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한 번 보고, 다시 보고, 또 봐도 참 접혀지지가 않는 내용이다.
기다려 달라는 말을 넣었다가 뺐다가.
십여 장 이상 썼다 버리길 반복하며 구긴 서찰을 물에 담가 지웠으나, 결국은 뺐다.
서찰을 접으면서도 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이 정도만 써도 인이예라면, 일 년 만에 만나도 변함없는 표정과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던 그녀라면, 자신의 상황을 알아주리라 믿기로 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서찰이다.
벌써부터 죄송스러움으로 가슴이 아려왔다.
[육 노야, 다들 잘 지내시죠?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안부 인사냐고 하시겠네요.
삼사 년 못 뵐 것 같아 드리는 인사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묘도 이장됐을 텐데 거기도 못 가 보네요.
바빠요, 아주 많이.
제 대신 두 분 묘와 동굴에 들러 주세요.
이번 임무만 마치면 얼른 달려가겠습니다.
―용연 배상.]
붓을 내려놓았다.
이제 정말로 일 대 군림단주의 거처로 들어가야 할 때가 왔다.
기다리고 있던 적휘에게 서찰 세 장을 전해 주었다.
“두 곳은 거기 적힌 대로 전해 주고, 나머지 한 장은 육 노야께 직접 전해 줘.”
“용 임주님, 밖의 일은 아무 걱정 마시고…… 무사하십시오.”
적휘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이든 해 주고 싶었으나 입을 뗄 엄두가 나질 않았다.
“또 보자, 적 학림.”
용연은 적휘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가 떼며 몸을 돌렸다.
차마 적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너무 담담한 손짓에 오히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 대 군림단주의 거처로 들어갔다 죽은 숫자만 넷이라고 들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요, 용 임주님!’
적휘가 고개를 들자 발 아래로 무언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용연이 어깨에 손을 올려 주었을 때부터 흐르던 눈물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것이다.
현승부터 담영호까지 천재들의 무용담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지금 이 순간의 떨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 대 군림단주.
용연에게서 꿈에서나 보던 존재의 등을 봤기 때문이다.
아지랑이 대신 눈물이 시야를 가리지만 분명 꿈에서 봤던 모습이었다.
***
[간밤에 누군가가 은밀하게 다녀갔습니다. 이곳을 알고 노야의 이름까지 적은 서찰이라 서둘러 보냅니다.
―소향.]
‘설마 벌써 교림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건가?’
서찰을 읽은 묵 노야는 기기묘묘한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 년, 길어도 오 년.
임무 때문이라면 이런 식으로 연락했을 리 없다.
당연히 교림 시험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수긍하긴 힘들었다.
교림 시험을 볼 때 외부 출입을 통제한다는 얘긴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음?”
묵 노야는 한 곳을 떠올리고 눈을 크게 치떴다.
타 문파와 달리 군림단의 단원들은 무공의 성장과 수많은 실전 경험으로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체계였다.
그런데 출입을 통제시킨다?
오직 한 곳뿐이다.
일 대 군림단주의 거처이자 군림단의 성역.
오직 들어간 사람만 나올 수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거긴 다음 대 군림단주로 내정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어. 벌써 투신에게 그런 자격이 주어졌을 리 없어.’
절레절레.
묵 노야는 완강하게 고개를 흔들며 만일의 경우를 떠올리려는 생각을 흩트렸다.
“노야,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교선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음? 그런 건 아니고. 아니다, 투신과 관련된 일이니 너도 알아 둬야지. 투신께서 사오 년 폐관수련을 하실 모양이다.”
묵 노야의 말을 들은 교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투신을 사오 년 동안 못 본다는 생각을 하자 불안해진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묵 노야는 속으로 웃었다.
가장 이성적인 교선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왔다면 다른 신녀들은 볼 것도 없었다.
팔신녀들의 생각과 행동을 모두 투신에게 맞춰 주입하고 또 주입한 결과가 드디어 반응으로 나온 것이다.
“불안해할 것 없다. 투신의 모든 결정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잖느냐? 나는 투신께서 결정을 내리셨으니 그 진의를 파악해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마. 너희들은.”
“비우고 또 비워서 하루 빨리 삼십육무투가 탄생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묵 노야가 잠시 말을 멈추자 교선은 곧장 준비된 대답을 꺼냈다.
“그래. 세상 사람들 모두가 투신을 섬기는 그날은 온다. 우린 그날의 초석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좀 더 힘을 내자꾸나.”
묵 노야는 가만히 교선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가 거두었다.
“감사합니다. 흑…….”
교선은 묵 노야의 손이 어깨에서 느껴지자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기루에서 몸을 팔던 자신들을 거두어 주고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존재를 섬기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살아가야 할 이유.
태어난 것을 저주하던 팔신녀들에겐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의미였다.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팔신녀들에게 이보다 고귀한 일은 없었다.
묵 노야는 일어나 방을 나가는 교선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다 돌아섰다.
팔신녀들의 몸을 매개로 태어나게 될 삼십육무투는 능히 강호 일류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다른 곳에서 탄생될, 삼십육무투들의 선망이 돼야 할 일 대 무투들은 특별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 상황인데 용연이 못 온다니 난감했다.
“금룡상단과 삼정일사회를 엮을 수 있으면 무투들의 출도 시기는 늦춰도 될 것 같기는 한데.”
창밖을 바라보던 묵 노야의 눈빛이 깊어져 갔다.
***
“이예…….”
추영영은 일부러 발소리를 냈는데도 인이예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고 들어서다 멈춰 섰다.
세상에 하나뿐인 제자가 처연한 자세로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니, 이예야?”
인이예를 안아 주었다.
“사부님, 용 공자가 연서를 보냈는데…… 당분간 못 본대요.”
인이예는 추영영의 품에 안긴 채 몇 자 적혀 있지 않은 서찰을 손에서 놓았다.
‘그러게 왜 단주도 아니고 단원에게 마음을 줘서는.’
추영영은 서찰을 보고 먼저 한숨부터 길게 내쉰 뒤,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사랑하는 인장천은 돈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조금의 손해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짠돌이였고,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만 좋아했다.
금룡상단이 아직은 강호제일상단이라 불리기엔 규모와 지지해 줄 세력이 모자랐다. 그렇게 되기 위해 투자는 물론이고 신경을 써야 하는데, 인장천은 왜 그런 수고를 하느냐는 주의였기 때문이다.
―내 경쟁 상대? 왜 밖에서 찾아? 일 년 전의 나! 나 자신만이 내 경쟁 상대다.
더 올라갈 곳이 없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다니.
물어본 추영영이 창피해서 주위를 살펴야 했다.
그러나 왜 그런지 모르지만, 인장천의 그런 궁상맞음에서 추영영은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자신이 옆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 아니, 자신마저 옆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 인장천은 집착해 주었고, 그 또한 바라던 바이기에 만족스러운 사랑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 추영영의 눈에 인이예의 사랑이 마뜩잖아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예야, 이 사부에게 말해 보렴. 움직이지 못하게 해서 옆에 놔줄까? 아니면 너 없인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눈을 빼놓을까?”
“……야 해요.”
인이예는 추영영의 품에서 떨어지며 웅얼거렸다.
“응? 뭘 해달라고?”
“그 사람요.”
“그래, 그 단원.”
“저한테 정말 잘해야 한다고요. 맨날, 기다려, 기다려. 내가 꾸끼도 아니고, 뭘 맨날 기다려야 하는 건데요?”
“그래, 내 말이! 감히 이 추영영의 애제자를 제가 뭔데 기다리라고 하는 건데!”
추영영은 인이예가 용서하는 쪽으로 마음먹은 것을 알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살법 수련이나 은영루의 운영에 있어서는 자신보다 더 엄격한 인이예였으나, 그 이상한 녀석에 대해서만큼은 조금도 이기려 들질 않음을 아는 까닭이다.
“알아봐야겠어요. 위험한 임무라도 맡았다가…… 어머, 사부님, 제가 지금 이상한 말 했죠? 히잉, 말이 씨가 된다는데 어쩌죠?”
인이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댔다.
‘내 제자지만 참…… 가지가지 한다.’
추영영은 웃으며 제자의 귀찮은 첫사랑 놀이가 하루 빨리 끝나길 속으로 바랐다.
“사부님, 지금 저 한심하게 보셨죠?”
“첫사랑은 원래 아픈 거야.”
“우리 아버지가 첫사랑이라고 하셨잖아요?”
“인 단주님과 두 번 만나는 건 아니니까.”
“아, 그래서 첫사랑인 거예요?”
“아니, 인 단주님과의 사랑은 그런 어설픈 사랑이 아니야. 뭐랄까, 우려낼 대로 우려낸 삶의 동반자? 운명적인 사랑이지. 어우, 이예야, 이거 봐 봐. 닭살 돋았잖아. 단주님 생각만 했는데도 이래.”
추영영은 걷은 소매를 내리며 몽롱한 표정으로 몸을 꼬았다.
“사부님, 저는 어설퍼서 좀 더 아파 할래요. 그만 가 주시면 안 돼요?”
“응? 그런데…… 내가 왜 여길 왔더라?”
추영영은 엉거주춤 일어나려다 뭔가 빠뜨린 것 같아 인이예를 빤히 쳐다봤다.
“저 보러 오신 것 아니셨어요?”
“맞지. 근데…… 아! 너를 찾는 손님이 찾아왔어. 지금 단주님과 얘기 중이시다.”
“저를요?”
“노인이던데? 묵 노야라고 하더라. 말을 어찌나 잘하는지 단주님이 굉장히 좋아하시더구나.”
‘묵 노야라면 용 공자님과 함께 그 배에서 만났던 분 아니야?’
인이예는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런 좋은 방안이! 하세요, 열 번 하세요! 아니다, 백 번 하세요! 제가 지부 전체에 연락을 취해 놓을 테니 노야께선 사람만 보내 주면 됩니다.”
인장천은 묵 노야의 제안이 마음에 들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방이 떠나갈 정도로 웃어 댔다.
“아버지, 이예예요. 들어갈게요.”
인이예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우리 귀한 딸이 왔구나? 아비 일 돕느라 바쁜 줄 알았더니 언제 이런 귀한 분과 친분을 다졌던 게야? 뭐해, 어서 인사드려야지?”
인장천은 멍하니 선 인이예를 다그쳤다.
상황을 전혀 모르고 들어선 인이예는 일단 인장천의 말에 따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야.”
“헐헐. 그새 더 아름다워지셨소, 인 소저?”
촌로의 모습을 하고 앉아 있던 묵 노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취해 보이며 예를 갖췄다.
“……감사드려요.”
인이예는 얼른 손을 포개 소매를 들어 올리며 묵 노야의 눈을 쳐다봤다.
빙긋.
묵 노야가 웃으며 눈가 주름을 깊게 만들었다.
“금룡상단과 함께해 볼 사업이 있어 찾아뵈었다오. 인 소저에게 먼저 알리고 싶었으나, 친분과 사업은 구별해야 한다는 평소 신념 때문에 그러지 못했소. 이 늙은이를 이해해 주시겠소?”
“당치도 않으세요. 평소 공사를 구분하는 자세야말로 장사꾼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헌데, 어떤 사업이신지…….”
인이예가 눈을 반짝이며 묵 노야를 쳐다봤다.
“제가 데리고 있는 젊은이들이 제법 됩니다. 힘만 쓸 줄 알지 다른 건 영 엉터리지 뭡니까? 해서, 셈도 배우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눈에 새길 곳을 찾던 중 금룡상단이 떠올라서 곧장 달려왔습니다. 세 달은 일을 가르치신다 생각하고 삯을 안 줘도 되니, 허드렛일이나 좀 시켜 주면 어떻겠습니까?”
묵 노야는 사정하듯 머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