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처음 뵙겠습니다. 용연입니다.”
용연은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용 공자님, 일단 두 소년의 시신부터 수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인이예의 목소리가 무거워져 있었다.
“인 소저, 이곳은 제가 처리해야 합니다.”
묵 노야는 용연이 대답하기 전에 나섰다.
“같이…….”
“이곳을 지나는 삼정일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를 갖추게 만들 겁니다.”
묵 노야는 용연이 있는 자리에서 인이예의 말까지 자르면서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혁혁한 안광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으며 허락을 구하듯 용연을 쳐다봤다.
마차로 다가오는 동안 구상해 둔 계획이 있었다.
오십 장 가까운 넓은 공간.
투신의 분노가 만들어 낸 거대한 묘.
묵 노야는 마차로 다가가 널찍한 나무 판때기를 집어 들었다.
“여기에 두 아이의 이름을 새겨 주십시오.”
묵 노야가 나무 판때기를 용연 앞으로 내밀었다.
“묘라…….”
용연은 묵 노야의 말뜻을 이해했으나 쉽게 손을 들진 못했다.
“용 공자님, 삼정일사회의 어린 생명 둘이 피기도 전에 꺾였습니다. 이제는 다들 알아야 합니다, 그런 짓을 저지르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묵 노야는 목소리에 분노를 담았다.
“인 소저, 올라가서 조금만 기다려요.”
용연은 묵 노야에게서 나무 판때기를 받으며 희미하게 웃음을 보였다.
‘뭘 하려는 거지?’
추영영은 용연이 꼼짝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건너편 구릉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묵 노야를 돌아봤다.
무덤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느냐는 질문이 담긴 표정이었다.
묵 노야는 그런 추영영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용연이 인이예 등을 왜 올려 보냈는지 건너편 구릉으로 걸어가는 것을 본 순간 알았기 때문이다.
‘역시!’
묵 노야의 예상이 옳았다는 것을 용연은 굉음과 진동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드드드― 등!
엄청난 굉음에 이어 진동이 세 사람의 발밑을 흔들었다.
콰콰콰!
건너편 구릉이 무너지는 것을 시작으로 엄청난 먼지구름이 하늘로 빨려 올라가듯 만들어졌다.
세 사람은 동시에 아래쪽으로 신형을 날렸고 마차 부근까지 가서야 날아오는 먼지를 장력으로 흩었다.
콰콰콰우―.
굉음은 한동안 계속해서 이어졌고, 먼지까지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는 무려 반 시진이나 지난 후였다.
“세상에…… 내 평생 눈앞에서 산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추영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눈앞에 쌓인 흙더미에 넋을 놓고 말았다.
할 수 있는 것과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것의 차이를 느낀 까닭이다.
마지막으로 용연이 손에 들고 있던 묘비가 된 나무 판때기를 꽂았다.
‘이제 이곳은 성지가 될 것이다.’
반짝.
묵 노야의 눈이 빛났다.
삼정일사회의 본진으로 삼으려던 고릉 골짜기는 사라졌으나, 눈앞의 산처럼 솟은 두 소년의 묘를 얻게 됐으니 오히려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돌아가서 준비할 것이 많았다.
‘투신이 만들어 갈 세상엔 고하가 없다!’
강호에서의 기준으로는 어리고 하찮은 두 소년이었지만, 투신이 만들어 갈 세상에선 더없이 소중한 삼정일사회의 일원들이다.
주루의 화자들을 통해 전할 문장 하나가 완성됐다.
용연이 내려오자 모두 마차에 올라탔다.
힐끗.
묵 노야는 마차에 타기 전, 묘비를 돌아봤다.
[안평과 안성 형제의 묘.]
누가 묘를 만들었는지 적혀 있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
“끄음.”
추영영은 용연과 인이예가 나란히 앉아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몇 번이나 침음을 삼켰다.
용연이 위험한 사람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인이예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경계심이 살짝 누그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 우리 인 상단주님이 저 사람을 만나면…….’
용연과 인장천이 마주앉은 모습을 상상하던 추영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장천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이기에 소름까지 돋았다.
인장천은 자신보다 나아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갖은 꼬투리를 잡아 뭉개질 때까지 밟거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친해지려 노력하는 사람인 까닭이다.
후자일 확률이 매우 높지만, 전자의 경우도 썩 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이예야, 혹시 용 공자를 상단주님께 보여 주려는 건 아니지?”
“예?”
인이예는 앞뒤 맥락도 없이 불쑥 질문을 던진 추영영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아버지께 보여드려야 할 것 아니야?”
“그건…….”
인이예는 볼이 확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말을 흐렸다.
“알지? 이 사부도……. 아무튼, 남녀관계가 끝까지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두 사람 모두 ‘내 사람’이란 확신이 섰을 때 인사드리는 건 어떠니?”
“……예, 그럴게요.”
인이예는 추영영의 말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 혹시 장난을 치는 건 아닌지 눈을 몇 번이나 끔뻑였다.
“그래, 안 그래도 상단주님 요즘 안팎으로 신경 많이 쓰시는데 하나 더 얹을 필요는 없잖아. 얘기해, 두 사람 보기 좋네.”
추영영은 인이예의 대답을 듣고서야 표정을 풀 수 있었다.
인장천의 지질함에 빠져 평생 헤어 나오고 싶지 않기에 용연과의 만남을 최대한 늦게 잡으려는 것이다.
‘역시나 위험한 사람이야. 위험해.’
추영영은 자는 척 눈을 가늘게 뜨며 용연을 봤다.
“흘흘. 전대 루주님의 안목에 이 묵 모가 크게 놀랐습니다.”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묵 노야는 추영영을 칭찬하며 고개까지 끄덕였다.
“……예? 안목요?”
추영영은 눈동자를 마차 천장으로 올리며 묵 노야의 칭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용 공자님은 앞으로 많은 일을 하실 분입니다. 친분을 나누는 인원이 적으면 적을수록 위험 역시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전대 루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런 뜻 아닌데, 우리 상단주님 때문에 한 말인데.’
추영영은 엉뚱한 말이라도 나올까 봐 입술을 오므리며 인이예를 쳐다봤다.
추영영의 시선엔 묵 노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려 달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용 공자님, 이렇게 된 것, 직접 말씀드리시지요?”
묵 노야는 인이예와 추영영이 나누는 무언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 소저의 사부님이시라면…….”
“제겐 사부님이지만, 은영루 사람들은 태루주님으라 부르고 있어요.”
“태루주님, 이 대 군림단주 용연이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덜컥.
용연의 소개에 인이예와 추영영은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고 말았다.
‘아놔!’
추영영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외마디 비명이었다.
용연이 위험하니 어쩌니 혼자서 했던 생각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깨달은 까닭이다.
전대 은영루주 중 한 명이 남긴 기록.
―군림단주의 능력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것 같다.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한 구절이 추영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군림단주시라면 더더욱 우리만 알고 있어야겠네요. 호. 호. 호.”
추영영은 자신의 웃음소리가 어색하기 짝이 없음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자꾸만 인장천의 멋 부리는 모습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톡. 톡.
인이예는 용연의 심장을 두어 번 두드렸다.
추영영과 동시에 전대 은영루주 중 한 명이 남긴 군림단주에 대한 기록을 떠올린 후였다.
용연의 심장에 들어가도 되는지 두드려 본 것이다.
“두드려보지 않아도 돼요. 인 소저는 벌써 들어와 있어요.”
용연은 인이예의 행동 하나만을 봤을 뿐인데 목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대답할 수 있었다.
그냥 들렸다.
당신 안에 들어가도 되냐고.
그래서 대답해 준 것이다.
“킥.”
인이예는 어이없으면서도 기분이 좋아져 입을 가리며 웃었다.
행복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묵 노야가 삼정일사회와 금룡상단의 결합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또 언제 나올 거예요?”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자 그제야 불안해지는지 인이예는 용연의 손을 잡았다.
“자주 찾아갈게요. 한동안은 단원들이 시킨 일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는지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지켜본다고요? 사천성으로 안 내려가고요?”
“오랫동안 사천성에만 머물렀잖아요. 이제 밖으로 나와야지요.”
“밖…….”
“사람들과 어울려 보려고요. 생각해 보니, 사천성에서 지낼 때처럼만 하면 어딜 가도 지내는 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들은요? 그들이…… 연 랑을 그냥 두겠어요?”
인이예는 입술과 손을 동시에 꼭 쥐었다.
그들, 당연히 강호삼대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예 매, 예 매, 예 매.”
“아유!”
인이예는 용연이 이채 띤 눈으로 자신을 보며 같은 말을 반복하자 손을 놓으려 흔들었다.
그러나 용연은 인이예의 손을 놔주지 않고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자신에게로 당겼다.
“요즘 아이들 참…… 당돌하네요. 안 그래요, 묵 회주님?”
“제가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 분이 이곳엔 아무도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흘흘.”
추영영은 심기 불편한 눈으로 도움을 청했으나, 묵 노야는 몸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빠져나갔다.
“이예야, ‘연 랑, 예 매’ 놀이는 그만하고 내리자.”
추영영은 마차가 멈춰 서자마자 내리며 인이예를 향해 코를 찡긋했다.
적당히 하고 가자는 뜻이다.
곧바로 묵 노야가 뒤따라 내렸다.
“사람들하고 친해지려는 노력을 누군가가 훼방 놓으면 적당히 화를 내서 근처에 못 오게 해야죠, 예 매. 그럴 정도는 돼요, 나.”
용연은 씨익, 웃고는 인이예를 다시 당겨 안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볼 때마다 팔 벌려서 여기에 안기도록 해 줄 테니, 예 매는 지금보다 더 예뻐지지 마요. 너무 예뻐, 예 매가 너무 예……. 윽.”
인이예는 용연의 가슴을 꼬집어 놀리지 못하게 하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새 뭘 더 했어?”
추영영은 인이예가 다급하게 마차에서 내리자 보호하듯 안으며 용연을 노려봤다.
“아무것도 안 해서 화냈어요.”
“……응?”
추영영은 제자의 황당한 대답에 이마를 짚으며 머릴 흔들었다.
그 모습을 묵 노야는 조용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용연과 인이예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나 인이예는 이내 아쉬운 이별을 또 맞이하러 다른 마차에 올라탔다.
“……투신, 호원과는 어떤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묵 노야는 용연을 만난 이후 내내 참았던 질문을 꺼내 놓았다.
“아, 호원 궁주요? 묵 회주님 말씀대로 똑똑한 사람이더군요. 자신만의 기준이 확고한…… 아니다, 자신이 만든 틀로 들어가 버렸다는 말이 맞겠네요. 아무튼 꽤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그러다 속내를 꺼내고 말았지만요.”
“속내라시면?”
“이백 년 넘게 받은 군림단의 모욕을 돌려주겠다고 했어요.”
“아…….”
묵 노야는 몸을 움찔거렸다.
평범한 말투였건만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런 당당함이야말로 용연의 진짜 무서운 점이다.
호원은 어쩌면 용연을 처음 만났을 때의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다.
낮도깨비 같은 천둥벌거숭이 애송이?
그러다 얘기를 나누며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다.
호원이라면 몇 마디만으로도 알았을 테고, 그런 상태에서 결정을 주저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