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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136화 (136/232)

136화

봄은 살랑바람으로 꽃씨를 가져가고, 여름은 비를 내려 산천초목을 씻어 주며, 가을은 메마른 가지에 달린 낙엽들을 비로 쓸 듯 떨군다. 그리고 겨울은 소리까지 덮어 주려 하얀 눈을 흩뿌려 준다. 지금처럼.

소르― 소르―.

길 위에 쌓인 눈을 밟고 지나가면 이내 발자국은 사라진다.

사내가 지나가면 감춰 주고, 지나가면 감춰 주고.

사내의 걷는 속도가 내리는 눈보다 느려 쓰고 있는 죽립 위에도 쌓였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던 죽립인이 멈춰 섰다.

앞쪽에 언 강물 위로 눈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사내의 입김이 연기처럼 바람을 따라 사라졌다.

온통 하얀색 천지라 어디까지가 강이고 어디부터가 땅인지 구분이 힘들다.

“내가 몇 번째일까?”

죽립을 들어 올리자 소황선이 선 굵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 대 군림단주 용연이 선림들에게 맡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이전까지는 저들의 방식에 맞춰 줬으니 이제부터는 우리들 방식으로 시작해 봐요. 먼저 사냥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살아 있는 사냥개들부터 처리하죠.

용연은 군림봉을 나온 첫날, 진류에게 외부 식구 전원을 동원해 담묵을 시험했던 서른 명의 행방을 조사시켰다.

즉흥적으로 꺼낸 말이 아니라 준비된 명령이었다.

그리고 열흘 뒤.

진류는 서른 명 중 살아 있는 인원은 모두 열여덟 명이고, 그중 일곱 명의 정보를 가져왔다.

철혈사자맹 둘, 귀암로 셋, 사혈명 둘.

그들 일곱을 사살하는데 담영호를 제외한 일곱 명의 선림을 보냈다.

“네 번째 정도면 만족.”

소황선은 감히 현승, 몽외, 서화보다 먼저 임무를 끝냈을 리 없음을 알고 있었다.

텅―.

기분이 좋아지자 강과 뭍의 경계 따위에 의미를 두지 않고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

쓰러진 목숨 일곱 개.

대문파의 전대 장로도 있었고 숨겨진 조직의 실질적인 배후도 있었으며, 광활한 평야의 지배자도 있었다.

관련된 자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의 이유를 알기 위해 대대적으로 조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멈춰야 했다.

“……종남일협은 그래서 자신이 시작한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하셨던 거지.”

절레절레.

주루의 한쪽 구석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인 흰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노인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 저…….”

종남파 이대제자 오형은 자신의 태사부 여구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노인을 향해 움직이려 했다.

턱.

“들어 보자.”

촉망받는 종남파 신성 장익이 오형의 어깨를 잡았다.

장익은 또렷한 이목구비와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어 주루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대사형, 저런 자의 말 따윈 들을 것도 없습니다.”

“사부께서 우리만 보낸 이유가 있겠지.”

“예?”

“저자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럴 리…….”

“사부님이 태사부님 일에 직접 나서지 않으셨다. 이유가 뭘까?”

장익의 말에 오형도 더는 고집부리지 못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노인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종남일협과의 싸움을 마친 그는 바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해는 저물고 피처럼 붉은 노을이 그를 잡았거든요. 자신의 손을 적신 피보다 더 진한 붉음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땅을 적신 피가 언제쯤 저 붉은 하늘과 맞닿을지 가늠해야 했으니까요.”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이 한 말을 음미하듯 탁자에 올려 진 많은 잔 중 하나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캬…….”

지켜보던 술꾼 한 명이 대신 추임새를 건넸다.

“됐고. 그, 그가 누구요?”

“거짓말 아니야?”

“종남일협 죽은 것도 모르고 여기 온 거요?”

“알지! 말하다 마니까 하는 말이잖아!”

“다 궁금해! 너 말 듣고 싶은 사람 없으니 아가리나 물어!”

“너? 아가리이? 이게 죽으려고…….”

“말 잘라 먹은 건 너가 먼저야. 그 손 뻗기 전에 내 허리에 뭐가 있는지 봐야 할 거야.”

우당탕!

결국 두 사내는 서로에게 엉겨 붙어 주먹다짐을 했으나, 으레 일어나는 일인 듯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허.”

노인은 뒹구는 두 사내에게 슬쩍 눈길만 주고는 다른 사람들을 죽 둘러봤다.

원하는 질문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잔을 들어 다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익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노인은 전대 고수 일곱의 죽음에 알고 있고, 그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한다.

느낌이 그랬다.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 줄 질문을 떠올려야 한다.

숫자?

“그자가 몇이나 죽인 거요, 노인장?”

장익은 반신반의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예상대로 노인이 표정까지 바꾸며 장익을 돌아봤다.

“질문이 틀렸소, 소협. ‘그자’가 아니라, ‘그들’이라고 해야 하오.”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들?”

“맞소, 그들이오.”

“…….”

“…….”

장익은 노인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노인은 더 이상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꿈틀.

장익의 미간이 좁혀질 때였다.

“받아 마신 술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구려. 다음 이야기는 일간 다시 이어 가기로 합시다.”

노인이 마련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점소이가 재빨리 다가와 부축하며 뒷문 쪽으로 갔다.

“그들이 누군지만 알려 주시오.”

척.

어느새 다가온 장익이 품에서 한 냥은 족히 될 은을 꺼내 건넸다.

“흘흘.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이 불쌍하지도 않소, 소협? 그냥 가게 해 주시오.”

“한마디만 해 주고 가져가시오.”

“……여기까지라오.”

내가 할 일은.

노인은 뒷말을 삼켰으나, 눈빛을 읽은 장익은 은을 품에 넣고 돌아섰다.

“아, 아니, 대사형, 왜 그러세요?”

오형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 같은 장익의 행동에 눈을 크게 치떴다.

“저 노인, 몰라.”

돌아선 장익은 확신에 차서 말해 주었다.

“모, 모른다고요?”

“몰라. 누군가가 거기까지만 말해 줬던 거야. 누군가가.”

장익은 주루를 나선 뒤, 대로에 서서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주루에서 태사부의 죽음에 대해 설파하고 있는 자들이 있고, 그것이 종남파의 귀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정작 말을 뿌리는 자는 모른다.

누군가가 필요한 정보를 퍼뜨리도록 조종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고 뭐겠는가?

“당장 사문으로 돌아간다.”

장익은 오형이 의견을 내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

[노야께서 원하는 그림이 잘 나온 것 같습니다.

―섬서 총중(總中).]

[화자 다섯 사(死). 교체 완료. 사혈명 남패주 모진이 사람들을 보내서 거릴 휩쓸고 있습니다.

―호북 총상.]

[……완수.

―귀주 총중.]

탁자 위에 펼쳐진 서찰만 세 개고 나머진 밑에 깔려 있었다.

“종남일협과 광혈(狂血)에 풍진수사까지. 며칠 만에 전대 고인 일곱이 죽었는데, 모두 그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야.”

묵 노야는 팔뚝에 소름이 돋자 옷깃을 잡아당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호 도처에 퍼져 있던 그들과 관련된 곳은 오직 한 군데밖에 없었다.

군림단.

“투신, 드디어 나오셨군요. 흘흘.”

실없는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삼 년이 채 안 됐다.

빠르면 삼 년, 늦어도 오 년이라고 하더니 더 당긴 모양이다.

이번 일엔 어떤 역할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또 교림으로서 참여했는지, 선림으로서 참여했는지도.

이 정도 기간이면 교림으론 올라갔을 테고, 혹시 선림?

절레절레.

선림이었다면 나섰을 텐데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선림까진 올라가지 못한 것이다.

삼정일사회를 움직여 일곱 전대 고인들의 죽음과 오래전 비사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해 놓았지만, 과연 그것을 용연이 좋아해 줄지는 미지수다.

안전장치 하나 정도는 해 놓아야겠다.

“인 소저에게 알려 주면 좋아하겠군.”

***

―하오문에서 상주하다시피 하며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풍진수사가 죽었다는데 강호의 일을 왜 우리 지부로 가져와서 난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체적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것 같아 보고드립니다.

인장천은 며칠 전에 장생 지부에서 받은 서찰의 내용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자신에게 보내라고 전하자마자 하루 만에 하오문에서 사람을 보냈기 때문이다.

“……여기, 여기 점 찍힌 곳을 지나간 행렬을 알려 주시면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단주님.”

긴 설명을 마친 사내는 섭선을 펼쳐 흔들었다.

문사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인장천이 보기엔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나름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노력을 한 모양이다.

“드려야죠. 하오문의 모건일 대협께서 직접 올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모건일은 인장천이 허락을 하자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되물었다.

인장천이 어떻게 밝히지도 않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아주 잠깐 의아했으나, 그보다는 자료를 받는 것이 급선무이기에 넘어갔다.

인장천은 모건일의 반문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고염 총관을 불러 귀에다 대고 물었다.

“점심이 뭐라고?”

“……!”

고염은 갑작스러운 인장천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눈이 커지더니 그 상태로 모건일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마, 말씀을 해 주시면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지금 한 말 그대로 좀 더 큰 소리로 말해 봐.”

인장천은 약지를 귀에 넣고 후빈 뒤 다시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했다.

“말씀을 해 주시면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이런, 고 총관은 모 대협의 말씀을 듣지 못했지? 모 대협, 실무는 고 총관이 담당하니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여기 지도를 보면 두 곳을…….”

모건일은 반색을 하며 고염에게 같은 설명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듣고 있던 고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모건일의 요구는 금룡상단의 기밀이나 마찬가지인 경로를 달라는 요구였기 때문이다.

“단주님, 잠시 따로 뵙고 싶습니다.”

고염은 인장천에게 허락을 구했다.

“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라도 있나?”

“그게…….”

“음? 모 대협,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인장천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며 모건일에게 양해를 구했다.

“물론입니다.”

모건일은 곧 자료를 받게 된다는 생각에 들떴다.

하오십랑 중 한 명인 은형수 이탄조차 불가능하다고 했다던가?

그런 일을 자신이 해낸 것이다. 아니, 곧 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알아보겠다며 나간 인장천이 반 시진을 넘겼는데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건일은 밖으로 나가 비녀에게 고염을 불러 달라고 청했다.

비녀는 허리를 반으로 접고서는 곧장 잰걸음으로 복도를 내달렸다.

안으로 들어와 기다리던 모건일은 결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 인 장주, 어디 계시오!”

인장천이 자신을 놀렸다는 걸 두 시진이 지나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때, 금룡상단에서 고용한 서른여섯 명의 호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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