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움찔.
비류가 갑자기 멈춰 서며 주위를 살폈다.
“각주님, 무슨 일입니까?”
척.
비류의 오른팔인 막효가 자세를 낮추며 주위를 경계했다.
“괜찮아. 잠시 손이 저려서.”
비류는 양손을 주억거리며 막효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막효는 의아한 표정으로 비류를 쳐다봤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신수를 끼고 있는 손이 저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보셨나?”
손을 주무르던 비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댔다.
“각주님, 해가 짱짱한데요?”
막효가 ‘비가 오려나’로 듣고서 대답했다.
그러자 비류는 피식, 웃으며 막효를 돌아보고는 가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가자. 가서, 오랜만에 형제들이나 보자.”
비류에게 형제란 낭견, 낭복, 낭각의 주인들 외엔 없었다.
“각주님, 군림단원들의 행적부터 찾는 것이 어떠십니까? 호법들이 각주님을 벼르고 있다는 소문이 벌 내에 자자합니다.”
막효의 안색이 파래졌다.
“벌써 네 달이나 뒤지고 다녔는데 사천성 밖으로 나오질 않는 걸 어쩌라고? 우리가 사천성 안으로 들어가서 찾을까? 사야벌에서 군림단원들을 찾으러 다닌다고 소문나게? 나도…… 한 번쯤 볼 줄 알았다. 말하다 보니 더 맥 빠지네. 쯧.”
비류가 짜증 난 목소리로 돌아보자, 막효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자 비류는 낮게 숨을 뱉었다.
이렇게 해야 막효가 편해진다.
의견이 아니라 판단을 내리면 곤란하다. 책임을 지는 사람은 자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류는 가볍게 혀를 차고 몸을 골목 쪽으로 틀었다.
‘각주 둘이 왜 죽었는지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죽음을 방관한 책임을 지라?’
사야벌주와 열한 명의 호법들에게 둘러싸여 징계를 받던 장면이 갑자기 떠올라 비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곳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어디 가서 얘기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수가 손을 조인 것을 빌미로 의형제들을 보러 가려는 것이다.
***
드드드― 응―.
여전히 진동으로 인한 소리가 일대를 울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같다가도 잠깐씩 고요가 흐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날이 저물면서 활동하기 시작한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채웠다.
찌르, 찌르―.
군림단원들은 처음에 지켜보던 봉우리에서 앞쪽 봉우리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높이는 낮았으나 정상에 자리를 마련해 둬서 지켜보는 데엔 큰 무리가 없었다.
몽외가 주도하자 다들 따르게 됐다.
위아래로 분리된 두 개의 공간 중 아래쪽은 교림과 학림이 모여서 지켜보는 곳으로, 형도준과 우곤이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때, 우 교림이 몽 선림님의 얼굴을 봤어야 돼.”
형도준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땠는데 얼굴을 그렇게 구겨?”
우곤은 형도준의 과장된 표정에 심드렁하게 대꾸해 주었다.
“이가 내 두 배는 되겠더라. 이따만 한 이를 위아래로 딱 맞물린 채…… 악마처럼 웃고 계시더라.”
“악마? 별로 놀랍지도 않네.”
우곤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평소에도 몽외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악마가 깃든 얼굴을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거 몽 선림님이 들으셨으면 섭섭하겠는데? 우 교림의 평소 생각이 그런 줄 전혀 모르셨을 텐데 말이야.”
“악마도 몽 선림님을 보면 도망갈 것 같거든.”
우곤은 곧장 형도준의 말을 받아쳤다.
“후후후. 많이 늘었어, 우 교림?”
“많이 여위었다지?”
우곤은 더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싶지 않아 모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고 하네. 나도 때를 맞추지 못해서 본 적은 없어.”
“그럼 몇 달 동안 임주를 한 번도 못 본 두 사람이 얘길 하고 있는 거네.”
“킥. 그렇게 되나?”
“안가에서 나를 후임과 착각하던 사람인데.”
“후임 시절 얘기라면 질색하더니 웬일이래?”
“그때 외에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없으니까.”
“하긴. 그래도 여전히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중이긴 하지.”
“그러네, 학림 중에 임주가 된 사람은 전무하니까.”
“아니, 아니. 그거야 이미 끝난 거고.”
형도준은 우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더 있다고?”
“봐 봐.”
형도준은 뒤쪽과 옆쪽을 차례로 가리켰다.
뒤쪽엔 학림들이 있었고, 옆쪽엔 선림이 있었다.
우곤은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형도준을 쳐다봤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임주가 모옥에서 지내는 과정을 모든 단원이 지켜본 적이 없어. 아니, 응원한 적이 없다고 해야겠지. 그걸 신임 임주께서 해내고 계신 거지.”
말을 마친 형도준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제야 무슨 말인가 했다는 듯 우곤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거리를 좁힌 것도 처음 아닐까?”
“그거야 몽 선림님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겠지.”
“내가 볼 땐, 몽 선림님이 다가갈 수 있도록 신임 임주가 군림봉의 힘을 약화시킨 것 아닐까 싶다.”
“약화?”
형도준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다가가는 쪽의 입장에서 말했는데, 우곤은 저 안에서 끌어당겼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형 교림, 나는 신임 임주가 저곳에 들어간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시각에 와서 지켜봤어. 내 생각엔, 지금 저 안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무슨 일?”
“몇 달 만에 이 정도 거리를 줄일 수 있는…… 어떤 일이겠지.”
우곤은 눈을 가늘게 뜨며 모옥을 노려봤다.
일 대 군림단주의 거처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섣부른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우 교림 말대로라면 군림봉 자체가 괴물이란 소리네? 그럼 신임 임주는 그 괴물과 싸우는 영웅이 되는 건가?”
“지금까지의 임주들과 다른 건 분명한 것 같아.”
우곤은 형도준의 농담에 반응할 수가 없었다.
―전대 임주였던 담 선배님은 저곳에 들어간 뒤 하루도 빠짐없이 비명을 지르셨다. 듣고 있던 선림들 모두 담 선배님의 고통을 똑같이 겪었고. 그 담 선배님조차 비명을 지를 정도로 고통스러운 저곳에서, 담 선배님이 도전하실 때 태어나지도 않았을 신임 임주가 어떻게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용연이 신임 임주가 되는 것을 가장 반대했던 서화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정도로 저 모옥 안은 지옥일 것이다.
서화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 정도의.
“뭐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일 년 뒤엔 우리가 어디쯤에서 신임 임주를 지켜보고 있을지 궁금해서.”
“어디쯤? 그렇게도 신임 임주의 성공 여부를 측정할 수 있겠네. 아! 요즘 외부 식구들 난리인 건 알지?”
“보진 못했지만 충분히 알 것 같긴 해.”
“학림들이 배운 대로 돌려준다던데?”
형도준이 흐뭇하게 웃었다.
외부 식구들에게 단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학림 전원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단주가 될 사람은 타고난다는 말을 그 소식 때문에 알게 됐다.’
우곤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대 임주 중 아무도 하지 않았던 가히 파격적인 제안이라 선림들이 주저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용연이 모옥으로 들어간 뒤 며칠 만에 학림들이 그 임무에 투입된 것이다.
***
쨍!
소리가 날 것처럼 맑은 하늘.
귀로 쏟아져 들어오는 많은 소리들.
코와 입을 통해 느껴지는 냄새와 맛들.
용연은 모옥 앞 좁은 마당을 오가며 신체의 모든 감각을 충전하듯 온갖 것들을 받아들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고 앞으로 얼마나 더 모옥 안에서 지내야 할지.
더 이상 그런 것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말랐네.”
푸석한 목소리가 용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방 안에선 길게 자란 머리칼과 수염 때문에 보지 못했던 부분이었으나, 그뿐이었다.
까딱까딱.
용연은 하체에서 눈을 떼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본 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공기 안에 담긴 오만 가지 것들이 느껴진다.
이 한 번의 호흡을 위해 방 안에서 치른 전쟁은 수도 없었다.
힐끗.
아무 소리도 나지 않은 방을 돌아봤다.
“벌써 회복된 거냐?”
북북.
용연은 자신의 머리를 긁으며 낮게 숨을 내뱉었다.
다시 들어가 봐야 할 모양이다.
몸을 돌리기 전, 용연은 단원들이 자리하고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자신이 방 안에서 치르는 전쟁의 효과를 확인한 것처럼 웃었다.
짧지만 많은 것을 알게 해 주는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했다.
그래야 다시 전쟁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텅.
문이 닫혔다.
차라락!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낭수련이 형태를 변화시키며 용연을 허공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쩌쩡!
낭수련이 벽과 바닥에 박히며 낸 소리였다.
“밖에 기다리는 분들이 계셔서 마음이 바쁘다. 와라!”
반짝.
용연은 이를 악물며 눈을 빛냈다.
츠으으―.
머릿속의 수차를 돌리자 몸 전체가 반응하듯 소리가 났다.
전쟁.
용연에겐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인 시각으로 분석해 보면 전쟁보다는 시험이라 할 수 있었다.
모옥의 벽인 군림봉 자체가 내는 시험.
용연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안가의 벽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군림봉의 목소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드드드―.
허공에 떠 있는 용연의 몸이 미친 듯이 떨어 댔다.
낭수련이 벽과 바닥으로 많은 부분을 순환시켜 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까지 감안해서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용연이 풀어내기 전까지 계속해서 괴롭혔다.
‘또 달라!’
용연은 입을 벌릴 수만 있다면 욕과 함께 고래고래 악을 썼을지도 몰랐다.
이전에 풀어냈던 기운과 전혀 다른 형태의 힘이 몸속에 자리를 잡으며 휘돌기 시작한 까닭이다.
다행이랄 수 있는 점은, 용연이 머릿속 수차를 회전시킬 수 있게 되면서 몸속에 들어온 힘을 삼제의 원리에 따라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해졌다.
몇 번의 경험이 생기면서부터는 힘이 몸속 구석구석까지 들어오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고는 그때부터 밀어내고 당기고 자르길 반복하며 힘의 정체를 밝히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경험이 쌓이고 쌓이자 몸속에 들어온 힘들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힘들은 때론 사지로 퍼지기도 했고 내장에 머무르거나 피부로 번져 막을 형성하기도 했다.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순서를 정해서 몸을 채워 나간다고나 할까? 마치 자신의 몸을 이용해 뭔가를 완성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됐다.
힘들은 용연의 몸을 이용해 무공의 완성을 원했던 것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혼절하고 깨어나며 가졌던 의문의 해답이 거기에 있었다.
사람과 개미.
군림봉은 사람이고, 용연은 개미인 셈이다.
사람은 개미들을 죽이기 위해 걷지 않지만, 그 걸음으로 인해 원치 않는 수많은 개미를 죽게 만든다.
군림봉 역시 용연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해 왔던 대로 기운을 순환시킬 뿐이니, 죽지 않으려면 스스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옥은 군림봉 전체에서 가장 약한 부위이면서 개미가 몸을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구덩이일 수도 있었다.
전체가 아닌 일부라면, 개미가 빠졌다가 나올 수 있을 정도의 넓이라면, 몇 번이고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용연의 몸속으로 들어온 기운 중에 이질적인 느낌을 준 적이 없었다.
한 종류의 기운뿐이라면 해체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한 번에 한 가지라면, 얼마든지 해체시켜 주마.’
용연의 눈에 다시 생기가 차올랐다.
사냥을 하고 싶어졌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자신의 몸을 채우는 맹수를.
용연은 머릿속의 수차를 돌리며 몸속으로 들어온 힘을 해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