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적휘는 삼정 옆에 몽외, 담영호와 함께 있는 용연을 쳐다봤다.
다른 학림들은 모른다.
―……개울물이 빤히 보이는데 손을 넣어 만질 수가 없는 것 같아서 그 부분만 녹여 줬을 뿐이야. 나는, 적 학림이 지금보다 더 강해져도 된다고 믿고 있거든. 나머지를 얻고 못 얻고는 이제 적 학림에게 달렸어.
용연이 안가에서 익힐 수 있는 수련법을 전해 주며 해 준 말이 떠오르자, 그때의 감동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적휘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가에 있었다.
용연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무공이 늘었다.
같은 시기에 후임으로 만났는데 불과 삼 년도 안 돼서 삼정 중 일인과 일대일로 겨뤄 패배를 받아 냈다.
학림들은 여벽이 한 말을 듣고 경악했지만, 적휘는 용연이 그사이 더 성장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말았다.
“우리에겐 안 보이지만 현승 선림님의 눈에는 보였던 것 아닐까요? 용 선배의 가능성이? 저는 진심으로 용 선배가 원하는 쪽을 지지할 겁니다.”
“저는 적 선배와 뜻을 같이 하겠습니다.”
“저도 강 학림과 같습니다.”
이서와 강섭이 적휘 쪽으로 슬쩍 몸을 이동했다.
용연의 후배 다루는 방법을 적절히 사용한 좋은 예였다.
피식.
적휘가 웃자 이서와 강섭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적휘가 용연을 바라볼 때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
“나는 담 교림의 안목을 믿는다.”
방적은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한마디를 꺼내고는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후임 시절부터 뭘 해도 질투 날 정도로 잘하던 녀석이, 자신의 단점까지 밝히며 후임이었던 학림에게 군림단주에 도전할 자격을 주자고 한다.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미친 짓을 아무렇지도 해 버리는 담영호였다. 하지만 녀석이 믿는 녀석이라면 자신도 믿을 수 있었다.
“방 선배, 저도 담 교림의 안목을 신용합니다. 그리고 뭐, 우리가 의견을 내도 선림들께서 알아서 잘 결정하지 않으시겠어요? 나이가 많이 어린 단주님이라…… 용 단주님? 어감이 어때, 우 교림?”
형도준은 우곤을 돌아보는 것으로 책임을 떠넘겼다.
“난 몽 선배님처럼 할 자신이 없으니, 찬성.”
우곤은 군림대전을 열게 만든 사람이 몽외란 말을 듣고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
왜 항상 삐딱한 눈으로 단원들을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 모든 행동이 군림단을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감시한 것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저도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교림들이 인상을 쓰고 있을 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등언이 입을 열었다.
“등 교림, 편안하게 해도 돼.”
형도준이 웃으며 등언을 독려했다.
“용연 학림은 사람을 안심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몽 선림님이나 담 교림 때문이 아니라, 저는 용연 학림에게 기회를 줬으면 합니다.”
등언은 용연 얘기를 꺼내자 자신도 모르게 탁목과 싸울 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웃었다.
“저도 용연 학림을 지지합니다. 이유는 등 교림과 같습니다.”
곽집도 의견을 밝혔다.
모용세가의 무리를 만날 때 보여 준 용연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곽집에게 용연이 사람을 안심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등언의 말은 크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곽 교림, 그것이 용 학림을 위하는 것 같은가? 좋아, 만에 하나 용 학림이 죽지 않고 살아서 나온다고 가정하자. 십 년 뒤라고 해도 서른 정도 될 거다. 다른 것 다 떠나서 스무 살이나 어린 사람을 주군으로 모실 수 있나, 곽 교림?”
듣고 있던 피항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곽집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소 단원들과 말을 거의 섞지 않던 피항의 질문에 당황해서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형도준은 짧게 혀를 찼다.
“쯧. 피 교림, 교림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아니야? 그동안 단 내의 서열에 불만이 많았나 보네? 가만, 그러고 보니 내가 피 교림보다 몇 살 어리지 않나? 설마 속으로 엄청 내 욕하던 거 아냐?”
“헙! 죄송합니다, 형 선배님! 절대, 절대 그런 생각 한 적 없습니다. 제가 잠시 얼이 빠져서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었습니다.”
피항은 재빨리 형도준에게 고개를 숙였다.
“곽 교림에겐 할 말 없어?”
형도준은 피항의 사과를 받은 후 곽집을 돌아봤다.
“곽 교림, 내가 실언을 했다. 용 학림이 그동안 보여 준 성장이라면 언젠가는 도전할 거라 믿지만, 지금은…… 무사히 나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아서 해 본 말이다.”
피항의 말을 들은 교림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저 원칙주의자인 피 교림도 용 학림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후후. 이 정도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다니. 더는 갈아치울 기록이 없으니 아예 새로운 기록을 직접 써 내려갈 모양이군. 현 선림님이 결정을 번복할 리는 없으니 일단은 가겠지. 살아서 나와라. 나이 따위야 개나 주라고 해.’
피식.
형도준은 피항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말로는 나이가 아니라 능력 순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단주님’이라 부를 자신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것과 무관하게 이십여 년 가까이 난다 긴다 하는 선배들도 넘지 못했던 관문을 이번엔 용연이 넘어 주길 바랐다.
죽을 수도 있다?
단원이 된 이상, 매 임무마다 껴안고 움직이는 질문이다.
용연이라면 질문이나 답을 바꿔서 나올지도 모르겠다.
감이 그렇다, 감이.
***
삼정은 학림들과 교림들, 그리고 선림들이 모여 있는 곳들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모두가 고민할 수 있는 문제를 찾아서 건네주는 역할만 했어도 됐거늘…….”
국진세는 눈앞에서 단원들의 열정 넘치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아쉬움이 입으로 흘러나왔다.
“못 봤으니까요. 머릿속으로만 보려고 했으니까요.”
잠사우 역시 눈에 후회를 담았다.
“이리로.”
여벽은 몽외, 담영호와 함께 앉아 있는 용연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제압됐던 혈은 이미 풀렸다.
국진세와 잠사우가 단원들을 보고 흐뭇해할 때, 여벽은 용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다.
자신이 용연의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몽외, 담영호와 나란히 앉아 저토록 차분하게 결정을 기다릴 수 있었을까?
저런 담력을 가지고 있기에 마지막 일장도 버텨 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벽의 손짓을 본 용연은 잠시 고민하다 몽외와 담영호에게 말을 하고는 다가와 옆에 앉았다.
용연은 마주 보기도 싫은지 여벽이 아닌 앞쪽을 보며 앉았다.
그 모습에 여벽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용연에게 인사나 받자고 부른 것이 아니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회의가 끝나기 전에 알려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다.”
“……말씀하시지요.”
“허허, 용서하라는 부탁 따윈 아니니 걱정 말고. 군림단주에 도전할 자격을 갖는다는 말의 의미는 알고 있느냐?”
“현승 선림님이 알려 주시겠죠.”
“일 대 군림단주께서 비운 지 이백여 년이 지났다. 몇 십 명의 도전자가 그곳에 머물다 나왔고, 전원 죽었다. 저 담 교림의 아버지이자 마지막 도전자였던 담묵 선림을 마지막으로.”
군림봉에서 살아나온 숫자는 절반이지만 결국 그들 역시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죽었다.
여벽이 굳이 전원이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였다.
“아!”
용연은 처음 듣는 말에 놀라고 말았다.
“몰랐느냐?”
“제가 아직 학림이라…….”
“허허, 그렇지, 아직 학림이지. 허허허.”
여벽은 용연의 대답에 헛웃음을 터트려야 했다.
맞다, 용연은 학림이었다, 학림.
“말씀의 요지는, 일 대 군림단주님의 거처에서 지내기만 하는 것만으로 도전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까?”
용연은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싶어 마음이 앞서갔다.
“맞다.”
“……설마 그게 전부라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그게 전부다.”
“…….”
“문제는, 그게 전부임에도 최근 백 년 동안 그곳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 불과 넷뿐이란 것이다.”
“네, 넷요?”
“모두 최고의 자질을 가졌고, 도전할 때 이미 선림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생존율이 오 할에 못 미친다.”
“오 할…….”
“너의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제야 감이 오느냐?”
여벽은 심각해진 용연의 표정을 보자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눈을 부릅떴다.
도전 자격의 조건을 들으니 겁이 좀 나느냐?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물었다.
“……네요.”
용연은 시선을 앞쪽에 둔 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혼잣말을 했다.
“뭐? 지금 뭐라고?”
“다행이라고요. 제가 안가에서 지내는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용연은 양손으로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 그제야 후련해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어디로 들은 거냐? 그곳은 안가처럼 쉬는 곳이 아니라 죽을힘을 다해 버텨도 살아나기 힘든 곳이라고 했잖느냐!”
여벽은 마지막 말에 힘을 주고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물었다.
철모르는 아이였던 건가?
날고 기는 수많은 기재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곳을 안가처럼 여기겠다고?
“여기까진 감사한 마음으로 받을게요. 더 들었다가는 이래라, 저래라 삼정 때처럼 저를 조종하려 드실까 봐 멈춰야 할 것 같네요.”
용연은 여벽의 눈빛이 삼정의 거처에서 봤을 때처럼 변하는 것을 보자 바로 일어나 돌아섰다.
“아, 이건 우려가 돼서 하는 말이에요.”
돌아가려던 용연이 멈춰 서서 여벽을 돌아봤다.
그러자 국진세와 잠사우의 시선도 용연을 향했다.
“세 분, 잘못된 세월을 살아오셨다는 걸 아신다면, 버리지 말고, 지금보다 더 나은 일로 갚으면서 사셨음 해요. 제게 필요한 걸 알려 주셨던 것처럼…….”
용연은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목젖을 울럭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국진세, 잠사우, 여벽은 용연이 담영호의 옆에 앉을 때까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봤다.
움찔.
여벽은 몸을 떨었고, 국진세와 잠사우가 자신들의 팔을 문질렀다.
“지, 지금…….”
국진세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으나 말을 맺진 못했다.
“길을 알려 주네요, 도전자께서.”
“헐헐, 허얼…….”
여벽이 국진세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고, 잠사우는 웃음으로 자신도 같은 생각임을 알려 주었다.
‘삼정의 표정이 달라졌다. 용연 학림이 무슨 말을 돌아간 거지?’
현승은 양옆에서 선림들이 이러저러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용연과 삼정이 무슨 얘길 나눴는지에 관심이 집중돼 들리지 않았다.
“현 선배님, 제 제안대로 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서화가 얘길 끝맺으며 현승의 대답을 바랐다.
“서 선림.”
“예, 현 선배님.”
“서 선림은 삼정 세 분을 용서할 수 있나?”
“……제가 만약 결정을 해야 하는 위치라면 단원들의 얘길 듣고 적절한 벌을 내릴 것 같습니다.”
“아니, 아니. 용서할 수 있느냐고.”
“삼정이 한 일은 단을 배신한 것과 매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다른 선림들은 어떤가? 서 선림과 다른 의견이 있나?”
현승은 소황선, 강검 등을 돌아봤다.
그러나 다른 선림들은 의견을 내지 않았다.
삼정이 벌을 받아도, 받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는 시간들을 보내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잠시 삼정 세 분을 만나고 와서 마저 듣지.”
말을 마친 현승의 신형이 삼정 앞까지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놀라운 신법에 선림들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세 분, 용연 학림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들려주시겠습니까?”
현승은 삼정 앞에 서자마자 나긋한 말투로 물었다.
“여 단정님이 군림단주에 도전할 자격조건이 무엇인지 알려 줬습니다, 현 선림.”
국진세는 솔직하게 답해 주었다.
“그것만으로 세 분의 표정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랬더니, 보답을 해 주더군요.”
국진세의 눈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보답요?”
“우리 세 늙은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 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