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죽은 열넷 중 셋이 몸담은 곳들이 알려졌습니다. 귀암로의 은자림과 한류천, 사혈명 남패의 무인들인데 더 조사하면 철혈사자맹도 가담된 것 같습니다.]
‘은자림?’
인이예의 표정이 굳은 이유였다.
감히 자신의 연인을 은자림 따위에서 노렸다고?
슥.
인이예가 손을 뻗자 선반 위쪽에서 무언가가 날아와 잡혔다.
반짝.
칠채석으로 나머지 반을 붙인 은령검이다.
은영루주의 신물이자 검극현천으로 펼치는 백색살인이 가능하게 해 주는 기보이기도 했다.
“일령, 사부님 뵈러 갈 거야.”
인이예는 은령검을 팔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은령검이 팔뚝을 보호하듯 달라붙었다.
“사부님, 은자림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서 왔어요.”
인이예는 추영영을 보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평상시의 이성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완전히 투지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줄게.”
추영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곤 서재로 가서 책을 하나하나 꺼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부님, 저 지금…….”
“화난 거 알아. 네가 그 정도로 빡…… 음, 열받았다면 연인 때문이겠지. 어? 여기 없나 본데?”
추영영은 고개를 갸웃하곤 엄지와 검지를 펴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럴수록 인이예의 눈은 가늘어지고 호흡은 가빠졌다.
“차분해지라는 뜻인 거 알아요.”
“잘 아는 애가 왜 그래?”
“사부님, 우리 상단 마차 행렬 덮쳤던 혈록 마이채 무리들 전멸시키셨을 때가 생각나지 않으세요?”
“으, 응?”
“그 때, 아버지 화내시니까 눈에 불을 켜시고…….”
“아! 우리 이예 정말 별걸 다 기억하는구나? 그럼 내가 냉정 그 자체였다는 것도 기억하겠네?”
“그럼요. 저는 그때의 사부님보다 조금 더 차분한 상태 아닌가요?”
인이예는 눈웃음까지 지어 보였으나, 추영영은 반응해 주지 않았다.
“혈록 산채 몇 개와 은자림을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야. 덩치만 크고 느린 것들과 우리보다 조금 느린 것들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거든.”
“그래서 자료를 참고하려고요. 제가 구하는 것들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십이월(十二月)을 데려가서 은자림주를 없애 버릴 거예요.”
“이래서 내가 마음을 못 놔. 이예 네가 혼자 갔을 경우, 은자림주 한 명을, 주위 환경을 무시하고, 죽일 수 있는 확률은 칠 할로 봐. 하지만 사살이 붙어 있으면 무조건 실패해. 그것도 십이월이 팔위와 삼십육주를 막는다고 했을 때 얘기야.”
“그 정도로 강하다고요?”
“은자림이 우리 은영루에서 떨어져 나가서 덩치만 키운 게 아니란 뜻이지. 이래도 갈래?”
“당연하죠. 사부님께서 격려까지 해 주셨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죠.”
“격려?”
“저 혼자 은자림주와 사살을 상대할 때의 확률이잖아요? 사부님이 사살 중 둘만 막아 주면 무조건 이기는데 왜 안 가요?”
“……나?”
“어머, 다른 제자 또 뽑으시게요?”
인이예는 놀란 눈이 되어 추영영을 쳐다봤다.
그러자 추영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제자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사부의 숭고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건만, 너무 똑똑한 제자를 둬서 불가능할 모양이다.
“그다음은? 은자림을 해체시킬 거야?”
추영영에겐 아직 남겨둔 한 수가 있었다.
“사부님, 요즘 많이 심심해하시잖아요?”
“……호호, 호호호. 얘두, 참. 나 안 심심해.”
“제가 매일 보는 분은 누구실까요? 호호호.”
두 사제가 동시에 얌전한 웃음을 서로에게 찔러 댔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의지를 보였다.
쉭.
“이리 와, 이게 오냐, 오냐 했더니.”
추영영의 손이 인이예의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사부님, 봐주세요.”
인이예는 얼른 팔로 막으며 겁먹은 표정으로 추영영을 쳐다봤다.
“봐 달라면서 왜…… 까륵. 손 안 빼?”
“까르르. 먼저 빼시면 뺄게요.”
“까륵. 손, 아, 까륵.”
“까르르르.”
인이예가 어릴 때부터 추영영은 이런 식으로 훈련을 시켜 왔다.
진지함과 장난스러움으로 빠져 있는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훈련 비슷한 간지럼 태우기는 계속됐다.
***
묵 노야와 헤어진 후, 용연은 섬서성을 지나 산서성으로 들어서자마자 홍동(洪洞)을 향해 신법을 펼쳤다.
‘이쯤인데.’
용잠의 기록에 남겨진 위치를 좇아 달려왔다.
중간중간 미행으로 의심되는 기척들을 느끼긴 했지만 이내 사라져서 신경 쓰지 않았다.
오색창 백달.
전 임주 담묵에게 치명상을 입혔고, 추적해 이곳까지 쫓아온 용잠 역시 동동마을에 몸을 숨겨야 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긴 자였다.
울룩불룩 연결된 구릉 전체가 층이 져서 논으로 가득했다.
추수를 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해서 논에 물을 대러 사람들이 줄지어 물통을 지어 나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용연은 얼른 그들에게 다가가 아직 물통을 머리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여인을 도와주었다.
“어디다 뿌리면 되죠?”
“어…… 어?”
중년 여인은 용연의 도움에 놀라서 남편으로 보이는 앞의 남자에게 붙었다.
“뉘슈?”
햇볕에 오랫동안 노출돼 까매진 얼굴의 남자가 용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나가다 물통이 무거워 보여서 받아 드렸습니다.”
“타지 사람 손 타면 농사 망해. 가던 길이나 가.”
남자는 귀찮은 표정으로 가라는 손짓을 했다.
“백 어르신이라고, 제가 사람을 찾아왔거든요. 혹시 아시면 알려 주시겠어요?”
용연은 물통에서 손을 떼며 멋쩍은 모습으로 물었다.
“백 어르신? 저 산골에 살았던 할배?”
‘살았던?’
용연은 맥 빠진 얼굴로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올려다봤다.
“돌아가신 지 한참 된 분을 뭣 한다고 찾아?”
“……뭘 좀 물어보려고요.”
“흰소리는. 자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분을 어찌 알고 찾아와? 백 대협을 찾아온 거라면 벌써 떠났으니 헛걸음 했네.”
“백 대협요?”
“그래. 아, 뭐 해, 물 안 대고?”
남자는 용연의 반문에 건성으로 대답하곤 부인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러고는 아예 용연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일단 가 보자.’
용연은 더 물어보는 건 포기하고 남자가 알려 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벼랑 끝으로 가면 빈 집 있어요.”
물통을 받아 준 것이 고마웠는지 중년 여인이 큰 소리로 알려 주곤 돌아섰다.
“감사합니다.”
용연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뿌리가 죽었는지 바짝 마른 나무들이 돌계단 입구부터 늘어서 있어서 음산했다.
일정한 높이의 계단.
죽음을 뿌려놓은 것처럼 생명이라고는 일체 느껴지지 않는 공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엉켜서 하늘을 검은 선으로 잘라 놓은 것 같았다.
죽은 지 한참이 지났다니.
계단을 오르는 용연의 표정은 어두웠다.
―오성창 백달과 싸운 뒤로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담묵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일 수도 있고, 자신의 성취를 시험해 보고자 하는 욕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저도 여기까지 왔잖아요. 현 선림이든 몽 선림이든 임주가 되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저도 할아버지와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아요.”
용연은 혼잣말을 읊조리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섰을 때, 바람이 훅, 끼쳐 왔다.
폐가가 눈에 들어왔다.
끼이― 끼이―.
틀이 어긋났는지 문이 삐걱 댔다.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모옥 앞에는 벼랑 바로 위에 절구를 거꾸로 박아 넣은 것 같은 둥그런 석탁이 있었고 의자 역시 돌이었다.
용연은 의자에 앉아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모든 것이 소박하기만 한 공간이다.
그러나 올라오면서 봤던 광경들과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용연은 눈을 감았다.
‘내가 안가의 벽에 쌓여 있던 선배들의 기를 흡수했듯이, 이곳에 살던 누군가 역시 같은 과정을 거친 것 같다.’
씰룩.
용연의 입가가 비틀렸다.
백달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은 없었다.
할아버지께 남긴 상처를 고스란히 전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용연은 석탁에 손을 올려놓았다.
죽은 공간을 살릴 생각은 없지만, 언제고 찾아올 누군가에게 자신이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겨 두려는 것이다.
고오―.
용연의 전신에서 아지랑이가 확, 피어올라 일 장가량 퍼지다 석탁으로 모여들었다.
콰웃!
외형적으로 변화된 것은 없어 보였으나, 용연의 눈에는 구분이 됐다.
주위 모든 사물들은 흑백이지만, 자신이 손을 댄 석탁만 원래의 색으로 변한 것을.
계단을 내려온 용연은 논 쪽을 돌아봤다.
마을 사람들이 자리를 옮겨 여전히 논에 물을 대고 있었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필요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
순리를 거스르지 않으니 지켜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순간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림단원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외부 식구들과 동동마을의 육씨 일가, 그리고 이제부터 찾아가 볼 장철이.
***
“여보, 저 청년 가나 봐요?”
빈 물통을 들고 논에서 빠져나오던 여인이 목을 옆으로 빼며 손가락 한 마디 정도밖에 안 되는 용연을 쳐다봤다.
“그러다 목 부러지겠다.”
남편은 부인의 행동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백 대협을 찾아온 걸 보니 저 청년도 강호인이겠네요.”
“어째 첫인상이 별로더라니.”
“당신도 첫인상은 좋지 않았어요. 생긴 것답지 않게 너무 착해서 정들면 어쩌나 했거든요.”
“뭐래, 이 사람이 오늘따라?”
“그렇다고요. 가요.”
부인은 한 손으로 빈 물통을 든 채 다른 손으로 남편의 팔짱을 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에 뒤에서 따라 내려오던 마을 사람 누구도 중년 여인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검은 무복에 머리칼을 뒤로 묶은 청년 한 명이 백달 대협의 거처를 다녀감. 새벽에 모옥 주위를 샅샅이 살펴봤으나 특별히 건드리거나 놓고 간 것은 없었음. 이곳에서의 임무를 종료하고 궁으로 복귀함.
―비(秘) 하종(下種).]
중년 여인이 누군가의 명령으로 생의 가장 젊은 시절을 이곳에서 모두 보낸 이유였다.
***
“아무리 나라도 군림단주의 행보를 예측하는 건 쉽지 않군. 십사객을 처리하고 곧바로 백달 대협을 찾아갔다?”
톡. 톡. 톡.
호원은 한참 동안 손가락으로 태사의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십사객을 용연에게 버렸고, 깔끔하게 처리가 됐다.
그런데 왜 찜찜함이 남는 걸까?
백달 때문인가?
만나지도 못한 백달의 무엇 때문에?
백달은 전 군림단 임주를 시험할 당시 철혈사자맹에서 뽑은 열 명 중 한 명으로, 삼십 년 전 당시 세 척 길이의 오색창 중 세 개를 어기(馭氣)로 조종할 수 있었다.
그 경지만으로도 전 군림단 임주의 심장을 뚫었다.
백달에게 붙여 놓은 비 상종의 보고에 따르면, 요즘은 창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평생 몸의 일부처럼 사용했던 애병을 몸에서 떨어뜨려 놓는다?
호원은 보고를 받자마자 발을 동동 굴렀다.
백달이 오른 경지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 때문이다.
지금이었다면 곧장 달려갔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때는 조금 더 강해진 고수 정도로만 여기고 넘겼다.
더 강해지고, 더 많은 인원을 주위에 두고, 더 많은 작전을 만들어 내고.
당시의 호원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을 따라올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했던 말이 이상하긴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