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묵 노야는 용연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음에도 기함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묵 노야의 반응을 보며 가면에 드러난 용연의 눈과 아래쪽 입이 웃고 있었다.
‘우, 웃고 있어!’
용연의 웃음을 본 묵 노야는 전신에 소름이 돋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가장 강한 무력 집단은 군림단이고, 가장 뛰어난 천재 중 한 명은 용연이었다.
최고의 조합이 탄생한 것이다.
불과 삼 년 전에 학림이었던 사람이, 천재라고 인정은 해 왔지만 설마 단계 자체를 없애 버릴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불길한 예감은 적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천재가 지금, 바로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래서 그가 움직인 듯합니다.”
묵 노야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
“호원. 그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원?”
용연은 처음 듣는 이름에 묵 노야의 설명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서른에 이전 군림단 임주 담묵의 시험을 주관했던 자예요. 그 일 이후 귀암로와 사혈명에선 호원의 관여 여부에 따라 싸움을 조절할 정도로 인정하게 됐지요. 아마도…… 그자가 투신을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사람이 철혈사자맹에 있었나요? 호원? 그가 당시 서른이었다면 지금은 오십 대 후반이 다 됐겠군요. 그런데도 암중인(暗中人)으로 남아 있다? 그건 좀 무서운데요?”
용연은 진심으로 호원이란 인물에 관심이 갔다.
묵 노야로 하여금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자가 몇 십 년 동안 자신을 감춘 채 강호를 감시하고 있었다?
여러 모로 신경이 쓰였다.
“투신, 동굴 밖에선 어두운 내부를 볼 수 없지만, 내부에 있는 사람은 밖을 환히 볼 수 있어요. 호원은, 내부에 있는 사람들조차 볼 수 없는 곳에 있는 자라고 보면 됩니다.”
“묵 회주님이 그렇게까지 칭찬할 사람이 있다니 질투가 나는데요? 흐음.”
용연은 당장 호원이란 자를 찾아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욕구에 대전 입구를 돌아봤다.
“투신, 아무래도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꿈틀.
용연은 미간을 좁히며 손가락으로 가면 아래쪽 볼을 긁었다.
고오오―.
자신이 투신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이 대 군림단주가 됐다는 말까지 했음에도, 묵 노야는 호원이란 자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후스스―.
묵 노야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호원이 어디쯤 와 있을지 생각하던 묵 노야는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무덤덤한 용연의 얼굴을 봤다.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투신을 자극한 건가?’
묵 노야는 아차 싶은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묵 회주님, 그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보세요.”
“투신, 굳이…….”
“단 총사 앞이라서, 팔신녀들 앞이라서, 일 기와 이 기 삼십육무투들 앞이라서 저를 반가워했던 건가요? 묵 회주님, 그 정도면 되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투신!”
묵 노야는 용연이 자신의 말을 자르며 차갑고 냉정한 말투로 감정을 드러내자 바로 고개를 숙였으나, 용연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재차 사과를 했다.
“투신,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바로 조치시키겠습니다.”
묵 노야는 양손을 모아 단전에 대며 허리까지 접었다.
용연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동안 삼정일사회의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해 왔던 습관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눈앞에 스스로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천명했던 용연을 두고 호원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냈다.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동안 이룬 삼정일사회의 모든 성과가 자신의 것이라 여겼던 것인가?
투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작도 할 수 없는 그 많은 일들을 말이다.
투신 옆에 설 자격이 없었다.
“묵 회주님.”
묵 노야가 돌아서서 나가려 할 때, 용연이 불러 세웠다.
묵 노야는 감히 용연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제가 말을 너무 못되게 했어요. 정말 질투가 났던 모양이네요. 주제도 모르고 말이죠. 몇 년 동안 묵 회주님에게만 맡겨 놓고는 불쑥 나타나 한다는 말이……. 사과드릴게요.”
용연은 양손을 모으고 묵 노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니, 숙이려 했다.
묵 노야에게 받은 사과를 그대로 전해 주려는 것이다.
털썩.
묵 노야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댔다.
“투신, 저만 버리시고, 삼정일사회는 데려가 주십시오. 제발, 이렇게 간청하겠습니다.”
나이를 헛먹었다.
묵 노야는 자신의 가치를 못 알아보는 자들과는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며 이전에 몇 번이나 자리에서 떠난 경험이 있었다.
이번엔 다르겠지, 이번엔 다르겠지.
다르지 않았고 한 번 더 자리를 떠나야 했다.
용연에게서 그 모습을 봤다.
부리는 사람에게 고개를 숙일 때는 오직 한 가지 경우 외엔 없다. 바로 자리를 떠날 결심을 했을 때.
이마를 땅에 댄 이유였다.
‘오해를 하셨네.’
용연은 묵 노야의 필사적인 모습에 웃을 수 있었다.
묵 노야도, 삼정일사회도 버릴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신보다 호원을 더 높게 평가하는 묵 노야에게 화는 났지만, 군림봉에서 지내느라 못 만난 시간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반응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묵 회주님, 무시해도 그만인 쪽지 한 장 때문에 삼 년을 기다려 준 분을 제가 무슨 자격으로 버려요. 좀 더 신뢰를 얻지 못한 제 책임이에요. 호원이란 자와 만나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 드릴게요.”
용연은 묵 노야를 떼어내며 웃었다.
호원이란 자가 대단하다면 그 이상의 대단함을 보여 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묵 노야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맞다, 용연은 이런 사람이었다.
바라지 않고 먼저 보여 주며 손을 내밀어 주던 사람이었다.
“호원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묵 노야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용연이 그래도 된다고 하니 믿기로 했을 뿐인데, 마음이 진정된 것이다.
***
“들어가고 나오는 길은 하나뿐이고, 길을 닦은 자들의 말로는 안에 주둔해 있는 인원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갈의는 백경하로부터 전달받은 정보를 취합한 결과를 보고했다.
곧장 지시를 내릴 줄 알았던 호원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골짜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백경하가 보낸 쪽지를 모두 가져와.”
톡. 톡.
호원은 통나무를 자른 의자가 아니라 팔걸이까지 고려해서 만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제갈의는 곧바로 십여 장의 쪽지 뭉치를 가져왔다.
호원은 나이테가 선명하게 보이는 탁자 위에 쪽지들을 한 장씩 올려놓았다.
끄덕끄덕.
미미하게 호원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쪽지에 붙어 있는 흙들을 살핀 것이다.
“들어가는 입구에 신경 쓴 것이 아니라 나가는 출구에 신경 쓴 곳이군. 점조식화로 유명한 하오문도 이렇게는 안 만들겠다. 인부들도 모르는 출구를 네 곳 이상 뚫었다라. 마치 예전 혈교의 구조를 보는 것 같아.”
톡. 톡.
호원은 반복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혈교의 후예와 군림단이 관련 있다?
절레절레.
자신이 알고 있는 군림단은 타 세력을 포용하지 않는다.
자신이 잘못 짚었다?
절레절레.
가설이 아닌 실재하는 정보들만을 쫓아왔는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럼 정체를 숨기기 위해 사라진 혈교의 흉내를 내려고 한다?
“가장 그럴듯하네. 오성위, 무성전에 혈교와 관련된 정보를 모아 놓으라고 전해.”
“바로 보내겠습니다.”
제갈의는 대답과 동시에 천에다 ‘급. 혈교 자료’라고 적어서 백경하의 일원을 불러 건넸다.
***
찌르.
“음?”
용연은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자극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대전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가면과는 무관한 자극.
용연의 시선이 대전 내부의 벽 한 곳에 고정됐다.
정확히는, 의식이 시선의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오면서 봤던 광경들이 주욱 이어지다 골짜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군림봉에서 얻은 공간 심상으로, 딛고 있는 바닥으로 기를 내보내 주변을 머릿속으로 형상화해 준다.
이곳은 군림봉의 바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른 땅이라 그런지 내보낸 기가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골짜기 너머까지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막 골짜기 너머를 지나려는 순간.
지형이 아니라 뿌연 형체가 보였다.
누군가가 이곳을 지켜보는 중인 것이다.
묵 노야를 만난 뒤라서 그런지 한 사람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호원.
군림단주가 됐다는 말을 듣고부터 묵 노야는 조급해 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던 모양이다.
긴 탁자로 가서 마련된 붓에 먹물을 찍어 문구를 적었다.
[누가 찾아왔네요.
한 시진 이내에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곳을 비우세요.]
슥.
용연은 붓을 놓고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태사의 뒤쪽 벽을 미는 것과 동시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공간 심상을 통해 이미 대전 안에 밖으로 향하는 세 군데의 통로가 있음을 알아낸 뒤였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누굴까?
시간 내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드등!
홱.
뒤쪽에서 들린 소리에 호원과 오성위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뒤쪽 삼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고오오―.
오성위 다섯 명의 전신에서 무형의 기운이 앞으로 퍼져 나가며 호원을 보호했다.
무형막은 점점 커져 무려 오 장 가까이 확장됐다.
그 상태로 호원과 오성위는 다가오는 자를 살폈다.
“이십 대 초반.”
“어두운 색의 무복입니다.”
“쓰러진 백경하들이 다시 일어납니다.”
“죽이지 않고 밀어내기만 합니다.”
“이십 장 앞입니다.”
오성위는 눈으로 보이는 것만 설명했다.
호원이 원하는 정보는 상대의 심리나 행동 습관이 아니라, 보이는 그대로에 대한 평가였다.
척.
백경하들에게 물러나란 지시를 내린 남궁찬은 이를 악다물어 턱 근육을 불룩하게 만들었다.
십 장.
다가오는 자의 생김새까지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제 무형막의 경계인 오 장.
척. 척.
“거짓말.”
모용승하는 이십 대 청년이 무형막에 닿고도 멈추지 않고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자 놀라서 혼잣말을 뇌까렸다.
나머지 네 명의 성위들 역시 말만 안 했을 뿐, 모용승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정 간격 안으로 누군가 접근하면 자연스럽게 발동되는 오행무상진기에 용연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톡. 톡. 톡.
호원은 왼손 검지로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까닥거리며 내렸다.
‘백린(白鱗)이 먼저 반응한 건 처음이네?’
왼손이 떨렸던 것을 뒤늦게 느꼈다.
용연이 지닌 무언가가 자신의 왼손에 봉인해 둔 백린으로 하여금 먼저 반응하게 만든 것이다.
자신의 기를 흡수한 백린은 영성(靈性)을 갖고 있어서 이질적인 기운이 일정 영역 안으로 침범하면 지금처럼 반응한다.
‘역시 영성을 가진 기물을 갖고 있구나.’
호원의 눈에 이채가 발해졌다.
용연이 뭔가를 느꼈는지 다가오던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