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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131화 (131/232)

131화

드웅―.

용연이 거대한 암벽 아래 지어진 모옥으로 들어간 지 두 시진 만에 처음으로 진동이 전해졌다.

“드디어.”

현승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모옥이 정면으로 보이는 공간에 현승, 몽외, 담영호, 그리고 진류까지 네 사람이 앉아 있었다.

“큭. 이거 숨도 제대로 못 쉬겠군.”

몽외는 현승의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구부리고 있던 상체를 폈다.

담영호와 진류도 몽외와 같은 마음이었으나 감히 말을 꺼내거나 하진 못했다.

힐끗.

현승은 안도의 숨을 내쉬는 몽외 등을 돌아보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흠. 진 대교도 이 과정에 대해선 모르는 건가?”

고개까지 갸웃거렸다.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현 선림님.”

“이전에는 선림들이 돌아가며 이곳에서 진동을 확인했어. 저 진동이 멈추면 선림 전원이 들어가 임주의 시체를 꺼내 와야 하거든.”

“……!”

몽외, 담영호, 진류가 눈을 크게 치뜬 채 현승을 돌아봤다.

“이번엔 용 임주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으니 굳이 선림들만 수고할 필요는 없겠네. 진 대교, 위에 모여 있는 단원들에게 순번 정해서 지켜보라고 해. 나도 근처에 머물 테니 진동이 멈추면 곧장 내게 전하라고 하고.”

현승은 말을 하며 앞으로 두어 걸음 걷다가 훌쩍 몸을 위로 솟구쳤다.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보고 있던 진류는 뒤늦게 놀라서 앞쪽을 내다봤다.

한 걸음만 나가면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다.

“……몽 선림님, 지금 현 선림님이 허공을 걷다가 신법을 펼치신 것이 맞습니까?”

진류는 조심스럽게 몽외를 돌아보며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인지 물었다.

“뭐, 이런 거?”

몽외는 대답 대신 허공에 우뚝 섰다가 옆으로 몸을 날렸다.

멍―.

허공답보(虛空踏步)의 신기를 잠깐 사이 두 번이나 눈앞에서 본 진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두 사람 모두 예비 동작도 없이 허공답보에 이은 신법을 펼친 것이다.

“다녀오십시오, 대교님. 여기는 제가 있겠습니다.”

담영호는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낭떠러지 옆으로 난 길을 돌아봤다.

“담 교림, 설마 몽 선림님의 경지가 현 선림님과…… 아니다, 내가 자네에게 별걸 다 묻는군. 교림들에게 말해 놓을 테니 조금만 있어.”

‘같은 걸음이지만, 그것을 펼치는 두 분의 집중도는 완전히 달랐지요. 현 선림님은 허공답보를 펼친다는 생각자체를 하지 않으신 반면, 몽 선림님은 신경 써서 펼치셨어요.’

담영호는 진류의 옷자락이 펄럭이는 것을 들으며 혼자 생각했다.

현승과 몽외의 실력을 비교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키나 할까?

서화라면 뭐라고 말을 했을까?

종이 한 장 차이?

선림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에겐 그 얇디얇은 종이 한 장의 두께로 생사가 오갈 수 있는 것이다.

움찔.

생각을 이어 가다 담영호는 몸을 떨었다.

소름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진 않았는데 막상 현승과 몽외의 신법을 보고나자 저절로 몸이 반응을 보였다.

“용 임주, 모두가 널 걱정하고 있다. 네가 약해서가 아니라, 네가 더 강해지길 바라서다. 누구처럼, 걱정했다는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길 바란다.”

으드득.

담영호의 양쪽 볼 근육이 불룩하게 올라왔다.

강한 것만이 진리인 줄 아는 분.

세상 누구보다 강해야만 했던 분.

그런 분조차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혼자라서 그런 것이다.

혼자서 이백여 년의 고립을 끊어 내려 해서 그런 것이다.

씰룩.

악물었던 이를 풀었다.

용연을 사지로 몰아넣고 안 죽길 바라는 자신이 갑자기 우스워졌기 때문이다.

***

쩌저― 쩌!

‘끄아아아아!’

용연은 응아린이 뾰족한 창이 되어 벽과 바닥을 찍어 누른 상태에서 거꾸로 매달렸다.

거대한 나무 양쪽에 끈을 연결해놓으면 이런 느낌이 들까?

무언가가 연결된 끈을 밟고 지나가려 할 때마다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너희들은 뭐하는 거야?’

속으로 악을 썼다.

엄청난 진기들이 몸을 통과하는데 하단전에 봉인해 둔 괴물들이 왜 가만히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허공에 떠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일까?

생각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설마 너희들!’

기진맥진해 있던 용연의 눈이 번쩍하고 떠졌다.

의지와 무관하게 발동되던 진기들이 몸이 이 지경인데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결론은 한 가지뿐이다.

수차를 이 층도, 삼 층도 아닌 단층 높이로 회전을 시켜 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수차를 돌리려면 진기가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몸 안에 한 줌의 진기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십 번은 정신을 잃고, 차리길 반복했다.

음식이라곤 입에 댄 적도 없는데, 매번 고통을 느끼며 깼고, 매번 고통에 의해 정신을 잃었다.

***

드등― 드드등―.

크지는 않지만 멈추지도 않는 진동이 벌써 한 달째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형 선배님, 용 임주가 문밖으로 나온 걸 본 단원은 없죠?”

곽집은 한 달째 반복되는 진동 소리를 들으며 문득 의구심이 들어 형도준을 돌아봤다.

“없어.”

“설…….”

“아니야.”

“예?”

“아니라고.”

형도준이 곽집을 돌아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저는…….”

“말이 씨가 될까 봐 입에 담지 않는 것뿐이야. 그거 아니야.”

“……예.”

곽집은 형도준의 예민한 반응에 입을 꾹 다물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아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

“으읏!”

용연은 몸을 떨었다.

누군가가 손으로 어깨부터 사선 아래 골반까지 훑은 것처럼 짜릿했다.

그러나 그 외엔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쉴 새 없이 몸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그다지 큰 감흥은 없었기 때문이다.

응아린은 위치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벽과 바닥에 박혀 있었고, 용연은 광대가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채 허공에 매달린 상태였다.

얼마 전이었다면 벌써 혼절을 했겠지만, 이젠 어느 정도 적응돼서 그동안 잊고 있던 책을 꺼내 읽는 중이었다.

―줄 사람을 못 찾으면 버려도 상관없소. 어차피 그쯤 되면 낭인왕이란 이름을 기리는 사람들도 별로 없을 테니까.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리다 떠오른 목소리였다.

사야벌 비류각 각주이면서 다른 두 각주와 전혀 다른 인성을 가지고 있던 인물.

낭인왕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받아 뒀던 책을 꺼낼 수 있었다.

응아린은 벽과 바닥에 박혀 있었으나 용연이 책을 들고 볼 수 있도록 알아서 변형을 해 주었다.

[……(중략)……요즘 제자들이 볼 때마다 여의탁(如意镯)에 대해 물어서 마음이 좋지 않다. 내 한 몸 보호할 필요가 있어서 서장(西藏) 여행 중에 가져온 물건인데 다들 왜 그리 탐을 내는지 모르겠다.

물건을 보여 준 소저의 설명으로는, 용암 속에 오랫동안 잠겨 있다가 그대로 화석이 됐음에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 정도 강도라는 말을 듣자마자 생각했다.

이거면 능히 도검불침의 보호구를 만들 수 있다고.]

‘보, 보호구? 무기가 아니라?’

용연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근본도 알지 못하는 이상한 기운들이 제멋대로 몸속을 후비고 다니고 있는 상황조차도 인상 쓰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진 내용을 보고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자르는 데 삼 년, 모양을 만드는 데 칠 년. 완성해서 팔에 차는 데 십 년이나 걸렸다.]

‘십 년!’

용연은 자신도 모르게 벽과 바닥에 박힌 응아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재질이 특별하다고만 여겼지 어떤 재료가 사용됐는지는 알지 못한 까닭이다.

무엇보다, 얼마나 얇게 잘랐으면 표면이 저토록 매끄러울 수 있단 말인가?

[아! 이 말은 남겨 둬야겠다. 내가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죽으면 그건 모두 낭수련 때문일 거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용암 속에서 녹지 않았던 물건. 처음엔 단순히 음(陰)의 성질이 강해서 버틴 것으로 여겼지만, 실험이 거듭되면서 전혀 다른 결과를 얻어 냈다.]

‘전혀 다른? 음의 성질이 아니었다는 건가?’

용연은 책에서 눈을 떼고 응아린과의 첫 접촉부터 지금까지 음한 기운이 몸에 들어온 적이 있는지를 떠올려 봤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그럼 뭐지?’

용연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낭수련은 음과 양(陽)의 성질을 모두 갖고 있다. 끊임없이 서로를 원하고 서로를 밀어냈기에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런 물건을, 그것도 양쪽에 하나씩 차고 있었으니, 당연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그래서 낭수련을 최대한 몸에서 떨어뜨려놓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고, 한 가지를 얻게 됐다. 바로 낭수련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아!”

용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벽과 바닥에 박힌 응아린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일기처럼 적혀 있어서 잠시 이 책을 쓴 사람이 누군지 잊고 있었다.

―숙주의 진기를 빨아먹으며 사는 마물.

응아린에 대한 종 노야의 평가였다.

이젠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 평가는 틀린 것이다.

응아린, 앞으로는 낭수련으로 불러야 하는 이 보물이 그동안 주인을 못 만나 누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진화하는 생물.

충분히 그 정도의 평가를 받아 마땅한 녀석이다.

“엄청난 분이셨…… 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변화시키려는 형태에 따른 진기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낭수련을 검으로 사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모든 건 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을 바꿀 순 없다. 나는 오래 살지 못한다. 이놈의 못된 성질을 나눠 주고 싶어도 아직은 그 정도 능력이 되질 못해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낭수련의 성질을 신수, 낭각, 낭복, 낭견에 전할 수 있다면 능히 십 년은 더 살 수 있을지도……(후략)…….]

“비류각주. 그분도 보통이 아니시네.”

피식.

용연은 비류를 떠올리며 웃었다.

자신이 관심을 가질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수, 낭각, 낭복, 낭견.”

용연은 네 가지 보물을 소리 내 읽으며 눈을 빛냈다.

이곳을 나간 뒤, 군림단주가 아니라 투신으로서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그때, 용연이 갑자기 몸을 떨었다.

앞가슴을 거대한 지렁이가 통과하듯 꿀렁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용연은 생각을 이어 갔다.

낭인왕이 남긴 책 덕분에 몸과 신경을 분리시키게 된 까닭이다.

꿈틀.

용연은 한 번 더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때, 처음으로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낭수련 한쪽을 통해 흘러 들어온 기운이 다른 쪽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용연의 몸속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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