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산서성?”
묵 노야는 뜬금없이 나온 지역 이름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말씀드렸던, 아북리란 도적패들이 출몰하는 곳이라고 해요.”
“아! 알겠습니다. 다녀 오십시오.”
묵 노야는 아북리란 말을 듣자마자 기억해 내곤 허리를 숙였다.
삼정일사회를 집으로 여겨 달라는 나름의 배려인 것이다.
“다녀 올게요. 다음엔 좀 더 무리한 부탁을 준비해야겠어요.”
피식.
용연은 묵 노야의 마음을 받아주며 웃었다.
이 많은 인원을, 그것도 두 집단을 다루는 묵 노야의 솜씨에 감탄했음을 농담으로 건넨 것이다.
“그러라고 제가 있는 겁니다, 투신.”
***
“……투신이 분노했다고 합니다.”
화자는 안와산에서 있었던 삼정일사회 소집 사건을 전하다 말고 술 한 모금 마셨다.
화자의 얘길 듣던 중년인이 옆을 돌아보며 친구에게 물었다.
“그게 분노할 일이야?”
“야, 내가 항상 마누라하고 둘이 밥 먹는 거 알지? 근데 며칠 전에 밥 먹는데 웬 놈이 서성대는 거야. 그 시간대에 내가 집에 없는 걸 아는 놈인 거지.”
“……지금 우리 집 얘기 한 거지?”
“아, 아냐.”
“이 여편네 봐라? 제수씨에게 그새 말한 거야?”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라…… 아무튼, 그 새끼 기분 나쁘지?”
“나쁘지!”
“투신도 그래서 분노한 거야.”
“아아, 확 이해되는데?”
“영감 얘기 시작한다.”
두 중년인의 심도 있는 대화에 좌우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소요가 가라앉자 화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투신의 분노를 안 삼정일사회원들은 그곳에서 죽은 복면인 열네 명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강호 전역에 수소문을 했어요.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의…… 정체까지는 아니고 속했던 곳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화자가 잠시 숨을 골랐다.
주루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은자림, 사혈명 남패, 한류천. 이렇게 세 곳에 몸담을 때 새긴 낙인을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으, 은자림?”
“사혈명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강호삼대세력 중 한 곳인 그 사혈명?”
“와, 와, 장난 아닌데? 귀암로 한류천까지? 도대체 누가 그 정도 고수들을 죽인 거지?”
화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루는 사람들의 추측과 놀람으로 떠들썩해졌다.
“군림단주!”
화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배에 힘주고 외쳤다.
***
[……(중략)……군림단에 단주가 나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 의아하지만, 분명 군림단주가 그들을 죽였다고 알려졌습니다.]
‘군림단, 군림단…….’
철혈사자맹 오행각주 모용진을 보필하는 모양현은 보고가 올라온 서찰을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언제인가 군림단을 조심하란 말을 들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기 형님.’
몇 년 전, 모용진에게 경고해달라며 서찰을 보냈던 욕심 많은 모용기를 떠올린 것이다.
곧장 불러들였고, 모용기가 오행각에 온 것은 삼 일 뒤였다.
“현아, 무슨 일이기에 직접 연락까지 준 거냐?”
모용기는 모용현의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형님, 각주님 보필하다 보면 하루가 모자라요. 뵙는다, 뵙는다 하면서 늦었어요. 화 푸시고, 앉으세요.”
모용현은 비녀가 차를 내오자 손수 찻잔을 모용기에 건네며 기분을 맞춰 주려 애썼다.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거야?”
“군림단. 각주님께서 그들에 대해 궁금해 하세요.”
“군림단?”
모용기는 이채를 발했다.
“몇 년 전에 제게 서찰 한 통 보내셨던 것 기억나세요?”
“기억하지.”
“한번 군림단에 대해 조사해 볼 생각 있으세요?”
모용현은 모용기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얼마나 붙여 줄 건데?”
“형님이 필요하신 만큼 얼마든지요.”
“감숙, 섬서, 호북, 호남. 네 지역에 각각 백 명씩, 사백 명을 다오.”
“알겠어요. 아! 각주님이 원하는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세요, 과정. 무슨 말인지 아시죠?”
“바로바로 보고하란 말이겠지.”
“그렇죠. 앞으로 잘해 봐요. 또 알아요? 각주님이 형님을 마음에 들어 하실지.”
모용현은 모용기를 자극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을 나가면 물불 안 가리고 다닐 것이다.
딱.
모용기가 나가고 나자 바로 손가락을 튕겨 누군가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평범한 문사 차림의 삼십 대 사내가 들어왔다.
“감 대협, 기 형님을 감시하다 군림단주와 관련된 보고가 올라오면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사내가 조용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이런 일에 써먹어도 되나 몰라. 탄검랑 감걸을 말이야.”
모용현의 호위 중 한 명으로 검을 쏘는 형태로 사용하는 무공만큼은 일절이라고 했다.
***
[……(중략)……군림단에 단주가 나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 의아하지만, 분명 군림단주가 그들을 죽였다고 알려졌습니다.]
모용현과 똑같은 내용의 서찰이 철혈사자맹 진천전 휘하 세 각 중 폭풍각에 전달됐다.
받아 든 손의 주인은 미간을 좁혔다.
“군림단주라고 알아?”
전 폭풍각주 가무경이 죽은 뒤 그 자리에 오른 동적은 불려 온 오십 대 초반의 중년인에게 물었다.
“군림단주에 대해선 모르지만 군림단과 관련된 자는 알고 있습니다.”
“일전에 말했던 그들?”
“죽은 가 각주가 삼정이라고 했습니다.”
“삼정?”
“군림단에서 꽤 높은 위치라고 하더군요.”
“그들과 연락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가 각주가 직접 연락을 해서 저는 잘 모릅니다.”
“방법 좀 찾아봐. 그들과 관련된 일을 한 건 판영필, 당신밖에 없잖아?”
“……알아보겠습니다.”
판영필은 동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앞으로 좀 친해져 보자고. 언제까지 떠돌아다닐 거야, 판영필?”
“선번주. 각주님이 직접 정한 제 신분입니다.”
“알아. 사람이 없어서 일단 데려와야 했으니 별수 없었지. 이번에 잘하면 봐서.”
동적은 나가 보란 손짓을 하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가 각주도 이 정도 취급은 안 했는데.’
각주 방을 나서는 판영필의 얼굴이 구겨졌다.
***
구구구구.
한참을 날아왔는지 전서구가 네모난 창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깔린 모이를 부리로 쪼았다.
주름진 손바닥이 전서구를 잡아 쓰다듬다 발목에 달린 쪽지를 풀어냈다.
“벌써 세 통이나 왔네? 허허허.”
국진세는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교림으로 강등된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뒤에 서 있던 여벽은 국진세를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정이었던 세 사람은 모두 교림으로 내려갔다.
“국 교림, 신이 나셨습니다?”
“잠 교림이 제안해 놓고 이러깁니까?”
“제안이야 늘 제가 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저라도 이번만큼은 확신하지 못했어요. 한 번 끊었는데, 그들이 청허루로 다시 연락을 할 줄이야.”
국진세와 잠사우의 덕담이 조금 더 이어질 것 같았는지, 의자에 앉아 있던 여벽이 일어나며 탁자를 두어 번 두들겼다.
탁. 탁.
“가져오세요, 두 분. 몇 년이나 살지도 모르는데 단주님을 위해 시간 좀 아끼자고요.”
여벽이 이미 와 있던 서찰들을 가리켰다.
“여 교림 말씀이 옳네요. 자, 시작해 봅시다.”
국진세는 웃으며 탁자로 다가왔다.
폐쇄했던 청허루를 다시 열자고 제안한 것은 잠사우였다.
교림의 신분을 유지하도록 해 준 것은 용연이었다.
학림으로 강등시켜 달라고 세 사람이 청했으나, 용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학림은 할 일이 많지 않아요. 세 분은 군림대전의 산 교본으로 남을 거예요. 단원들이 무시하면 무시당하고, 존중해 주면 그에 맞는 헌신을 하세요.
참으로 다정한 단주가 아닐 수 없었다.
단원 모두를 사방에 퍼뜨려 놓고서 어떻게 무시를 당하란 말인가?
“철혈사자맹은 알력이 심화된 모양이에요. 며칠 전엔 무성전에서 서찰을 보내더니 이번엔 진천전이네요.”
“여 교림, 저는 가장 먼저 온 남패 쪽 서찰이 흥미롭더군요.”
국진세가 세 장 중 가장 밑에 있던 서찰을 꺼내 들었다.
“순서야 정하기 나름이지요. 앞으로 얼마나 올지 모르니 일단 쌓아 두시죠, 국 교림? 어차피 단원들이 자리를 잡은 뒤에나 시작해야 하니까요.”
여벽이 고개를 끄덕이며 국진세의 의견에 동조했다.
“때가 되면 가장 먼저 누굴 보낼지는 제가 정하면 안 될까요, 두 분?”
잠사우는 이미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는지 국진세와 여벽을 보며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여벽과 국진세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세 사람은 지금의 평화로움을 끝내 줄 한 사람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정으로 지낼 때는 하루하루 긴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벗어나고 나니 이렇게 좋은 것을.”
국진세는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저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어요. 군림단주를 우리 손으로 뽑는다? 왜 이백여 년 동안 아무도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여 교림, 단주님이라 가능한 일이에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나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던 거지요.”
“국 교림의 말씀이 옳습니다.”
여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어쩌면 몽외가 담영호와 용연을 데리고 자신들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용연이 몽외와 담영호로 하여금 움직이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용연에겐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주위를 이끄는 힘이 있으니까.
***
턱, 턱, 턱.
“휘유…….”
마차에서 짐을 모두 내린 장한 둘이 창고 밖 기둥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그 얘기 들었지?”
다부진 체격의 장한이 숨을 길게 내쉬며 수건을 목에 걸치는 장한을 돌아봤다.
“얘기? 무슨 얘기?”
“며칠 전에 안와산에서 있었던 일.”
“아아, 짜증 나서 듣다 말았어.”
“왜?”
“투신께서 들어 본 적도 없는 군림단주란 자에게 화가 났다고 하셨다며?”
“맞아.”
“어차피 회주님이 무투들을 보내 죽여 버리실 거잖아. 신경 쓸 것도 없지.”
“푸하. 이 사람 몰라도 너무 모르네?”
다부진 체격의 장한이 어이없다는 듯 웃어 댔다.
“내가 뭘 모르는데?”
“이번 규합에 오백 명이 넘게 모였대. 근데 거길 지나가던 군림단주가 고수 열네 명을 죽였다잖아.”
“그게 뭐?”
“그 열네 명 중 세 명의 정체가 밝혀졌는데…….”
다부진 체격의 장한은 말을 흐리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우리도 궁금했다고요, 형.”
“나도, 나도.”
소년 둘과 장한보다 나이 많은 사내 넷이 주위를 살피며 말을 촉구했다.
상단 내에 이런 식으로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이 꽤 됐다.
총관들과 함께 장부를 살피던 인이예는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며칠 전에 무슨 규합이 있었다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총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규합? 노야께서 안와산으로 간다고 하셨던 일 때문인가?’
인이예는 일꾼들 대부분이 삼정일사회 소속인 것을 알기에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인이예는 곧바로 은영루 살수에게 시켜 자초지종을 알아보게 했다.
[안와산에서 투신이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삼정일사회의 규합이 열리는 장소를 열네 명의 죽음으로 흐린 군림단주 때문이라고…….]
‘음? 군림단주?’
인이예는 자신이 내용을 잘못 봤나 싶어 다시 한번 읽었다.
투신과 군림단주가 한 사람인데 마치 다른 사람처럼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일부러 군림단주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연 랑의 계획이구나.’
배시시.
인이예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그리고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