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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137화 (137/232)

137화

“루주님, 말씀대로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오문에선 이제 금룡상단으로 그 어떤 요구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인이예의 방 안 천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영칠주(柱) 모두에게 수고했다고 전하세요.”

인이예는 꽃병을 돌려놓으며 짧게 대답했다.

겨울이지만 창을 활짝 열어 놓고 싶을 정도로 화창한 날이었다.

‘노야의 언질 덕분에 아버지를 설득하기 쉬웠어. 하여간 대단하셔.’

묵 노야는 인장천이 왜 모건일을 만나야 하는지 아주 간략한 설명을 담은 서찰 한 통을 보냈다.

내용이야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모건일을 만나지 않으면 금룡상단이 입을 손해에 대해서 나열했을 테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묵 노야의 예측대로라면 곧 철혈사자맹과 사혈명에서도 사람을 보낼 것이다.

“아화야.”

인이예가 밖을 향해 부르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눈이 초롱초롱한 열대여섯 살의 소녀가 들어왔다.

“아가씨, 아화 여기 있습니다.”

“고 총관께 철혈사자맹과 사혈명 사람은 내가 직접 만날 테니 상단주님께는 알리지 말라고 전해 주겠니?”

“예, 다녀오겠습니다, 아가씨!”

아화는 인이예의 말을 머릿속에 담자마자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다.

“호. 호. 호. 이 년 반 전에 연서 한 통 보내신 투신님, 인내심이 하늘에 닿은 것 같은 이 소녀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인이예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

유명 상단들과 강호에 명성을 날리고 있는 문파들이 혼담을 계속 넣고 있지만,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인장천은 처음엔 빨리 시집을 가라고 성화였으나, 삼정일사회와 금룡상단의 동반 성장을 지켜보며 말을 달리했다.

―시집이야 때 되면 가는 거지. 상단이 삼정일사회와 분리돼도 지금처럼 잘 돌아가도록 해 놓고 가라.

인장천의 욕심 덕분에 이제 시집 얘긴 사라졌다.

그렇게까지 하며 버텼건만 활동을 시작했다면서 연락 한 번 하지 않는다고?

이 괘씸함을 어떻게 돌려준단 말인가?

‘윽. 왜 또 그때 생각이 나는 거냐고.’

인이예는 불에 덴 것처럼 손을 오므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삼 년 전, 용연이 자신의 손을 잡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배시시.

볼에 홍조가 폈다.

분한 것과 용연을 다시 만날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전혀 별개인 것이다.

아미를 찡그렸다 웃다가.

다른 일은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들 자신이 있는데, 용연에게만은 자꾸만 끌려가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

힐끔.

용연은 떠나온 동동마을을 돌아봤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에 절을 올리고 석실로 가 이미 읽었던 자료들을 보며 감회에 젖었다.

묘도, 석실도 말끔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육문이라면 알 수 있는 표식을 남겨 두었다.

얼굴을 보면 바로 떠나기 힘들어질까 봐 글을 남기기로 한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를 지켜 줘서 감사하다고, 석실을 여전히 깨끗이 관리해 줘서 감동받고 간다고, 앞으로도 다시 뵐 때까지 정정하시라고.

언제쯤 되돌아올 수 있을까?

남긴 글을 떠올리다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이전의 임주들은 강호삼대세력과 최소한의 인원으로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용연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상생을 위한 길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전 임주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서른 명의 고수 중 소재가 파악된 일곱 명에게 선림 일곱을 보냈다.

열흘 정도면 강호인들의 궁금증을 충분히 증폭시켰을 테니, 이제 그들은 이 대 군림단주의 명령을 받은 군림단원 일곱 명이 처리했음을 퍼뜨릴 차례다.

‘묵 노야, 오랜만이네요.’

용연은 묵 노야를 만나자마자 부탁부터 할 생각을 하니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였다.

투신이란 감투만 받았지 제대로 삼정일사회를 위해 해 준 일이 없다는 미안함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군림봉이 용연에게 준 것은 막대한 힘의 일부만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몸을 어떻게 개조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살기 위해 맞춰야 하는 끊임없는 노력.

모옥에선 그보다 더한 목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군림봉이란 백만대군을 받아 내는 방법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몸을 최정예군처럼 활용해 매번 개조시키는 것이다.

거대하게 밀려드는 힘, 얇고 가늘지만 건드리면 잘려지는 날카로운 힘, 힘줄 하나까지 반응하지 않으면 폭발하는 위험한 힘 등.

수많은 힘들이 형태로 인지될 때마다 몸을 개조해 나갔듯이, 가상의 적을 떠올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한 군림단원 스물여덟 명의 배치들을 구상했다.

―단주님의 구상은 놀랍기 이를 데가 없으나, 이대로 단원들을 배치시킬 순 없습니다. 단원들의 능력에 따라 재배치돼야 할 것 같으니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삼 년 전의 기억으로 만든 배치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일이 많아진 것 아니냐고 걱정을 하니, 진류는 호쾌하게 웃으며 오히려 열정이 생겨서 좋다고 했다.

미간의 주름이 깊어지는 걸 봤지만, 삼정에서 내려온 국진세, 여벽, 잠사우가 돕는다니 수월해질 것도 같았다.

쉬쉬쉭―.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속도를 낼 시간이 됐다.

***

웅성웅성.

감숙성 천수(天水)의 자랑이라 소문난 경일루(慶日樓)는 손님들로 미어터졌다.

근 한 달 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손님들의 숫자가 한 달 전과 비교해 배는 될 것 같았다.

“예, 예…….”

여기는 주문 받는 점소이의 인사.

“곧 나옵니다!”

저기는 허리 숙여 사과하는 점소이의 인사.

“아팔, 우장, 안 뛰어!”

층을 관리하는 사내가 손님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점소이들을 다그친다.

그때, 주렴이 걷히며 청년 한 명이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혼자시면 합석을 해야 하시고 더 오실 분이 계시면…….”

쪼르르 달려온 점소이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위에서 시킨 대로 말을 이어 가려 했다.

“혼자야.”

청년은 손을 들어 점소이의 말을 막았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점소이는 얼른 구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기는 돈을 더 내야 되나?”

청년은 점소이의 팔을 잡고서 반대쪽 구석에 사람들이 잔뜩 모인 곳을 가리켰다.

“에유, 저긴 얘기 들으러 온 사람들이에요.”

“얘기?”

“아, 예, 예, 갑니다, 가요! 어떻게, 저쪽으로 가실 거예요?”

점소이는 바빠 죽겠으니 결정하라는 듯 청년을 쏘아봤다.

“알아서 가면 되는 거지?”

“술 한 잔 드셔야 하고요. 안주는 지나갈 때 돈 내고 드시면 돼요. 그럼 알아서.”

점소이는 히죽, 웃고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고맙다.”

청년, 용연은 점소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 앉았다.

“……군림단이 선포를 한 거예요! 다들 강호삼대세력의 눈 밖에 날까 봐 설설 기는 지금! 겨우 스물아홉 명밖에 안 되는 인원으로 도전장을 내민 겁니다!”

화자인 칠십 대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술잔을 들이켜며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봤다.

―우오오오오! 더! 더!

―어서!

주루 내의 모든 사람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하! 묵 노야, 도대체 군림단의 선포는 뭐고, 도전장은 또 뭐예요?’

용연은 화자의 얘기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자신이 한 일을, 그것도 한 달여밖에 되지 않은 일을 묵 노야는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음?’

다들 군림단이란 이름에 열광하고 있을 때, 냉정한 눈빛으로 화자를 쳐다보는 세 남녀가 용연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세 남녀를 지켜보는 시선들도.

화자의 뒤에 호위처럼 서 있는 사내와 사람들과 섞여 있는 중년 남자 둘, 그리고 식사 중인 탁자 한 곳의 네 사내.

묘한 상황이었다.

서 있는 세 남녀나, 사람들 속의 두 중년 남자나, 탁자에 앉아 있는 네 사람이나, 살피는 것뿐이지 적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자가 말을 멈추며 서로를 살피고, 화자의 말이 시작되면 모두 화자에게 집중한다.

‘정보를 얻고 있는 중이란 건가?’

용연은 엄지와 검지로 턱을 쓰다듬다가 지나가는 점소이의 쟁반 위에 돈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두 번째로 들른 주루에서도 상황은 첫 번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루의 규모에 맞게 살피는 자들의 숫자가 여럿에서 한두 명으로 줄어든 것 정도뿐이기 때문이다.

여러 세력에서 사람들을 보내 주루를, 아니, 삼정일사회를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만큼 정확한 정보 제공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

묵 노야가 요즘 무슨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 알아보러 왔다가 주변에 꼬인 자들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이제 묵 노야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았다.

‘묵 노야, 군림단의 선림들은 단주의 명령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아요.’

묵 노야는 아직 자신이 군림단주가 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묵 노야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없이 금룡상단의 마차들을 봤음에도 인이예가 아닌 묵 노야를 먼저 찾은 것이다.

용연은 주루에서 나오기 전, 화자에게 팔각으로 접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

“오셨다!”

꼬깃꼬깃 구겨진 쪽지를 읽은 묵 노야의 입에서 환호가 터졌다.

“누가 오셨는데 그리 기뻐하십니까, 노야?”

단림은 정보를 분류하다 묵 노야의 환호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묶어 놨던 걸 풀 수 있는 열쇠를 가진 분이 오셨다.”

“투신!”

단림의 눈이 커졌다.

묵 노야를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웃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드디어 뵙게 되는 건가?’

단림은 흥분으로 인해 손까지 떨려 왔다.

묵 노야가 자신을 거둬 주었을 때 마음속으로 기간을 정했다.

삼 년.

그 기간 안에 묵 노야의 모든 것을 배워서 삼정일사회를 자신이 운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삼 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묵 노야에게 많은 것을 배워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일, 이십 년이 지나도 배우기만 할 것 같았다.

묵 노야의 지식과 방대한 경험은 단순히 암기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전혀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까지 폭이 클까?

의문에서 시작된 결과는, 자신과 묵 노야의 시작점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단림은 모든 배움에 ‘왜?’라는 질문을 덧붙였다.

왜 저 부분에서 질문이 시작되지?

왜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하면 되는 거지?

왜, 왜, 왜…….

끝도 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결과를 만들어 냈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노력해야 하는 묵 노야가 한 사람에 대해 말할 때 표정이 달라진다. 눈은 빛나고, 표정은 밝아졌으며, 무슨 말인지 들어 봐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투신이다.

반드시 만나 보고 싶었다.

“맞다, 그분이다. 팔신녀와 삼십육무투에게 전해라. 투신께서 폐관을 마치고 오시는 길이라고.”

“장소는 어디로 하면 되겠습니까?”

“감숙 천수니 더 올라가시기 전에 섬서성으로 모셔야지. 고릉(高陵)으로 모이라고 전해.”

“예? 고릉에선 이 기 삼심육무투들을 양성 중입니다. 일 기와 이 기를 모두 불러들이면 귀암로에서 눈치를 챌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묵 노야의 덤덤한 시선이 단림을 향했다.

눈에 해내라는 강요의 뜻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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