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몽외는 자신이 삼 년 전, 만승서고 앞에서 했던 얘기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올라와라. 그래야 저 녀석…… 아니지, 이젠 용 임주라고 불러야겠구나. 크크크.”
“도전 자격을 가졌으니까요.”
담영호는 입가의 근육을 더욱 비틀었다.
‘임주’란 호칭을 듣자 아버지, 담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궁금하네. 지킬까, 바꿀까? 크크크.”
“용 임주가 군림봉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예 안 하시는군요, 몽 선림님?”
“담 교림은 용 임주가 죽을 것 같으냐?”
“…….”
“크크크. 아무튼 올라와라. 그래야 뒤를 받쳐 줄 수 있을 테니까. 먼저 간다.”
몽외는 대답하지 않는 담영호를 향해 맞물린 치아를 모두 드러내며 웃고는 곧장 단애로 몸을 날렸다.
“……죽을 사람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용 임주는 바꿀 겁니다.”
담영호는 몽외의 혼잣말에 대한 답을 자신이 꺼냈다.
씰룩.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단에 대해 잘 알아야 지킬 텐데, 저와 몽 선림님이 알려 준 것은 모두 단의 부조리뿐이었거든요. 지난 삼 년 동안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조해 왔듯이, 단 역시 그렇게 만들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힐끗.
조금 전 용연과 현승의 웃음소리가 들렸던 곳을 돌아봤다.
시작부터 현승을 웃게 만들었다.
인간적인 매력이야말로 용연의 가장 큰 무기일지도 모르겠다.
담영호는 시선을 거두고 몽외가 뛰어내린 곳을 향해 몸을 떨어뜨렸다.
***
군림대전 아래 마련된 모옥에는 단원들이 나누어 들어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공표가 날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어찌 된 일인지 밤이 될 때까지 현승과 용연은 봉우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몽 선림님, 잠시.”
진류가 모옥을 열고 몽외를 불렀다.
밖으로 나가자 진류와 담영호가 함께 있었다.
“뭐냐, 진 대교?”
“현 선림님이 보자고 하십니다.”
“담 교림도?”
“예, 저까지 셋이서 함께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진류는 봉우리를 올려다봤다.
용연과 현승이 아직 위쪽에 있다는 뜻이다.
진류가 안내한 곳은 봉우리 중턱이 아닌 군림대전이었다.
“왔네?”
현승은 여전히 나긋한 목소리로 몽외와 담영호를 맞아 주었다.
“불렀으니 온 것 아닙니까?”
몽외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앉았다.
현승과 마주 보고 앉자, 그 옆을 담영호가 앉았고, 진류는 본능적으로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중앙에 앉았다.
“용 임주가 따로 만나겠다는 걸 번거로울 것 같아서 내가 오라고 시켰다.”
“요, 용 임주?”
가장 먼저 놀란 사람은 진류였다.
현승은 이미 용연을 임주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크크. 기분이 어떠신가, 용 임주?”
몽외는 특유의 치아를 맞물린 채 웃으며 용연을 쳐다봤다.
“과한 호칭이라 많이 어색합니다. 그래도 적응을 해야겠지요.”
용연은 멋쩍은 듯 웃었다.
반나절 동안 현승과 대화를 나눈 뒤라 그럴까?
몽외를 대하는 것이 이전보다 수월해진 느낌이었다.
갸웃.
무거운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고 나니 그나마 가벼운 몽둥이엔 견딜 만해진 건가?
용연은 현승을 돌아봤다.
그가 의문을 갖게 만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현승은 용연의 눈빛을 보고 활짝 웃었다.
“후후후. 이거야, 이거. 몽 선림, 용 임주는 어떻게 이런 걸 바로 아는 거지?”
현승은 용연이 왜 자신을 돌아봤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과 단둘이 있을 때와 몽외 등이 다가왔을 때의 미묘한 분위기를 용연이 느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 선배의 가르침도 없이 용 임주 스스로 깨달은 모양이네. 크크크. 담 교림, 우리가 무슨 얘기 하는지 알지?”
몽외는 자신보다 용연에 대해 잘 아는 담영호에게 대답을 미뤘다.
그러자 담영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용 임주는 본인도 모르게 공기의 밀도를 느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크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몽외는 담영호의 대답이 만족스러워 치아를 모두 드러내며 웃었다.
“본능적으로 한 것이니 모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담영호는 용연이 듣기만 하고 있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본능적이다?”
현승은 담영호의 말이 순간적으로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용 임주는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아! 아아, 담 교림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네. 좋은 해석이다.”
담영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승은 탄성을 터트렸다.
잊고 있던 부분을 담영호가 콕 짚어 내 준 까닭이다.
용잠에게서 발현됐을 때는 위화감으로 다가왔던 감각이, 용연에게서 발현되자 매우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와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제 할아버지 얘기라면 저도 듣고 싶습니다.”
용연은 눈을 반짝이며 현승과 담영호를 번갈아 쳐다봤다.
“용 임주도 아는 얘기야. 할아버지께서 참여한 임무에 다친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 그거야.”
“그…….”
담영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승이 운을 뗐다.
용연의 시선이 현승에게로 향한 것은 당연했다.
“용 임주의 할아버지를 직접 본 사람으로 좀 더 설명을 더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공기의 무게를 느끼기 힘들어.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용 임주의 할아버지는 그게 됐지. 그래서 다른 단원들보다 더 많이 보고, 더 넓게 움직일 수 있었어. 조금 전에 나와 있을 때의 공기로 저 세 사람을 감싼 건 내 평생 오직 용 임주의 할아버지에게서밖에 못 봤거든.”
“제가 세 분을 감쌌단 말입니까?”
“분명히. 용 임주가 할아버지와 다른 점이기도 한 것 같아. 그분은 뭔가를 궁리하길 즐겨 해서 항상 혼자였거든. 그런데 용 임주는 포용 쪽인 모양이다.”
현승은 용잠에 대한 얘길 하면서 왜 몽외와 담영호가 용연에게 기대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포용.
서열이 올라갈수록 무공에 대한 집착이 말도 못하게 강해지기 때문에 다른 단원이나 임무에 신경을 할애할 여유가 없게 된다.
반면에, 학림 때는 온갖 임무를 수행하고 완수해야 하는 시기라 무공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런데 용연은 무공뿐만 아니라 포용 쪽에 무의식적으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현 선림님.”
용연은 현승이 말로는 칭찬을 한 것 같은데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가 없자 망설였으나,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할아버지와 다르다는 얘길 한 것뿐이네. 자, 이제 세 사람 차례군.”
현승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어 몽외 등을 가리켰다.
그러자 용연은 호흡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얘기를 해야 해서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려는 것이다.
“먼저 진 대교님께 제안드릴 것이 있습니다.”
“듣고 있네.”
“외부 식구들에게도 단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줬으면 합니다.”
“용 임주, 그건…….”
진류가 고개를 흔들며 부정적인 말을 하려할 때, 현승이 손을 들어 막았다.
당황한 진류는 용연과 현승을 번갈아 쳐다보다 안 되겠는지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백여 년 전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했던 적이 있는데, 파벌이 생겨 폐지됐네. 지금이라고…….”
“그때는 용 임주가 주관한 것도 아니잖은가? 용 임주의 생각을 더 들어 보고 얘기를 나누자고. 어떤가?”
“……알겠습니다.”
“용 임주, 세 사람 중 둘이 찬성한다면 내가 직접 군림대전에 정식으로 안건을 올리도록 하지.”
‘이미 두 사람이 말을 맞춘 건가? 현 선림님이 안건을 제출하면 누가 반대를 할 수 있다고…….’
진류는 차마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외부 식구들의 무공도 높아졌으면 합니다. 지금이야 단원들과 함께 움직여서 희생이 적지만, 독자적으로 움직인다면 자신하기 힘듭니다.”
“같은 맥락이군. 강해져야 자격을 얻는다. 다른 것은?”
이번에도 현승이 나서주었다.
“맞습니다. 그것뿐입니다.”
“다르긴 하네.”
현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몽외를 돌아봤다.
용연의 제안은, 역대 임주들이 일 대 군림단주의 거처로 들어가기 전에 한 말들과 전혀 달랐다.
―강호삼대세력을 피로 씻겠다.
―누구를 보내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하나 같이 패기 넘치는 말들.
현승 역시 정해 둔 말이 있기도 했다.
“현 선배, 나예요, 몽외. 학림과 교림 들은 도망치기 바쁘고, 선림들은 눈엣가시처럼 피하던. 처음으로 그런 나를 피하지 않고 들이받더라고요. 봐요, 지금도 잘 모르는데 편들어 주게 만드는 걸. 크크크.”
몽외는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렁거림을 참아야 했다.
키는 자신이 컸지만 언제나 내려다보던 현승이 입단 이후 처음으로 칭찬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아무리 부정해도 본능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은 결코 현승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얘기 나온 김에 마저 하겠습니다. 몽 선림님, 담 교림님, 나머진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용연이 몽외의 짧은 생각을 깨뜨리며 끼어들었다.
그러자 몽외와 담영호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인상을 쓴 채 쳐다봤다.
“제가 해야 할 일은 했으니, 이제 두 분이 책임져 주실 차례잖아요?”
두 사람을 진류와 함께 불러달라고 한 이유다.
붙잡고 늘어지기 위해서.
“큭. 크크크.”
몽외는 양손으로 머리칼을 넘기며 웃기만 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선림으로 올라갈 생각이다. 답이 됐지?”
담영호는 몽외에게만 말했던 비밀을 꺼내놓았다.
그 대답에 현승은 웃음을, 진류는 입을 떡 벌렸다.
“크크크. 용 임주, 거기서 나오면 내가 확실히 뒤는 맡아 주지. 내 위로는 현 선배밖에 없을 거다.”
몽외도 거들어주었다.
“몽 선림, 단에 들어온 이후 이렇게 즐거운 건 처음이다. 임주는 짐을 떠맡으면서도 좋아하고, 그런 임주를 적극적으로 돕겠다며 좋아하고. 파하하하!”
현승도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짐을 벗어서 좋은 것도 아니고, 어린 임주가 걱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그 안에 학림, 교림, 선림은 사라지고 같은 서열의 동료만 존재하는 것 같지 않은가?
현승이 웃자,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따라 웃었다.
“하아…….”
현승의 웃음을 듣고서야 진류는 참았던 숨을 뱉어 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봤음에도 믿기 힘든 광경에 숨까지 참고 있었던 것이다.
“용 임주, 원래는 삼정이 해 주셨어야 하지만, 안 계시니 내가 대신하겠네. 임주로 임명된 자는…….”
진류는 잠시 말을 멈춰야 했다.
전하려는 규칙들이 현재의 임주인 용연과 맞지 않는 까닭이다. 결국 두 가지밖에 전할 수가 없었다.
―임주가 일 대 군림단주의 거처에서 죽는다고 해도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
―나온 뒤에는 마지막 관문을 넘을 것.
이 두 가지 외엔 용연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받아들이겠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용연은 진류가 머뭇거리는 이유를 알 것 같기에 오히려 더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 대 군림단주의 거처에서 한 가지만 완성하고 나오면 모두 해결될 문제였다.
군림단주로서의 자격.
이제부터는 용연이 일생일대의 모험을 벌일 차례다.
***
[삼 년, 어쩌면 좀 더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코 오 년은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용연.]
투신이란 별호도, 일정삼사회란 이름도, 묵 노야란 호칭도 적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서찰을 접는 것에 주저함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묵 노야란 믿음 때문일 것이다.
[이건 연서(戀書)예요.
항상 생각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해요.
꽤 오랫동안 홀로 지내야 할 것 같아요.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인데 운 좋게 기회가 와서 잡으려고요.
임무를 완수하면 가장 먼저 은패로 마차를 빌릴게요.
―용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