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림단주-151화 (151/232)

151화

팟.

바닥에 생긴 구멍이 위로 솟구쳤다.

툭.

누군가의 목이 몸통과 분리되어 떨어져 굴렀다.

그리고 횡으로 일그러지는 공간 분리.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십사객을 제외하고 살아 있던 모든 생명이 잘려 나갔다.

“아아…….”

십사객은 눈앞에서 잘려 나가는 동료들의 죽음에 신음도 내지 못한 채 입을 악다물었다.

“끝내자.”

언제 다가왔는지 십사객의 정수리 위쪽에서 용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쫘악!

십사객이 올려다볼 새도 없이 금빛 줄기가 척추를 갈라 버렸다.

홱.

용연은 자신이 만들어 낸 그 누구의 주검도 보지 않았다.

잔인하게 손을 썼다.

‘앞으로 그 누가 됐건 나를 시험하려는 자들은 전부 저렇게 될 것이다.’

십사객을 보낸 자에게 전하는 용연의 대답이었다.

군림단주로서의 첫 싸움은 이렇게 기억되려는 모양이다.

***

두 장한은 소로(小路)를 막아선 자신들의 역할에 몹시 고무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회(會)]

검은 무복의 왼 가슴에 새겨진 글자였다.

안와산의 출입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등짐을 진 예닐곱 무리가 그 앞을 지나치려 했다.

“산을 넘어갈 생각이오?”

장한은 손을 내밀어 무리를 막아섰다.

“뭐여, 녹림이여?”

무리 중 연장자로 보이는 털보 사내가 삐딱하게 장한을 쳐다봤다.

“삼정일사회 회합이 있으니 돌아서 가세요, 들.”

장한은 옆길을 가리켰다.

“사, 삼정? 니들 알아?”

털보 사내가 돌아보자 일행들 대부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뭘 하는지 모르지만 금방 지나가니 대거리하게 만들지 말고 비켜.”

털보 사내는 장한이 내민 팔을 밀어내며 지나가려 했다.

“후회하지 말고 말 들어요. 괜히 올라가다 가족들 장례 치르러 예까지 오게 하지 말고.”

장한은 지나가려는 털보를 막지 않고 조금은 귀찮은 투로 말을 건넸다.

그러자 털보 사내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멈춰 섰다.

“삼정일사회는 사람 죽이고 그러지 않지 않나?”

털보 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삼정일사회의 회합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온 참인데 모를 리 없었다.

“그거야 회주님께서 그러라고 하셨으니까 그렇죠. 오늘은…… 아니다,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 사람들 출입 못 막으면 탈퇴시킨다는 말씀은 없었으니 우리도 몰라요.”

장한은 설명을 해 주려다 이미 몇 차례 거친 일인지 포기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다른 장한과 나란히 섰다.

털보 사내는 앞쪽을 쳐다보며 마른침을 삼키다 뒤로 돌아섰다.

“형님, 그냥 돌아가죠? 구경 한 번 하려다 골로 갈 필요 없잖아요? 안 그래요, 다들?”

등짐 멘 사내 한 명이 일행을 설득하듯 되물었다.

“그, 그럴까? 네 말이 일리가 있네.”

털보 사내는 너털웃음과 함께 막아선 장한들 앞으로 간 후 산을 돌아서 가는 길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꼼수를. 크크큭.”

“잘하네. 이번 기회에 그쪽 길로 가 봐?”

조용히 있던 장한이 칭찬하며 어깨로 툭, 쳤다.

그 광경은 뒤에서 지나가려 준비하고 있던 여러 무리에게 선택할 시간을 주었다.

삼정일사회 회합을 구경하려면 일단은 저 길을 지키고 있는 장한 둘이 장애물로 여겨지지 않아야 했다.

***

힐끗.

장한 둘을 지나쳐 먼저 올라가던 세 명의 사내가 뒤를 돌아봤다.

“이것들이 남의 영역에 왔으면 허락부터 받아야지 아주 난리를 치고 자빠졌네.”

얼굴에 긴 칼자국이 새겨진 사십 대 사내는 멈춰 서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채주님은 그냥 밀라고 하시지 무슨 조사를 하라고…….”

더벅머리에 화난 인상의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등신은 뭐래는 거야? 모이는 인원이 칠백 명 가까이 된다잖아? 우리 삼산채 전원이 칠십이 안 돼. 너는 왜 먹는 게 머리로는 안 가는 거냐?”

“아, 그 말 좀 하지 마세요. 열받으니까 그러는 거 아녀요?”

더벅머리 사내는 칼자국 사내의 말에 짜증을 내며 먼저 움직였다.

“어라? 이리 안 와? 야!”

칼자국 사내가 발끈해서 더벅머리 사내를 잡으려 할 때였다.

턱.

누군가 칼자국 사내의 뒷목을 잡고서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더벅머리 사내와 다른 사내를 차례로 바닥에 눕혔다.

“무투시험 봐도 되겠다?”

칼자국 사내를 받아서 기절시킨 청년이 활약한 청년을 부러운 듯 쳐다봤다.

“저 위에 계신 분들 들으면 놀린다. 내일까지 못 움직이게 묶어 놓고 올라가자.”

미래의 무투를 꿈꾸는 십칠팔 세 청년 둘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두 청년은 떠나기 전에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돈 후 자리를 떠났다.

[무투 후보들은 동, 서, 남, 세 방향으로 올라오되 삼정일사회원이 아닌 자는 제압하고, 힘에 부치면 신호를 보내도록. 후보들의 행동을 투신께서 다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무투 후보들이 임무를 수행하며 주위를 살피는 이유였다.

***

묵 노야는 안와산 정상에 도착한 뒤로 계속해서 아래쪽을 살폈다.

매번 용연을 만날 때는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했으나, 이번엔 달랐다.

‘나쁘지 않아. 이 정도 규모의 소집은 강호삼대세력에서도 쉽지 않으니.’

묵 노야는 모인 인원을 활용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림을 열심히 머릿속으로 떠올려 봤다.

이대로 안평과 안성의 묘로 데리고 갈 수도 있다.

그 행차야말로 강호에 많은 이야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 인원을 데리고 가기엔 너무 멀었다.

‘근방에서 사건 하나만 일어나 주면 좋겠는데.’

용연을 만나야 해서 손을 쓸 시간도 없었다.

오백 명을 예상하고 소집시켰더니 투신이 온다는 말에 팔백 명 가까이 몰려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쉬워, 아쉬워.”

“뭐가 그리 아쉬운가요, 회주님?”

묵 노야가 혀를 차며 혼잣말을 꺼냈을 때, 천막 안에서 낯선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투신, 오셨습니까?”

묵 노야는 얼른 돌아서서 예를 갖췄다.

“부탁했던 인원보다 많이 모였는데, 뭐가 그리 아쉽다는 거예요?”

“저렇게나 모였으니 아쉽지요. 저 인원이라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게 해서 돌려보낼 수 있으니까요.”

“보고 듣게? 흐음.”

용연은 묵 노야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이를테면, 투신이 삼십육무투의 호위를 받으며…….”

“회주님, 잠시 저와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아, 가시죠.”

묵 노야는 용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웃으며 천막을 나설 채비를 꾸렸다.

자신의 말을 듣고 가 볼 곳이 있다?

용연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헙!”

묵 노야는 눈앞에 펼쳐진 무지막지한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연을 듣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엄청난 광경부터 조치를 취해야 했다.

“무투들은 저 앞으로 가서 혹시 모를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 주게.”

묵 노야는 데리고 온 무투 여섯에게 지시를 내리고 나서야 돌아서서 용연을 쳐다봤다.

“저들을 호원 궁주가 보냈다는 것밖엔 몰라요.”

“호, 호원?”

묵 노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버리려고 제게 보낸 것 같더군요.”

“투신, 차라리…….”

“제가 군림단주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더군요.”

“아!”

묵 노야는 용연의 한마디에 더 할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어졌다.

군림단주의 앞을 막으면 죽는다.

앞으로 용연이 어떤 싸움을 펼쳐 나갈지 알게 해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군림단주는 이렇게 처리를 했다. 그럼 투신은? 자신의 영역 내에서 이런 일을 벌인 군림단주에게 경고를 하지 않았을까?’

불쑥, 묵 노야의 머릿속에 단순하면서도 흥미로운 상황이 그려졌다.

한 사람이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데, 사람들에겐 두 고수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는 기대를 심어 주는 것.

묵 노야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회주님?”

“예?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말씀을 못 들었습니다.”

“무슨 생각인데 그리 즐거우세요?”

“군림단주와 투신의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 생각 중이었습니다.”

묵 노야의 말에 용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군림단주가 감히 투신의 영역 내에서 살인을 저지른 겁니다. 투신께선 저 광경을 보게 됐고, 삼정일사회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군림단주에게 경고를 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왔다가 둘이 되어 떠나게 되는 거군요.”

“애초에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묵 노야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용연은 웃으며 묵 노야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행동에 의미는 부여해 주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덜어 주는 사람이다.

“묵 노야와 같은 길을 걷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흘흘. 제 생각을 들여다보셨습니까, 투신?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이 난장판을 어떻게 만들 생각이세요?”

용연은 묵 노야의 말에 쑥스러워 화제를 돌렸다.

“이대로 둘 생각입니다. 그래야 저들의 정체를 알아본 자들이 알아서 군림단주의 강함을 퍼뜨려 줄 테니까요.”

“군림단주가 강할수록 투신의 존재감도 높아지겠군요.”

“그거죠. 사람들 입에 두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름이란 불리면 불리는 대로 그 가치가 올라가니까요.”

“이미 계획이 선 것 같아 안심이 돼요. 그건 그렇고, 회주님을 안와산으로 부른 이유가 있어요.”

“안 그래도 여쭈려고 했습니다.”

“비류각주도 제가 불렀어요.”

“……비류각주를 투신께서 부르셨다고요?”

“예. 제게 목숨을 바친다고 하네요.”

“…….”

“의제 세 명도 함께 올 거예요. 그리고 투신으로 만났어요. 전에 동동마을에서…….”

용연은 묵 노야의 이해를 돕기 위해 비류를 처음 만난 경위와 이번에 도움을 준 얘기까지 모두 들려주었다.

“정말이지 투신은 다가온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으시군요. 진심으로 다시 한번 감탄합니다.”

묵 노야는 용연의 얘기를 듣고 나자마자 몸을 떨었다.

영웅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화자들조차 용연의 얘길 들으면 군침을 삼킬 것 같았다.

우연처럼 만난 이들이지만 그들 모두가 결국엔 용연의 옆에 서고자 자청하게 된다.

자신이 그랬고, 팔신녀와 칠십이무투와 삼정일사회원들이 그랬으며, 사야벌의 각주인 비류까지 그 대열에 가담했다고 한다.

전율이 일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

―우오오오오와!

먼저 도착한 삼정일사회원들이 안와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다 모습을 드러내며 함성을 질렀다.

그러자 다가오던 낭인들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서로를 돌아보다 힘차게 소리를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오셨다.”

비류는 정상에 모습을 드러낸 용연을 발견하고 좌우를 돌아봤다.

신방, 유배, 기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은 이미 폐가에서 나올 때 끝나 있었다.

“가자.”

봉우리 정상이 아니라, 용연이 데려간다는 곳까지 함께 가자는 뜻이었다.

“갑니다.”

“저도 갑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뜁니다, 대형.”

세 의제의 응원에 비류는 훌쩍 몸을 띄워 정상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