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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135화 (135/232)

135화

―이 대 군림단주는 일 대 군림단주가 실패한 길을 완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모든 임주의 머릿속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전의 모든 형식과 순서를 파괴하며 저 자리에 오른 어린 임주가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일 대 군림단주에게서 시작된 이백여 년의 무게를 저 나이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짊어지겠다고?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짊어질 방식을 바꾸겠다고?

고개를 돌려 용연을 돌아보던 현승은 자신도 모르게 믿기지 않는 눈이 됐다.

원래 이 정도의 그릇이었는데 자신이 못 알아본 것일까? 아니면 군림봉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나?

현승의 머릿속에 질문들이 마구 떠올랐다.

자신이 이토록 궁금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이번엔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그때, 현승의 귀로 서화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내가 하겠소.”

서화는 인상을 쓰며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본 몽외는 치아를 맞물린 채 입을 한껏 벌리며 웃었다.

“크크크. 서 선림, 현 선배의 표정을 보고도 나서는 거야? 난 깔끔하게 포기.”

몽외는 보고 있던 현승에게서 눈을 떼며 어깨를 으쓱했다.

서화는 시험을 하겠다고 하고, 몽외는 포기한다니 단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현승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나는 용 임주님이 만드는 길로 간다.”

현승은 특유의 나긋한 말투로 단원들의 집중된 시선에 답해 주었다.

그러자 단원들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오자마자 여러 분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네요. 그래도 일단은 옷부터 갈아입긴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머진 진 대교에게 맡길게요.”

용연은 머쓱한 표정으로 진류를 돌아봤다.

진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잖은가?

대답도 듣지 않고 용연이 눈을 감으며 고맙다는 표시를 하더니 대전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며 단원들의 눈에 깃든 망설임을 봤다.

그 마음을 보자 모옥에서 겪었던 많은 일들이 기억 저편의 일처럼 느껴졌다.

군림단원들은 누군가의 결정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 사실이 용연으로 하여금 뿌듯함을 갖게 만들어 주었다.

군림대전을 가로지르는 동안, 용연의 몸속에 수많은 흐름들이 일어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머릿속으로 끼어드는 흐름은 한둘이고, 나머지는 중단전과 하단전을 제멋대로 요동치며 장기까지 넘나들었다.

모옥에서 이미 겪어 봤던 흐름들이란 뜻이다.

‘서 선림에게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 일부러 나서준 건가?’

용연은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잠시 멈춰 섰다.

많은 상념들이 밀려왔다.

피식.

왜 그 많은 상념들이 마음으로 읽혀지는 걸까?

모옥에서 보낸 시간이 스스로를 성장시켰음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

“얘길 좀 할 수 있을까요, 서 선배님?”

강검이 예민해진 서화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서화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이번 임주님은 담 임주님 때와 달라요. 느낌이 좋습니다.”

“느낌은 모르겠지만, 평범해도 너무 평범하시더군요.”

소황선이 다가오며 강검의 말에 한마디 보탰다.

선림이 둘이나 다가왔음에도 서화의 감은 두 눈은 떠지지 않았다.

“나오자마자 자신을 시험해 달라. 과연 전 임주셨던 담 선배님도 그럴 수 있었을까요?”

“힘들겠지. 담 선배님은 폭발 직전의 활화산 같았거든. 선림 한두 명은 힘들지 몰라도 넷 이상이었…….”

“둘 다 입 닫아.”

서화가 눈을 뜨며 강검과 소황선의 입을 막았다.

두 사람이 느낀 것을 자신이라고 못 느꼈을까.

느꼈다. 그것도 두 사람보다 몇 배는 무겁게 느꼈다.

그래서 뭐?

저 어린 임주가 뭘 하려는지 모르지만, 현승이나 몽외는 나설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자신이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지금 용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단원들이 납득할 만한 무위를 보여 줘야 하는 것이다.

말로는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무인은 강한 무위로 모든 것에 우선하는 설득력을 가진다. 적어도 서화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

‘이상해. 서 선림이 아무리 과격한 성격이라고 해도 저런 식으로 나설 분이 아닌데 왜 저러시는…… 음?’

진류는 단원들의 말을 들어 주다 놀란 눈으로 서화를 돌아봤다.

비장한 모습의 서화 옆으로 강검과 소황선이 다가가 있었다.

“자, 잠시 얘기 좀 나누고 있게.”

진류가 서화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움직이려 할 때였다.

턱.

“진 대교, 알면서 모른 척하시는 거니 임주님이 시킨 일부터 처리하시게.”

담영호가 진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가와 있었다.

“담 선림께서도 알고 있었나요?”

“선림들과 지낸 건 내가 더 오래되지 않았나?”

씰룩.

담영호가 입가를 비틀었다.

***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적휘가 허리를 숙인 채 용연이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적 학림, 오랜만이네?”

“군림봉에 계실 때는 언제 넘어오실지 몰라서 기다리질 못했습니다.”

용연이 다시 올라올 것을 알기에 줄곧 기다렸다는 말이다.

“기다렸다고? 왜?”

용연은 적휘가 어떤 뜻으로 말했는지 알면서도 반문했다.

“그, 그야…….”

“적 학림, 우린 주종 관계가 아니라, 동료야. 같은 길을 가는 동지라고. 기다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하지만, 할 일을 찾아 움직이는 건, 어느 길을 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러자, 우리.”

용연은 웃으며 장난치듯 적휘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는 지나쳤다.

순간, 용연의 몸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하단전에서 시작된 진기가 오른손으로 향했다가 사라진 것이다.

우뚝.

멈춰 서서 적휘를 돌아봤다.

적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용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 흑백이반도는 두 개잖아? 양쪽 모두 진기가 전해지면 훨씬 위력적일 것 같은데? 아니면 중단전을 하단전만큼 키운다거나.”

용연은 적휘를 향해 자신의 양손을 주억거리고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적휘는 용연의 말에 놀라 입을 벌린 채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벽이 되어 다가왔던 부분인데 용연은 단지 본 것만으로 어떻게 넘어야 할지 알려 준 것이다.

양손 수련이야 자신도 하고 있었던 생각이었으나, 중단전은 생각지도 못했다.

뒤늦게 돌아봤으나 이미 용연은 보이지 않았다.

“으앗!”

적휘는 주먹 쥔 양손을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당기며 환호했다.

“오!”

“아!”

용연이 대전 중앙으로 걸어가는 동안 인사를 건넨 단원들의 입에서 적휘와 같은 반응이 이어졌다.

스르―.

등언의 곁을 지날 때, 중단전에서 피어난 화초가 용연의 몸속에 자라났다가 사라졌다.

열매를 맺으려는 세 곳이 저절로 가늠됐다.

“등 교림, 너무 최적에 집착하지 않는 게 좋겠네요. 줄기는 충분히 탄탄한데 여전히 균형을 맞추려고 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어요. 놔줘요, 알아서 폭발하고 다시 열매를 맺도록.”

“이, 임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등언은 용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평생에 걸쳐 이룰 수 있는 성장……(중략)……이런 최고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내게, 만족? 그런 걸 생각할 시간조차 아까워.

탁목이란 자와 싸울 때 용언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등언의 말이다.

만족이란 걸 모르는 사람.

언제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채찍질하는 사람.

“지금까지 기울인 노력의 결과에 만족도 할 줄 알아야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돼요. 그래야 다시 도전도 할 수 있고요.”

“설마 제 몸 상태를 읽은 건…….”

등언은 용연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임주로서의 용연을 인정했다.

그러나 군림봉에서 삼 년을 보냈다고 손 한 번 맞댄 적 없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해 버린다?

믿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만량포로 기억해요. 같은 위력으로 몇 번이나 쏠 수 있을지 시험해 봐요. 더 많이 쏠 수 있게 되면 좋잖아요?”

“아!”

등언의 입에서 다른 단원들과 마찬가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용해라?

움찔.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언에 머릿속이 환해졌기 때문이다.

등언을 마지막으로 용연은 서화와 마주 보고 섰다.

불룩, 서화의 턱 근육이 일어나며 비장한 각오를 담은 눈으로 용연에게 말을 걸어온다.

―받아 내시게!

전력을 다할 생각인 것이다.

“와요, 서 선림.”

용연은 기꺼운 마음으로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군림단주가 되겠다는 말을 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었는지, 서화는 자신과 모든 단원이 보는 앞에서 증명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고오오―.

서화의 등 뒤에서 뻗어 나간 기운이 삽시간에 군림대전 전체를 감쌌다.

드드드드―.

무형의 공간을 뒤틀며 만들어 내는 비명이 군림대전 주위를 떠돌았다.

‘그놈이구나.’

용연은 서화의 무공이 어떤 이름인지 알지 못하지만 몸속에 형성되는 흐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중단전과 하단전에서 동시에 기를 뿜어내 충돌시켜서 발현하는 무공이다.

‘적철뇌검(赤鐵雷劍) 삼식 공(空)이오. 이걸 막아 낸다면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인정할 것이오. 허나 막지 못한다면……죽을 것이오.’

서화의 머릿속엔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고 있었다.

붉은 작살이 벼락처럼 내리꽂혀 모든 것을 비워 버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파슥―.

용연의 머리 위 공간에 붉은 금이 갔다.

이제 시작인 것이다.

쿠콰콰콰!

선림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교림들과 학림들 앞에 서서 용연과 서화의 충돌로 깨진 강기 파편들을 막아 주었다.

콰콰쾅!

드드드등―.

지진이 난 것처럼 군림대전 전체가 위아래로 흔들렸지만 어느 누구도 자리를 떠난 단원은 없었다.

“임주님이 서 선배의 적철뇌검을 막아 냈…… 음?”

말문을 열던 소황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동이 사라진 자리에 용연이 산발한 머리칼을 정리하며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크, 크크크.”

옆에서 몽외가 자신의 머리칼을 움켜쥐며 괴이한 웃음을 끊이지 않고 흘려 댔다.

“이 년 반. 범주를 넘으셨네, 이 대 단주님께선.”

현승은 용연을 ‘단주’로 칭했다.

“……!”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강검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현승의 입에서 ‘이 대 단주님’이란 호칭이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선림 서화, 단주님을 시험할 자격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서화는 떨리는 손을 마주 잡으며 정중하게 용연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와아아아아아!

강요된 침묵으로 고요하던 군림대전이 갑자기 떠나갈 듯 크게 요동쳤다.

군림단원 전원이 인정하는 새로운 군림단주의 탄생을 알리는 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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