 때도 했지만, 한 번 더 마음속으로 새겼다.
“지금 그 마음, 전할 수 있는 단원들에게 모두 전해 주세요.”
“전하겠습니다.”
“강호삼대세력이 알고 보면 마을 사람들의 곤란은 외면하는 것 같아요. 왜들 그러는지.”
“……?”
“잘못을 모르면 한 대 쥐어 패서라도 알려 줘야죠. 대장만 믿고 마을 사람들 위해 힘 한번 쓰라고 해요.”
용연은 ‘대장’이란 말을 할 때 손으로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며 웃었다.
그러자 진류도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따라 웃었다.
이제 정말 시작인 것이다.
***
[마을 사람들 괴롭히는 무리를 처리해 왔으면 하던 대로 하고, 봐주고 있었으면 응징해서 다신 찾아오지 못하게 하라.
―군림단주.]
“풋.”
적휘는 남회가 건넨 서찰을 읽다 말고 배를 잡았다.
서찰을 읽는데 왜 용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가 말이다.
호남성 신전(新田).
강호 세력의 시야에서는 벗어난 지역이었다.
어릴 때 잠시 머물렀던 기억 때문에 찾게 된 곳인데, 이 이유로 남회에게 몇 번이나 놀림을 받고 있었다.
“적 학림, 단주님이 보낸 서찰인데 경건하게 읽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남회가 삐딱하게 쳐다봤다.
“남 백주,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나라고 일부러 한가한 곳을 골랐겠어요?”
적휘는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엔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식구들을 풀어서 알아보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곳을 알아내신 거예요?”
“……예?”
“적 학림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이유가 뭔지 알아냈다고요?”
적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남회를 쳐다봤다.
세 달 동안 만난 횟수라고 해 봐야 세 번 남짓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 산 너머에는 혈록 겨하채가 있고, 남악 형산(衡山)으로 가는 길에도 혈록 오동채가 있더라고요. 딱 중간이 이곳 신전인 거지요. 대단해요, 적 학림.”
남회는 진지한 표정으로 엄지를 척 올렸다.
픽.
적휘는 남회의 분석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외연도 이전의 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주님께서 부르시는데 빈손으론 갈 수 없잖아요.”
적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치 남회가 거기까지 파악했을 줄 몰랐다는 듯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는 말을 이었다.
“남 백주, 겨하채부터 정리하고 오동채로 갈 거예요. 혈록 채주 둘의 머리 정도면 단주님께 칭찬 정도는 받지 않겠어요?”
“물론이지요.”
남회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단주께서 전리품 하나씩 챙겨서 모이시랍니다.
―고람 치령.]
“하여간 치 향주는 너무 직설적이야.”
와삭.
형도준은 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 물고 나서 뒤로 던지며 윗니와 아랫니를 몇 번 부딪쳤다.
나무 위에서 맞이하는 수많은 아침 중 가장 상쾌한 것 같았다.
드디어 단주의 호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서패주 만부 파륵의 오른팔인 반검(半劍) 영항 정도면 전리품으로 괜찮겠지?”
씨익.
사과즙으로 닦은 형도준의 치아가 반짝 빛을 반사시켰다.
이제 곧 영항이 저 길로 모습을 드러낸다.
형도준은 반대쪽을 돌아봤다.
멀리서도 테두리가 보일 정도의 큰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세 달 동안 서패의 무리들이 난리를 피울 때마다 막아 준 보람이 있었다.
“음?”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길 쪽으로 돌리자, 이십여 명쯤 되는 무리가 보였다.
서패의 본진이 꽤 멀기는 하지만 말까지 타고 올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영항이 누군지 한눈에 들어왔다.
좌우사방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말고삐도 잡지 않고 팔짱 낀 채 정면을 주시고 있는 자, 그가 영항인 것이다.
과시욕이 강해 보였다.
용연의 호출 명령을 받기 전이었다면 일부러 지나가게 내버려 뒀다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박살 내 줬겠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다.
까득. 꾸득.
목을 좌우로 꺾었다.
턱.
형도준은 나무에서 떨어지며 말에 타고 있던 자의 머리를 잡고서 몸을 크게 비틀었다.
빡!
두 명이 말에서 분리되며 풀숲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영항, 파륵이 보내…….”
형도준은 빈 말안장에 내려서며 나름 멋진 말을 하려 했으나, 이미 안장에 양발을 모으고 있던 영항이 날아오는 바람에 멈춰야 했다.
쐑―.
등 뒤에 교차시켜 멘 반검 두 자루가 영항의 양손에 쥐어져 있었다.
쉬악.
손바닥 하나 정도의 간격을 두고 검광 두 개가 영항의 몸에서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쾅!
검광은 형도준의 얼굴에 닿을 수가 없었다.
왼 무릎을 접는 동시에 오른발을 뻗어 영항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이놈 봐라?”
형도준은 날아가는 영항을 보며 이채를 발했다.
쉬악.
바닥으로 내려선 형도준의 등 뒤에서 수십 개의 선들이 넘실거리며 어깨로 올라오더니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타고 있던 자들을 노리고 쏘아졌다.
“무, 무슨…….”
반검 두 자루를 겹쳐 가까스로 형도준의 공격을 막아 낸 영항은 부하들의 등에서 흐르는 핏물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군림단주님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군림단원은 머무는 마을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하셨거든. 그러게 왜 파륵은 자꾸 돼도 않는 자들을 보내는 거야?”
“구, 군림단원 중에 이 정도 고수는…….”
“많아. 나보다 강한 선배들이 열은 족히 될걸?”
“여, 열이라니…….”
“아무튼, 덕분에 파륵이 날 찾으려고 난리 칠 것 같다. 지옥 가면 착한 일 하는 것 잊지 말고?”
형도준은 다가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멀어지더니 이내 영항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 알려야…… 헉, 헉…… 왜 이리 숨이 차……지?”
뽈뽈뽈.
영항의 심장과 폐, 간, 위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아니, 이미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형도준이 다가온 순간 네 곳 모두 뚫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모으면 도(刀)나 곤(棍)으로 사용이 가능하고, 지금처럼 풀면 요추사(摇追絲)가 된다.
최대한 간결하게 상황을 종료하기 위해 일부러 처음부터 무기를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