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누구보다 현실적인 감각이 뛰어난 묵 노야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지 단림은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방법을 찾아서 전하겠습니다.”
“감숙과 섬서에서 활동하는 삼정일사회 전원에게 철혈사자맹과 귀암로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곧장 보고하도록 전해.”
“바로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예, 노야.”
“앞으로 그분과 관련된 일을 지시할 때는 토를 달지 마라, 단 총사. 삼정일사회는 오로지 그분을 위해 존재하는 다리 하나 정도일 뿐이니까. 알겠어?”
“……!”
단림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오며 눈앞이 침침해짐을 느끼고 손을 허우적댔다.
“단 총사는 내 대신 이 자리를 지켜 줘야 할 인재야. 다른 사람을 또 찾게 만들지 마.”
“하악…….”
묵 노야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단림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새로운 사실 하나를 또 알게 됐다.
묵 노야는 무형의 진기를 다룰 정도의 고수였다.
이런 사람이 저토록 극진히 대접하고 싶어 하는 투신은 누구란 말인가?
“그들이 모르게 팔신녀와 일, 이 기 삼십육무투를 투신 앞에 모아 놓겠습니다.”
“……그것보다는 내가 하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배워. 그분이 움직이신 이상 단 총사에게 두 번 알려 줄 시간은 없으니까.”
묵 노야는 말을 하고 나서 너무했다는 듯 단림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용연을 만난다는 생각 때문에 평소보다 너그러워진 것이다.
씰룩.
묵 노야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설레기 때문이다.
삼 년 가까이 비워 둔 자리를 어떻게 채워 나갈지 기대가 됐다.
“아! 노야,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보고가 있습니다.”
단림은 묵 노야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다급히 손을 들어 탁자를 가리켰다.
“음?”
묵 노야는 단림이 가리킨 탁자를 돌아봤다.
조금 전 상황을 겪고 나서도 저 정도 다급함이라면 꼭 봐야 할 서찰인 것이다.
다가가 단림이 가리킨 서찰을 읽었다.
[한 달 새 같은 얼굴을 세 번이나 봤습니다. 하남 방성(方城)에서 본 자를 안휘 봉태(鳳台)에서 두 번째로 보고 아래쪽 육안(六安)에서 다시 봤습니다. 그자의 생김새는, 눈썹이 반밖에 없고 둥근 얼굴에 오 척 반 정도의 키에 통통한 체형…….
―하남 총하.]
***
반밖에 남지 않은 눈썹이 회색빛이고 둥근 얼굴에 오 척 반의 키, 그리고 통통하지만 날렵해 보이는 체형을 가진 오십 대 후반의 사내는 바빴다.
안휘성에서 하남성으로 갈 때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조사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하남 총괄지부 대부장인 이 모후량을 고작 이깟 일에 부려먹어? 맹주님 직속인 진천전도 아니고 무성전이라니!’
하남성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들 신분인 모후량은 아랫것들에게도 시키지 않을 일을 직접 하자 입이 잔뜩 튀어나왔다.
하남성에서 안휘성까지 걸어서 넘어가는 길, 마차 타고 넘어가는 길, 신법으로 횡단하는 길까지 세 가지 경우를 모두 기록하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스슷.
마지막 글자까지 모두 기록한 뒤 접자 쪽지가 꽤 두툼해져 있었다.
“하긴, 나 정도의 고수가 아니면 신법으로 다닐 수 있는 길을 알기는 쉽지 않지.”
모후량은 그나마 위안이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무슨 정보를 기록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푸드덕―.
품고 온 전서구 다리에 쪽지를 매단 뒤 날려 보냈다.
***
“단 총사, 이 내용과 비슷한 보고가 올라온 적이 있던가?”
묵 노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서찰에서 중요한 뭔가를 발견한 것이다.
“두 개는 기억납니다. 같은 내용이라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설마. 아무리 그라도 아무런 징조조차 포착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눈[目]들을 사방에 뿌렸다?’
절레절레.
묵 노야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호원의 대단함이야 알지만 그 정도까지는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호 전역까진 아니더라도 많은 지역에 삼정일사회를 배치시켰음에도 이제야 이상 징후를 알려 왔다?
자신이 만든 점조직을 누군가가 파훼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호원이라면?
특이한 발상으로 일반적인 방식을 순식간에 파훼해 내는 호원이라면?
“준비해라, 단 총사. 바로 출발한다.”
용연을 만나야 한다.
용연이라면 호원일 수도 있는 특이한 발상을 꿰뚫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용연 역시 자신의 이해 범주를 넘어선 사람이니까.
***
톡.
사자궁의 대전 안에 짧은 소리가 터졌다.
사악―.
지도에 맞춰 제작된 탁자 위로 호선이 그어졌다.
사자궁주 호원의 시선은 자신이 그린 타원의 끝을 향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떼 글자 하나 위에 올렸다.
톡.
힐끗, 올려다본 다음 글자 위로.
톡.
잠시 멈췄다가 좌측으로 세 점을 두드렸다.
톡. 톡. 톡.
마을 이름들.
시종일관 표정이 없던 호원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허락을 구하지 않겠다? 포부가 대단한 건지, 머리를 쓸 줄 아는 건지 모르겠군. 내보낸 일곱을 회수하고 하나를 다시 올려 보낸 건 의외긴 한데…….”
갸웃.
호원은 지도를 두드리며 머릿속에 그려진 경로를 좇아가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전 임주의 복수를 하려 했다면 일곱이 아니라 당시 살아남은 나머지를 전부 죽였어야 했다.
“실패라면 무능하고, 계획한 거라면 앞뒤도 가리지 못하는 미생인 건데. 나는 왜 올라오는 저 한 명이 궁금한 것일까?”
톡. 톡. 톡.
호원은 지도 위의 한 장소를 손가락으로 연속해서 세 번 두드렸다.
이 정도 시간이면 벌써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떠올라야 하는데, 머릿속에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삼십 년 가까이 정해진 수순의 일들만 처리해서 그런 걸까?
올라오는 자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았다.
톡.
호원은 응시하던 장소에서 눈을 떼고 지도를 넓게 살피기 시작했다.
올라오는 보고들을 참고해서 지형, 음식, 경관, 사람 등의 분류로 나뉘는 길들을 선으로 표시해 갔다.
싸우려 든다면 철혈사자맹, 귀암로, 사혈명의 불무(不武) 지대로 갈 테고, 조력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사람이 많은 지역일 것이다.
그 외에 세 가지 경우를 추가해 모두 다섯 가지의 길을 정했다.
“궁을 나선다. 오성위(五星位)는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따르라.”
호원이 말을 끝내자마자 대전 문이 활짝 열리며 다섯 명의 인영이 문 양쪽에 시립했다.
다섯 명의 회색 무복 옷깃에는 각자의 세가 고유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오 년에 한 번씩 교체 의식을 치르는 호원의 개인 호위들로, 개개인의 능력이 오대세가의 가주들 못지않다는 철혈사자맹 내의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최근 오성위에서 빠진 남궁세가의 장남 남궁명 덕분에 그 평가는 더욱 확고해지기도 했다.
남궁명이 다음 대 가주후보로 결정됐다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
후루룩―.
용연이 따끈한 소면국 물을 그릇째 들어 마실 때, 자리를 찾아가던 삼십 대 사내가 바닥에서 뭔가를 줍더니 탁자 위에 올려놓고 지나갔다.
사내의 행동이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워 못 본 척한 용연은 그릇을 내려놓으며 탁자 위의 쪽지를 풀어 보았다.
[섬서 고릉.
―묵 노야.]
묵 노야가 사흘도 안 돼서 화자에게 준 쪽지의 답을 보낸 것이다.
역시나 묵 노야의 능력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쪽지를 접어 소매에 넣을 때였다.
“……애가 무공을 배우겠다며 난리야.”
대수롭지 않은 대화가 귀에 들려왔다.
돌아보니, 사십 대쯤으로 보이는 중년인 셋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배우게 해. 무섭다고 도망다니는 놈보다야 백배 낫구만. 부러우이.”
“어디로 갈지 빤해서 그러지.”
“삼정일사횐가 뭔가만 아니면 되지.”
“…….”
“기야? 거길 가겠다고 하는 거야?”
“에휴, 내 속이, 속이 아니야.”
“망할 삼정일사회. 사람들이 거기만 들어갔다 하면 나오질 못해요.”
두 중년인이 주거니받거니 말을 이어 가는 동한 나머지 한 중년인은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자넨 왜 가만히 있어?”
“뭘?”
“이 친구 아들놈이 삼정일사회에 들어간다잖아? 말리지 않고 뭐하냐고?”
“왜 말려?”
조용하던 중년인이 심드렁하게 툭, 한마디 뱉자, 다른 두 중년인은 쌍심지를 켜고 노려봤다.
“공짜로 무공 알려 줘, 일도 시켜 줘, 능력되면 무투가 될 수 있도록 기회도 줘. 어디서 그런 기회를 주는데? 아들이 있으면 나는 벌써 보냈을 거야.”
중년인은 다른 두 중년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안주를 입에 넣었다.
그러자 두 중년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자, 자넨 거기에 대해 잘 알아?”
“근데 무투가 뭐야? 정말 소문처럼 무공이 강해?”
두 중년인은 화를 내는 대신 삼정일사회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용연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강호삼대세력이 아니라 삼정일사회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는 사람을 보게 될 줄이야.’
삼정일사회에 대한 정보가 없는 두 사람과 어느 정도 정보를 갖고 있는 한 사람.
둘이서 한 명을 무시하면 그만인데, 한 명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두 사람 역시 삼정일사회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용연에겐 놀랍기 그지없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 삼 년 동안 묵 노야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게 해 주는 모습이었다.
서두르고 싶어졌다.
삼정일사회의 옮긴 곳은 어떨지 기대가 됐다.
용연은 주루를 나서자마자 곧장 섬서성 쪽으로 신법을 펼쳤다.
***
두두두―.
묵 노야와 단림은 마차로 이동하며 쉴 때마다 전서구를 날려 다음 쉴 곳을 미리 알려 두었다.
그래야 임시 거처가 만들어지고 중요한 보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야,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단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묵 노야는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무리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저들이 모를 리 없을 것 같아서 여쭙는 것입니다.”
“모를 리 없지.”
“예?”
“우리와 거의 동시에 움직인 마차들을 쫓고 있을 거다.”
“노야, 무슨…….”
단림은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기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따로 지시했다. 우리가 출발할 때 일곱 군데로 금룡상단의 마차를 출발시키라고.”
“……!”
“놀라긴. 내가 같이 움직이는데 단 총사를 거칠 이유가 없지. 앞으로도 투신과 관련된 일은 단 총사를 거치지 않고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노야.”
단림은 당황해서 바로 대답하는 것도 잊었다.
찌르르, 날카로운 쇠로 폐를 찔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신감?
그런 걸 느껴선 안 되지만, 심장이 아팠다.
투신과 관련된 일에서 분리시킨다?
단림은 통렬한 비난을 받는 것 같아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너를 선택한 이유다.’
묵 노야는 단림의 표정을 읽었음에도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용연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묵 노야 역시 많이 움직여야 한다. 그럴 때 한자리에서 언제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단림은 다리가 불편해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머리가 뛰어나 자료검토와 응변이 가능한 인재였으며, 욕망을 두려워하는 성격까지 갖추고 있었다.
‘내가 왜 그리 모질게 말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씰룩.
묵 노야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나쁜 상관, 좋은 주군.
단림에게 또 다른 선물을 주기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