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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단주-124화 (124/232)

124화

여벽의 마지막 외침은 내공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일대를 쩌렁, 울리고 되돌아왔다.

“허허, 여 단정님, 진정하세요. 단원들이 알아주길 바라고 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단원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알아서 찾아낼 거라고 믿은 우리들의 잘못이기도 해요.”

잠사우는 여벽을 만류하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가 마지막엔 자신들을 이런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 책임을 전 단원들에게 돌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몽 선림, 제대로 알아보고 조치한 것이 맞나?”

현승이 몽외를 돌아봤다.

“다른 일로 찾아갔다가 열받아서 해코지 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서화가 현승의 말에 한마디 덧붙였다.

다른 선림들은 몽외와 서화가 앙숙임을 알기에 판단을 내리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크크크. 이거 제대로 한 방 맞았네. 인정. 여 단정과 잠 단정이 한 말 모두 인정합니다.”

몽외는 윗니와 아랫니를 모두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짝짝짝.

박수까지 쳤다.

“드디어 미친 거냐, 몽 선림?”

서화는 대놓고 비웃으며 초점을 몽외의 미친 짓에 맞추려 했다.

그러자 국진세가 담담하게 말을 얹었다.

“나도 한마디 거들지 않을 수 없구려, 현 선림. 아직도 준비가 안 되셨소? 담 선림이 죽었을 때, 누구보다 분노했던 그 현 선림은 어딜 간 거요? 단원들의 희생을 외면하고 닦는 도로는 등선하기 힘들 거요.”

국진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강직한 인상에 천생 무인의 근골을 가진 소황선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섰다.

“세 분,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현 선배님께서 어떻게 해야 세 분을 도울 수 있는지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소 선림, 이제 와서 말이오? 모든 단원들 앞에 죄인으로 끌려와 심판까지 받은 뒤에 말이오? 허허허.”

국진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절망이 이토록 쉽게 다가와선 안 되는 것인데.

고작 몇 마디 말로 흔들었을 뿐인데 선림들이 흔들리니 교림들과 학림들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것이 그동안 탄탄하게 다져 온 군림단이던가?

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인지.

국진세의 허허로운 눈길이 여벽과 잠사우를 향하자, 두 사람 역시 같은 마음인지 회색빛이 감도는 동공들이 마주쳤다.

그때였다.

“저들은!”

파여진 홈 끝줄에 앉아 있던 용연이 일어나며 삼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모든 단원들의 시선이 용연에게로 집중됐다.

“저들은, 단의 이름을 더럽힌 죄인들입니다. 단을 위해 외부 세력과 거래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으로 거래했습니다. 서약 첫 번째, 영광스러운 순간에만 군림단의 이름을 입에 올려야.”

―한다!

용연이 선창을 한 것처럼 학림 전원과 교림 몇몇이 복창을 해 주었다.

쫘악!

용연은 동시에 터져 나온 한마디에 소름이 뒷골까지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누구?”

현승은 시선을 용연에게 둔 채 진류를 돌아봤다.

“용연 학림입니다.”

“학림?”

진류의 대답에 현승은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한 번 더 물어봤다.

“학림 맞습니다. 그리고 삼정을 이곳으로 데려온 세 단원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세 단원? 몽 선림 혼자서 벌인 일이 아니고?”

서화가 미간을 찌푸리며 몽외를 돌아봤다.

몽외는 마치 서화가 돌아볼 줄 알았다는 듯이 윗니와 아랫니를 맞문 채 웃고 있었다.

“담영호 교림과 용연 학림이 몽외 선림을 도왔습니다.”

“도왔다?”

현승은 흥미로운 표정이 되어 진류를 쳐다봤다.

“여 단정이 패배를 인정했다고…….”

진류는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말끝을 흘리며 무의식적으로 여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벽은 용연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소름이 돋아 양손을 앞으로 모아야 했다.

덩치만 컸지 순하기만 한 초식동물들 사이에 어떻게 저런 육식동물 같은 녀석이 탄생할 수 있단 말인가?

등장과 동시에 군림대전을 장악한 현승 때문에 저 몽외조차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있는데, 고작 학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자리에 서길 잘했다.’

여벽은 웃음이 나왔다.

선림들에게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도전이란 말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운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선림들.

수련에 정진하도록 단 내부의 환경을 선림들 위주로 조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한 가지를 바꿨다가 결국 모든 것을 바꾸는 지경까지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바꾼 이 수동적인 환경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인재가 탄생한 것이다.

기적이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저 당차게 일어난 녀석이 무슨 일을 했는지 말이다.

“내 비록 용연 학림에게 패했다고 인정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무공에 국한된 일일뿐, 죄를 인정한 것은 아니네.”

쿵!

군림대전에 있는 모든 단원들의 귀에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무, 무슨…….”

“내가 들은 게 맞아? 용 학림이 어쨌다고?”

“요, 용 선배님…….”

학림들은 경악을 넘어 경외가 담긴 눈으로 용연을 바라봤고, 교림들은 황당함과 허탈함, 그리고 대견함을 드러냈다.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다 한동안 소식이 없어서 벽에 부딪친 줄 알았더니…….”

“교림 서열 일 위까지 올라갔던 분을?”

“자질이 뛰어난 거야 알고 있었지만, 여 단정님을 이겼다고? 그것도 혼자서? 하!”

형도준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옆에 앉은 우곤은 안가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용연을 떠올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어리바리했던 녀석이 저 당당히 선 녀석과 같은 녀석이라니.

“원한 건지 저절로 저렇게 되는 건지.”

“뭐가?”

형도준이 우곤의 혼잣말을 듣고 되물었다.

“안가에서도 형 교림을 비롯해 담 교림, 양 학림까지 모두 용 학림에게 관심이 컸잖아. 그때는 그깟 기록 깨는 게 무슨 대수냐고 했는데, 지금 보니 대단한 사람이 맞네.”

우곤이 피식, 웃었다.

“그러네. 그때 그랬었지.”

형도준도 용연을 안가에서 만났을 때를 떠올리곤 특유의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선림들께선 우리보다 좀 더 놀라신 것 같네.”

우곤이 눈짓으로 선림들을 가리켰다.

“몽 선림, 학림에게 여 단정님을 맡겼다고?”

현승은 다른 선림들이 용연에게 집중할 때, 몽외를 돌아봤다.

“크크크. 기특하지 않소, 현 선배? 국 단정과 잠 단정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느라 녀석 쪽은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녀석이 왜 나섰는지 알 것 같소.”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몽외는 특유의 치아를 맞물린 채 웃었다.

“꽤 단단해 보이긴 하지만…….”

“녀석의 할아버지가 용잠 선배요.”

“용잠?”

“담 선배가 죽고 난 뒤 떠났던 선배 말이오.”

“아아, 용잠 교림.”

현승은 몽외의 덧붙인 설명 때문에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즉에 기억났으면서.”

몽외는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뭐? 지금 뭐라고 했지, 몽 선림?”

현승의 목소리가 훨씬 나긋해져 있었다.

화가 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기억에 현 선배가 임무를 마치고 복귀해서 용 선배를 찾았던 기억이 나서 말이오. 아닌가? 크흐.”

몽외는 슬며시 현승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학림이 용잠 선배의 손자라고?’

현승도 더는 몽외를 추궁하지 않았다.

용잠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기억이 이십여 년 전의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 선배님,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 뭘 말인가, 현 교림?

―놈들이 저를 암습할 줄 어떻게 아신 겁니까?

―누가 봐도 자네가 나보다 강한 걸 알아. 그런데 그 많은 인원을 내 쪽으로 배치했다? 뻔한 거 아닐까? 진짜는 자넬 노리는 거지.

―……그게 전부입니까?

―괜찮아, 나도 선배들에게 도움받아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니까.

그 장면을 몽외가 봤던 모양이다.

당시는 누구보다 빠른 시간에 교림이 됐다고 우쭐하던 시기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절벽이 무너지더니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용잠이었다.

용잠은 떨어지는 바위를 가리키며 조심하라고 알려 주었고, 바위와 함께 떨어지던 암습자들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그들은 모두 허리를 반으로 잘라 죽였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자신도 몰랐던 적들의 은신을 용잠이, 자신보다 무공도 약하고 기대도 받지 못하는 일개 선배 한 명이, 먼저 알고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것이다.

아직도 당시에 나눴던 대화를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고 갚아 주려 했지만, 이 대 군림단주에 도전했던 담묵의 죽음 이후 용잠 역시 단을 떠났다.

‘용잠 선배와 비슷한 면이 있네.’

“기억이 났습니까, 현 선배?”

“그래, 용 학림은 할아버질 많이 닮은 모양이다.”

“나야 용잠 선배를 뵌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소.”

“단에서 인정을 해 주든 말든 할 말 다 하시고, 때에 따라서는 규율도 어기셨던 분이다.”

“크흐, 할아버지 판박이로군요.”

“그래서 궁금해졌다. 용잠 선배님은 이유 없이 나서시진 않았거든.”

현승은 자리에서 일어나 삼정에게로 다가갔다.

세 사람의 주름진 얼굴을 보자 참 많은 세월이 흘렀구나 싶었다.

“삼십 년 가까이 된 것 같네요. 이렇게 스물아홉 명 전원이 모인 적이. 기억나시죠, 세 분? 담 선배께서 성공할 거라 확신하며 다들 난리도 아니었죠.”

현승이 주위를 둘러보며 웃었다.

담묵을 보며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고 다짐까지 했었는데.

“……오 년으로도 모자랄 줄이야.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였음에도 그렇게…….”

국진세 역시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죄도 인정하지 않고, 다른 대안도 말씀하지 않으시겠다면, 뭘 하고 싶으신 거죠?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면 최대한 단원들을 설득해서 들어 드리겠습니다.”

현승은 자신이 먼저 삼십 년 전으로 데려가 놓고 감흥을 순식간에 깨 버렸다.

그러자 여벽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걸렸다.

현승이란 사람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아는 단원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군림단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명실상부한 최고수.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 십여 년째 수련에 정진하는 완벽주의자.

이런 사람이 회유를 하려 든다.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짐작하고 있다는 뜻이다.

좀 더 독해져야 할 모양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타 문파의 장로와 같은 역할을 해 왔다고 자신할 수 있소. 물론 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과중한 일들이 대부분이었지요. 헌데! 평생을 바쳐 노력한 결과가 오늘과 같은 대접이라면 더는 사양하겠소. 만약 우리가 돌아가길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거처로 쳐들어온 몽외 선림, 담영호 교림, 용연 학림 세 단원을 단의 명부에서 제적시켜야 하오.”

여벽은 목이 갈라지도록 크게 소리치며 몽외, 담영호, 용연을 차례로 지목했다.

“형도준 교림입니다. 저는 담 교림을 믿습니다. 현승 선림님, 여 단정의 요청을 들어주시려면 저부터 제적시켜 주십시오.”

형도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양안 학림입니다. 저 역시 용연 학림을 믿습니다. 형도준 교림과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양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교림들과 학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동참했다.

“불쌍한 후배만 남네. 몽 선림 편에 서 줄 선림은 없는 건가?”

현승은 상황이 불같이 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여전히 나긋한 말투를 유지하며 몽외를 놀렸다.

“크크크. 현 선배, 너무 오랫동안 혼자 지낸 거 아닌가요? 어느 쪽을 봐야 하는지 판단이 안 섭니까?”

몽외는 웃으며 말을 하고 있었으나, 입가에 미미한 경련을 참고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몽 선림, 나는 자네가 참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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