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용연이 군림봉을 분석하기 위해 여념이 없을 때, 섬서성의 중심인 서안(西安)에서는 묵 노야가 수확을 위해 강호 판세 분석에 여념이 없었다.
“금룡상단 전 지부에 나가 있는 삼정일사회원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지?”
묵 노야는 짐승의 가죽을 말려 누렇게 만든 거대한 크기의 양피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총 이천 명입니다. 쓸 만한 회원은 약 오백 명 정도지만, 그중에서 무투 후보까지 오를 인재는 삼십 명도 안 됩니다.”
유난히 큰 머리와 가는 눈, 검붉은 입술을 가진 이십 대 후반의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앉은 채로 묵 노야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사내가 앉은 의자는 나무바퀴가 달려 있었다.
하체를 움직일 수 없는 몸인 것이다.
삼정일사회의 규모를 확장시키는 와중에 거두게 된 총사, 단림이었다.
“군림단의 움직임은 여전히 조용하고?”
“말씀하신 때로부터 일 년하고 여섯 달 동안 사천성은 물론이고 외부에서 임무 수행 중인 군림단원 소식은 전무했습니다.”
“알았다. 더 보고할 것이 있나?”
묵 노야는 눈으로 양피지 위를 누비며 기대하지 않는 투로 말을 던졌다.
“자잘한 보고 중에 겹치는 것이 있습니다.”
“말해 봐.”
“주루에 자리 잡고 있는 화자(話者)들에게 은밀히 접근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흔한 일이야.”
“금룡상단의 허드렛일을 하겠다며 줄 좀 대 달라고 했답니다.”
우뚝.
양피지를 눈으로 누비던 묵 노야의 행동이 멈췄다.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단림은 곧장 말을 이었다.
“금룡상단이나 삼정일사회가 아닌 화자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거리는 있었지만 일곱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이 다시 찾아오면 뒤를 밟으라고 일러.”
묵 노야는 상체를 일으키며 깊어진 눈으로 단림을 돌아봤다.
“느낌이 이상해서 사람을 붙여 놨더니 두 명이 철혈사자맹의 지부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철혈. 으음.”
묵 노야는 턱에 힘을 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단림의 빠른 대처를 칭찬해 줘야 하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감이 좋질 않았다.
철혈사자맹이 왜 지금 접근하는 걸까?
시기가 매우 미묘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조심해서 움직인 덕분에 곧 지난 일 년 반 동안 축적해 온 힘을 한 번에 풀어내려 하던 중이었다.
절묘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노야께선 뭔가 짚이는 바가 있으시군요?”
단림은 묵 노야를 따르겠다고 마음먹은 이후 처음 보는 표정에 놀라고 말았다.
“귀암로에서 하오문도들을 보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혈명도 아니고 철혈사자맹에서 사람들을 보냈다면 얘긴 달라진다. ‘그’가 나섰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그가 누구기에 노야께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시는 겁니까?”
“그가 누구냐…….”
톡톡.
묵 노야는 몸을 돌려세우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삼정일사회의 총사인 단림에겐 비밀이 있어선 안 된다. 다만, 깊이는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호원이다.”
묵 노야는 단림을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호원?”
단림은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오대세가연합의 수장이고, 철혈사자맹의 군사(軍師)들을 총괄하며, 특정 단체의…… 이를 테면, 군림단과 같은 언제든 돌출되어 튀어나올 수 있는 세력들의 동향을 파악한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암암리에 사람들을 움직이는 자라 강호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자를 노야께선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단림은 갑자기 묵 노야의 입에서 강호삼대세력과 관련된 정보가 쏟아지자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강호삼대세력 중 한 곳인 귀암로의 암주가 호원이란 이름이 적힌 서찰 한 통을 받고 결정을 바꿨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구왕 사도천이 말이다.’
묵 노야는 그런 단림을 빤히 쳐다보며 대답을 속으로 삼켰다. 아직은 단림에게 강호삼대세력에 대해 말해 줄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야?”
“아, 잠시 다른 생각을. 아무튼 계획을 바꿔야겠다. 삼파(三波) 모두 한꺼번에 터트리려던 것을 무기한 연기한다. 화자들에게 알려서 하던 일에 열중하란 지침을 내리도록.”
“호원이란 자 때문입니까?”
“맞다. 십여 년 전, 내가 귀암로에 몸담고 있을 때, 세 세력의 연합 집단을 맡았다. 나는 당연히 모든 계획을 귀암로 사람들로 배치시킬 요량으로 사혈명과 철혈사자맹의 무인들을 알게 모르게 외곽으로 빼돌리려 했다.”
“정보를 차단시키신 거군요. 역시!”
“감탄하긴 일러. 그 일로 엄청난 대가를 치렀거든.”
묵 노야는 그때를 기억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생각해도 황당했던 기억인 까닭이다.
“대가라고 하시면…….”
“다른 두 세력에서 나를 영입하려던 노력을 멈췄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내 몸값이 그 일 때문에 바닥으로 추락한 것이다. 물론 지금이야 전화위복으로 여길 수 있지만, 그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몇 달 동안 준비했던 계획을 와 보지도 않은 자가 지도와 부하들의 몇 마디 상황 설명만 듣고 파훼해 버릴 줄이야.”
“아…….”
“나뭇잎이 어느 방향으로 누워 있느냐고 물었단다.”
“예?”
“늪지대에 숨어 있으려면 나무줄기나 나뭇가지를 잡고 있어야 하거든. 이쪽에서 끌어오고 저쪽에서 끌어왔으니 나뭇잎이 뒤섞인 건 당연한 일. 각 지역의 특성을 머리에 담고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질문이었던 거지.”
“끄음.”
단림은 묵 노야의 말을 다 듣고 나자 저절로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너무도 엄청난 말을 들은 까닭이다.
“그런 자다.”
“뒷골목 싸움에서도 골목 하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헌데 강호에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한 가지?”
“호원이란 자가 천재란 것을 말입니다.”
“천재라.”
묵 노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원이 자신보다 수가 높은 지략가라는 것을 인정하는 까닭이다.
‘웃으신다고?’
단림은 묵 노야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천재 한 분을 알고 있다. 모든 계획은 투신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중지시킨다.”
“아! 명령을 전하겠습니다.”
단림은 탁자에 이마가 닿을 정도까지 고개를 숙였다.
묵 노야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모습에 새삼 투신이란 존재가 단림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됐다.
***
철혈사자맹은 열네 개의 전각과 마흔두 개의 단층 건물,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무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아홉 개의 전각은 정문 쪽에서 가까이 위치하고, 다섯 개의 전각은 후문 쪽에서 가까이 위치해 있다.
이 전각의 개수와 위치는 두고두고 철혈사자맹 내에 파벌을 만들어 냈다.
외부의 일은 맹주가, 내부의 단속은 궁주가 맡기로 합의했다는 것을 말면서도 말이다.
사자각(獅子閣).
사자궁주의 거처였다.
대전 태사의 앞 타원형 탁자 끝.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문사 차림을 한 오십 대 중년인이 양손을 모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악소보.
이백여 년 전에 활동하던 인물이다.
나이 스물에 강호 출도를 했고, 강호에서 스무 해를 보낸 뒤 죽었다.
첫해에 그의 손에 죽은 철혈사자맹의 희생자만 몇 백 명이고, 귀암로와 사혈명의 무인들까지 합하면 무려 천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강호삼대세력을 혼자 상대하며 죽인 인원이 천 명.
당연히 삼대세력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그를 응징하기 위해 삼불(三不) 서약을 맺고 자리를 가졌다.
―세 세력이 모인 자리에서는 무공을 사용하면 안 되고, 무기를 지녀서도 안 되며, 악소보와 관련된 말 이외엔 꺼내선 안 된다.
모두 서약을 했다.
세 세력을 대표해서 나온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서약을 어길시 다른 두 세력의 합공을 받게 된다.
첫 회동에서 세 세력은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 냈다.
―세 세력의 영역 안에 그가 나타나면, 그 영역의 주인이 처리할 수 있도록 모든 다툼을 멈추고 서로의 영역으로 물러난다.
그를 죽이는 일에 모두 합의한 것이다.
……(중략)……
다섯 해가 지났을 때, 군림단주 악소보와 군림단원들은 사천성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악소보는 점점 더 강해져서……(후략)…….]
탁.
문사 차림의 중년인이 책을 접자 그 소리가 대전을 돌아다녔다.
중년인은 대전 내부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 옆에 마련된 종이를 펼쳐 그 위에 글을 적어 나갔다.
[십사객(十四客) 소집을 명한다.
최근 반년 동안 사천성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찾아내고, 그만두라는 명령을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보고하도록 하라.
―사자궁주 호원.]
톡톡.
스스로 호원이라 적은 중년인은 서찰을 펴 놓은 채 탁자를 두 번 두드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슷.
호원이 나간 대전 안으로 다섯 명의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의 이마에는 금색 실로 궁(宮)이란 글자를 수놓고 있었다.
“이십여 년 만에 불러주셨군.”
복면인 한 명이 호원의 글을 읽고서 감회를 담아 한마디 꺼냈다.
“반년. 궁주님께서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입니다.”
다른 복면인이 서찰의 내용이 의외였던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니까요.”
“그들도 대단하네요. 이십여 년 만에 또 사람을 배출해 내다니.”
“아비지부(兒飛之不).”
복면인들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것을 지켜보던 첫 번째 입을 연 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나머지 네 복면인들이 일제히 복창했다.
아이가 날아오르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창한 복면인은 이내 호원이 남긴 서찰을 물 담긴 병에 넣고 흔들었다.
이십여 년 전, 이미 같은 과정을 경험했던 사람들이기에 알아서 자리를 떠나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복면인은 텅 빈 대전 천장을 올려다봤다.
호원이 이번에도 머리만 자르고 몸통은 보전시켜 줄 것인지 궁금했으나, 의문 따윈 품지 않았다.
강호의 주인이 베푸는 아량이기 때문이다.
십사객 중 이곳에 들른 다섯에겐 그랬다.
***
드드드― 등!
군림봉이 흔들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엄청난 진동과 한 번도 듣지 못한 굉음이 군림단원 모두를 일어나게 만들었다.
“전원 군림대전으로 가라!”
현승의 목소리가 굉음을 뚫고 군림단원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크크크. 미치겠군. 삼 년도 안 걸린 거요, 용 임주?”
몽외는 인상을 쓴 채 머리칼을 양손으로 쥐고 들어 올리자, 맞물려 있던 치아와 잇몸이 모두 드러났다.
그 정도로 흥분하고 있다는 뜻이다.
“단정은 금물이다, 몽 선림.”
“현 선배, 그때는 어땠소? 그때도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흥분됩디까?”
몽외는 흥분으로 인해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현승에게 돌렸다.
“그때는…….”
현승은 이십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다 입을 다물고는 몸을 돌려 허공으로 솟구쳤다.
선림의 막내인 담영호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 뭐야? 현 선배?”
몽외는 급히 현승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이어서 선림 서열 세 번째가 된 지 일 년이 넘은 서화가 나머지 선림들과 함께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