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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152화 (152/232)

152화

“오는군요.”

묵 노야는 비류가 용연을 기다리는 동안 의제들에게 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혼자 결정하지 않고 의제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행동 하나만 봐도 용연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이에요. 사야벌을 낭인들에게 돌려주겠다고 하더군요.”

용연은 말을 하면서도 다가오는 비류를 보고 있었다.

사야벌의 세 각주 중 유일하게 다른 각 소속 낭인들을 염려하던 사람이었다.

“투신, 그때는 낭인들을 위한 최선이 그것이라 여겼을 겁니다.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안 보이는 곳들이 생겨나면 달라질 거라 확신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럴까요?”

“흘흘. 제 경험담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묵 노야는 용연을 만나기 전과 후, 자신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저 비류란 자도 곧 그렇게 될 것이고, 그 변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역시 깨닫게 될 것이다.

“삼정일사회주님, 비류각주. 인사하고 자릴 옮기지.”

용연이 투신의 가면에 어울리는 말투와 행동을 자연스럽게 했다.

“삼정일사회주 묵 노야요.”

“비류라고 하오.”

아주 잠시 둘의 눈이 부딪쳤으나 묵 노야가 먼저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용연을 따라갔다.

용연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가 먼저 바위에 앉았다.

묵 노야는 자연스럽게 용연의 오른쪽에 섰고 비류는 어디로 서야 할지 망설이다 왼쪽으로 가서 서며 입을 열었다.

“투신, 저는 그날 이후 사야벌 사람이 아닙니다.”

“각주란 말이 듣기 싫은가? 그럼 뭐라고 부를까?”

“그건…….”

비류는 생각해둔 것이 없어 일단 말부터 꺼내놓았다.

“낭협(浪俠). 어떠시오?”

묵 노야는 마치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안 사람처럼 비류의 말을 이었다.

“낭협…… 좋, 좋네요.”

비류는 머쓱하게 웃고 나서 묵 노야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럼 앞으론 묵 회주와 비 협주로 부르도록 하지. 묵 회주, 오늘 비 협주가 할 일을 알려 줘.”

용연은 묵 노야가 비류에게 지시를 하도록 권한을 줌으로써 호칭과 서열을 정리해 버렸다.

“비 협주,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투신의 명령은 곧 법. 오늘 있을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겠네. 오늘, 삼정일사회와 사야벌과 뜻을 달리하는 낭인연합 낭협이 간단한 비무를 벌일 거야. 적당히 실력을 뽐내도록 해 둘 테니 낭협 쪽 사람들의 사기를 올려 주게.”

“……?”

비류는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가 미간을 찡그리며 묵 노야를 돌아봤다.

별것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는 그다음이네. 뒤쪽 산 초입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투신께서 분노하실 거야. 군림단주가 땅을 찢어발겨 놓았거든.”

“군림단주?”

“투신이 계신 걸 몰랐다고 해서 넘어갈 수는 없지. 한 번 더 투신의 영역에서 싸움을 하면, 도전으로 여기겠다고 선언할 걸세.”

“음…….”

비류는 도대체 묵 노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밟고 선 이곳은 강호였다.

은원이 존재하고 인과에 따른 결착이 지어지는 것이 당연한 곳인 것이다.

결국 비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묵 회주님,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주위에 누가 있는지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요? 그런 것부터 살피고 싸움을 하는 강호인이 어디 있다고요? 이 계획은 반감을 살 게 뻔합니다.”

“흘흘. 역시 투신께서 손을 내밀어 줄 만하네. 비 협주, 제대로 파악했어.”

묵 노야는 흐뭇하게 웃으며 용연을 돌아봤다.

용연의 가면 아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반감을 사려고 꾸민 일이라는 건가요?”

“아니지. 비 협주가 말한 대로 여길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네.”

“반대?”

“군림단주는 앞으로 강호를 수도 없이 들었다 내려놓을 사람이네. 당연히 강호삼대세력도 함부로 그에 대한 얘길 꺼낼 수 없겠지. 그러니 지금 해 놔야 하네. 그의 존재감이 커지는 만큼 투신의 이름도 자주 거론될 테니까.”

“하!”

비류는 묵 회주의 말에 인상을 쓰고 말았다.

아직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군림단주란 자가, 앞으로 강해질 것을 대비해 미리 포석을 깐다?

이런 궤변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더 황당한 말이 용연에게서 이어졌다.

“회주의 말대로야.”

“무, 무슨 말씀입니까, 투신?”

비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군림단주는 일인군단과 맞먹는 능력을 갖고 있다. 싸우지 않고 싸운 것처럼 알리는 것도 능력이야.”

“설마 이미 싸워 보신 겁니까, 투신? 그에게…….”

“흘흘. 비 협주, 거기까지만 하게. 싸울 필요가 없는 관계일 수도 있잖은가?”

비류가 격앙돼서 말실수를 할 것 같았는지 묵 노야가 얼른 나서서 수습했다.

그러자 비류는 자신이 한쪽만 생각했음을 깨닫고 숨을 골랐다.

“때가 되면 알려 주지. 자, 시작하자.”

용연은 주먹을 꽉 쥐며 일어났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오글거림인지 웃음을 참느라 입도 꽉 다물었다.

“흘흘흘.”

나직한 묵 노야의 웃음소리가 거슬렸지만 모른 척 앞서 걸었다.

***

터덩― 텅!

급조해서 만들어진 평평한 바닥 위에서 낭인과 비무를 펼치던 무투 후보의 동작이 갑자기 과감해졌다.

쫙, 뻗어 낸 주먹이 낭인의 팔뚝을 때려 그어진 선 밖으로 내보냈다.

―와아아!

삼정일사회원들은 환호를 터트리며 기뻐했다.

조금 전, 낭인이 이긴 뒤였기 때문이다.

“뭐야, 이렇게 허접한 비무는?”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래서 올 필요 없다니까. 소문만 요란하고 먹을 건 없네.”

삼정일사회원들 사이에 섞여 비무를 지켜보던 사내 둘은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심드렁하게 투덜댔다.

처음엔 그래도 볼만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비슷비슷한 비무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가시죠, 향주님?”

서른 중반쯤 된 사내가 사십 대 사내를 넌지시 떠봤다.

“상황 봐 가면서 말해. 삼정일사회 인간들이야 별거 없다지만, 비류가 왔어, 그 비류가. 대박 아니냐? 사야벌에서 골칫거리로 내놓은 자가 삼정일사회와? 지겨워 죽기 전까지는 참아.”

향주라 불린 사내는 자신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고복에게 면박을 줬다.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강호 전역의 정보는 하오문을 통해 들어오고 나갔으나, 귀암로가 만들어지며 거리를 기반으로 살아가던 군상들을 모두 찢어 놓았다.

지금은 한류천으로 이름을 바꿔 귀암로의 여섯 축 중 한 곳이 된 상태였다.

‘비류 각주를 잘 엮으면 사야벌이 천주님께 벌벌 기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향주 엄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멀리 비류가 데려온 낭인들을 쳐다봤다.

“회주님…… 우어, 투, 투신이시다!”

누군가 정상 가까운 곳에 있던 자의 외침이 아래쪽으로 전해졌다.

―투신! 투신! 투신!

광신도집단처럼 삼정일사회원 모두가 한 소리로 ‘투신’을 외쳐 댔다.

올려다보니 가면 쓴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 투신, 투신.”

엄대는 고복에게 눈을 부라리며 따라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투신! 투신!”

고복은 짜증 난 표정으로 외쳐댔다.

그때, 목소리 하나가 엄대와 고복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투신이다.”

나직하지만 봉우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귀에 두 글자가 박혔다.

움찔.

엄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으며 몸을 떨었다.

‘미쳤다!’

엄대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멀어서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지만, 가면 쓴 자가 회주란 자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온 것뿐인데, 그의 목소리 하나로 칠백여 명의 인원이 시선을 고정시킨 것이다.

아무리 내공이 강해도 성격이 다른 두 집단의 시선을 한마디로 강탈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엄대는 어쩌면 자신이 와 있는 곳이 생각보다 위험한 곳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오합지졸들의 모임이 아니라, 잘 준비된 거대 세력의 규합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천주님께 알려야 해.’

꾹.

환호 속에서 사람들과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몇몇 무리들의 동작은 같았다.

주먹을 쥐었고 몸을 떨었다.

모두 근방에 자리한 세력들이 보내서 염탐해 오도록 시킨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를 알아챈 삼정일사회원들은 거의 없었다.

모두가 바라마지 않던 투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손은 잡아 주지 않는다. 힘을 원하느냐? 이 자리까지 온 너희들의 용기야말로 진정한 힘이다. 이미 갖고 있는 것을……(중략)……마음을 열어야 내가 볼 수 있다. 내 세상엔 고하란 존재하지 않는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투신의 말이 끝났다.

거대한 함성 대신 정적이 봉우리를 눌러 댔다.

말을 마친 투신이 뒤로 물러나며 삼정일사회원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삼정일사회주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회주, 이게 정말 효과가…….”

용연은 묵 노야가 불러 주는 대로 내공 실어 말을 건넸지만, 저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는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와아아아아!

조금 전 모습을 드러냈을 때보다 더 강렬한 함성이 하늘로 솟구치듯이 뿜어져 나왔다.

“투신께선 저들이 의지할 수 있도록 손을 건네주신 것뿐입니다. 잘하셨습니다.”

묵 노야가 용연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주님, 이 무슨 광신도들도 아니고…….”

비류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아래쪽에서 벌어진 난리법석을 쳐다봤다.

울고불고 양손을 맞잡아 치켜들기까지.

“음? 쟤들은 왜 저래?”

비류의 시선이 삼정일사회원들 옆쪽으로 옮겨졌다.

심드렁하게 자리 잡고 구경할 줄 알았던 낭인들이 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며 자신 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이래서 무서운 거야, 비 협주. 저 안에 있으면 금방 전염되거든. 자, 이제 내 차례니 준비하게.”

“준비라시면?”

“투신의 분노를 전할 거야.”

“아! 그럼 또 언제…….”

비류가 용연을 돌아봤다.

“흘흘. 연락할 테니 비 협주는 기다리면 되네.”

“그럼 회주님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투신.”

비류는 용연과 묵 노야에게 차례로 포권을 취해 보인 후 내려갔다.

“시작하겠습니다.”

“회주님이 어떻게 하실지 궁금하네요.”

용연은 흥미를 담은 눈으로 묵 노야를 쳐다봤다.

그러자 묵 노야는 ‘흘흘’ 웃으며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불손한 자의 방문이 있었다고 하오”

묵 노야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일 시간을 주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감히! 투신이 계신 곳에서! 서쪽 초입 시체 열네 구를 발견했다는군요. 오늘 ‘낭협’의 귀인들과 보낸 시간 눈에 새겨 두세요. 도움을 서로 주세요. 그리고 오늘! 투신의 영역에 함부로 침입한 자를 추적합시다!”

묵 노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칠백여에 달하는 인원이 우르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정체가 밝혀지겠네요.”

“다른 쪽에서 숨어들어 온 자들도 감시하라고 일렀으니 며칠 걸리지 않을 겁니다, 투신.”

“알려 주세요.”

“예.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용연은 묵 노야의 반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색창 백달을 만나러 산서성으로 갈 생각이기 때문이다.

“산서성으로 갈 거예요. 제가 계속 움직여야 저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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