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랬군요.”
현승은 국진세의 편안해진 얼굴과 말투에서 용연이 어떤 보답을 했을지 알 것 같았다.
삼정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했을 것이다.
자신은 말을 듣고 나니 떠올랐는데, 고작 스물한두 살의 용연은 듣자마자 알려 준 것이다.
이런 면 때문에 몽외와 담영호가 용연을 지지한다?
더 있을 것이다.
용연에 대해 더 들어 보고 더 알아보고 싶었다.
어떤 녀석이기에 스무 살에 교림들과 학림들에게 인정을 받았는지.
삼정의 표정을 보기 전에 교림들과 학림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봤기 때문이다.
***
몽외는 선림들이 모인 곳으로, 담영호는 교림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왜 거절한 거냐, 몽 선림?”
서화는 몽외가 자리에 앉자마자 날 선 표정으로 따지듯 물었다.
“왜? 내가 학림이나 교림도 아니고, 이 나이에 고생하기 싫어서 안 하겠다고 한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소, 서 선배?”
몽외는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과장되게 지으며 서화를 향해 돌아앉았다.
“고생하기 싫으면 다른 선림들에게 넘겨도 됐잖아. 왜 애꿎은 젊은 목숨 버리게 만드느냐고! 왜!”
“크크크. 삼정은 안 그랬을 것 같소?”
“뭐? 여기서 왜 삼정 얘기가 나와?”
“여 단정도 본인이 정해 놓은 수순대로 단의 일이 진행될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용연 학림에게 된통 당하기 전까지는.”
“……봐준 것이 아니고?”
“그곳에 나 말고 담영호 교림도 있었는데, 우리가 말릴 새도 없이 싸움이 끝났소. 크크크. 고놈 참. 아주 심장이 발랑발랑하더군요.”
“네 편이다 그거냐, 몽 선림?”
“편…….”
꿈틀.
몽외는 굳은 표정으로 서화를 똑바로 쳐다봤다.
네 편, 내 편.
단의 최고 선배 중 한 명이고, 선림 서열 이 위에 올라 있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뭐냐, 그 눈은?”
“용 학림을 위해서라도 귀찮지만 치러야 할 것 같소, 서 선배.”
“치러? 뭘?”
“다음 달, 현 선배를 초대해서, 누가, 선배로 불려야 하는지 알려 주겠다는 말이오, 서 선배.”
몽외의 마지막 말은 서화보다 한 뼘 이상 높은 곳에서 들렸다.
―크크크.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몽외의 맞물린 치아 사이로 맹수의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힐끗.
서화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몽외의 동공이 건너편으로 향했다.
‘저놈도?’
몽외의 시선이 닿은 곳엔 담영호가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동공만 움직여 몽외와 마주쳤다.
씰룩.
담영호도 몽외가 왜 일어나 있는지 알 것 같은지 입가의 근육을 움직이며 웃었다.
***
용연은 현승을 따라 군림대전을 벗어나 계단 아래 바위 옆으로 난 아슬아슬한 길을 걷고 있었다.
앞장선 현승이 좀 더 속도를 냈던가?
현승의 키가 작아 보였다.
속도를 내 따라갔다.
그러나 한 번 멀어진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질 않았다.
‘어?’
용연은 순간적으로 지금 상황이 이 년여 전에 담영호를 쫓아갈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그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속도를 내면 쫓아갈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을 먹는 것조차도 불손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몽외가 날카롭고 투박하지만 그 안에 들끓는 용암을 담고 있다면, 현승은 부드럽지만 설원 한가운데 홀로 피어난 빙잠 같은 느낌이 있었다.
둘 다 포용과는 거리가 먼 느낌이기도 했다.
피식.
스스로 생각해도 제대로 비유한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웃기까지 하고 여유가 있네, 용연 학림은?”
“흡!”
용연은 너무 놀라 숨을 멈췄다.
언제 돌아서서 자신의 바로 앞까지 왔는지 두 눈을 뜨고도 몰랐기 때문이다.
“저기 공터 보이지? 그리로 와.”
“예? 예.”
용연은 얼른 대답하고 뒤따라갈 준비를 했으나, 말을 마친 현승의 신형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지고 없었다.
‘어, 엄청나다!’
눈앞에서 보고 있는 데도 눈으로 좇아가지 못할 정도의 빠름이라니.
머리칼이 쭈뼛 섰다.
군림대전에서 보여 주었던 나긋한 모습만 갖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압도적인 신법이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 현승이 가리켰던 공터로 내려갔다.
“저길 봐 봐.”
현승은 자신이 앉아 있는 바위로 용연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손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오후로 접어들 시간인데 다섯 가지 색들이 하늘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회색 빛 바위에서 피어난 것 같은 하얀색 띠, 그 사이사이 적당한 양의 햇빛을 붉게 반사시키는 편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푸르게 담는 하늘까지.
“멋있습니다.”
용연은 입을 벌리고 찬란한 광경을 바라봤다.
“방향으로 구분하면 서, 북, 동, 남이겠네. 차례대로 훑어봐 봐.”
현승이 좌에서 우로 손을 이동시켰다.
그러자 찬란하던 경관이 스르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더니 이내 투박한 거대한 바위 두 개가 겹쳐진 곳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저 바위 탑이 모든 아름다움을 빨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일 대 군림단주께서 거처를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 그럼 저 바위 탑이 일 대 군림단주님의 거처라는 말씀이십니까?”
“앞으로 네가 머물러야 하는 곳이다.”
현승은 잠시 말을 멈추며 용연을 향해 몸을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군림단주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그대로고?”
“예.”
“뭐가 너를 이토록 단단한 마음을 갖게 만들었을까?”
용연의 꾹 다문 입이 현승에겐 참으로 신기해 보였다.
무공이 강해지고 싶어서?
군림단을 이끌고 강호 정복이라도 꿈꾸고 있어서?
자신이 젊은 시절에 한 번쯤 해 봤던 생각들이었고 눈앞의 까마득히 어린 후배도 마찬가지 일 거라 여겼다.
“삼대(三代)의 염원일 것 같습니다.”
“삼대라면 자네의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도 단원이었다는 건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무공을 익히지 않으셨고,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음? 그럼 삼대란 말은 강조하려고 한 말인가?”
“……그럼에도 할아버지의 뒤를 제가 이어 가길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용연은 아버지를 떠올리자 슬퍼졌다.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짐에 아버지로서 져야 했던 짐까지 모두 견뎌 내신 분.
아버지가 안 계셨다면 용연은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시간들이 빠르게 눈앞을 지나갔다.
“간절히.”
현승은 용연의 눈이 깊어지는 것을 봤음에도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용연이 가진 간절함.
군림단원 중 그 정도 간절함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깊은 사연이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저곳에서 견디기 힘들 것이다.
“……이런 말씀까지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 있는 거냐?”
현승은 곧장 반응을 보였다.
“한 가지가 더 있기는 합니다.”
“말해 봐라.”
“제가…… 안가를 정말 좋아합니다.”
“음? 뭘 좋아한다고?”
“안가 말입니다. 동서남북에 위치한…….”
용연은 현승의 눈치를 살피느라 사방을 가리킨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들고 있었다.
꿈뻑.
현승은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용연이 어정쩡하게 손을 든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농담이 아닌 것이다.
꿈뻑.
현승은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안가를 좋아해서 저곳으로 들어가려 한다?
“푸흡! 흐어, 흐어…….”
눈꺼풀을 두 번 감았다 뜨며 쌓였던 숨이 한꺼번에 입으로 터져 나왔다.
상상도 못 한 대답이었다.
그만 웃고 싶었지만, 자꾸 조금 전에 들은 용연의 대답이 들리는 것 같아 멈출 수가 없었다.
“끄어, 끄어…….”
한번 터진 웃음은 배까지 잡게 만들었다.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웃었다.
‘현 선림님이 웃으시니 좋다.’
용연은 현승의 웃음에 전염된 것처럼 입을 헤, 벌리며 따라 웃었다.
“꺼흐, 꺼흐…… 네가 말하고도 우습나 보지?”
“아닙니다. 현 선림님이 웃으셔서 따라 웃는 중입니다. 웃는 얼굴 보면서 웃으면 기분이 더 좋아진다고 믿거든요.”
“……하아, 정말 걱정을 안 하는구나?”
현승은 숨을 길게 내쉬며 소매로 양쪽 눈꼬리를 문질렀다.
“또 웃으실까 봐 조심스럽긴 하지만, 저는 정말로 안가에서 지내는 걸 좋아했습니다.”
“……푸흡!”
억지로 눈을 다른 곳에 두려했으나 현승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일 대 군림단주의 거처가 어떤 곳이든, 이런 강심장이라면 보내도 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푸하하하!”
“하하, 하하하…….”
도전 자격을 용연에게 주기로 결정한 현승의 웃음은 시원해졌고, 그 마음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드러낼 순 없기에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는 용연의 뚝뚝 끊기는 웃음이 묘하게 이어졌다.
***
―……하하하.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웃음소리에 군림대전은 다시 한번 크게 술렁였다.
“크크크.”
몽외는 잇몸까지 드러날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계단이 아닌 앞쪽의 허공을 향해 걸어갔다.
파라락―.
바람이 시원하게 전신을 훑으며 장포까지 털어 준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다.
건의도 해 보고, 사람들을 모아서 방안도 모색해 보고, 그중 몇 개는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다. 물론 삼정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개별 행동이었다.
참여했던 단원들이 하나둘씩 단을 떠날 때는 배신자들이라며 화도 냈다. 그러다 교림이 돼서 뒤늦게 그들 대부분이 자의에 의해 떠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이십 년도 더 넘은 것 같다.
떠난 후배들을 찾아서 그들이 다친 상처와 잃은 무공을 치료해 주고 대체될 만한 무공을 찾아서 전해 주었다.
흑천(黑天).
밝은 곳엔 밝은 하늘이 존재하지만, 어두운 곳에도 어둠을 비춰 줄 하늘이 필요하다. 물론 하늘은 당연히 군림단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흑천이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할 녀석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군림단으로 되돌아갈 마음은 없으나, 뒤에서 영광에 일조할 수만 있으면 된다던가?
몽외는 설레고 있었다.
힐끗.
돌아보니 담영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현 선림님과 용 학림의 웃음소리네요.”
담영호는 몽외 옆에 서서 같은 곳을 쳐다봤다.
씰룩.
어찌어찌하다 여기까지 오게 됐으니 보는 곳을 맞춰 보는 것 정도는 허락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크크크. 들었다. 현 선배가 저렇게 웃는구나.”
“예? 현승 선림님의 웃음소리가 원래는 저렇지 않았습니까?”
“몰라. 한 번도 웃는 걸 못 봤거든. 희로애락까지 떨쳐 낸 건가 싶었는데, 그 정도는 아직 아닌 모양이다. 크크크.”
몽외는 치아를 모두 드러내며 한껏 입을 벌린 채 웃었다.
“웃지 않으려고 최연소의 나이로 선림에 올라가셨다는 농담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합니다.”
“흰소리 그만하고. 교림들이 놀라더구나. 왜, 선림으로 올라오기라도 하려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찍었지. 저번에 네가 한 말도 생각났고. 저 녀석의 뒤를 봐주라고 할 때.”
“아아.”
담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