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잠사우가 삼정의 마지막 자리를 채우던 날 모든 계획은 세워졌다.
국진세와 여벽은 그동안 단 내부의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해 왔다.
조금만 조언해 주면 금방 해결될 일인데.
순서만 바꾸면 훨씬 좋은 결과를 얻었을 텐데.
입이 있으면서도 말을 건넬 수 없으니 하루하루가 무료한 것은 당연했다.
그때, 열정 넘치는 신입 단정 잠사우가 들어온 것이다.
무료한 국진세와 여벽, 열정 넘치는 잠사우.
재미를 잃어버리고 살던 노강호들의 군림단 재정비가 그렇게 시작됐다.
“……여 단정님, 언젠가는 단원들이 알아줄 겁니다.”
국진세는 마차 안에 함께 타고 있는 여벽을 보며 웃었다.
제안을 여벽이 했더라도 결정은 스스로의 몫이다.
결과 역시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절레절레.
여벽은 국진세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잠사우를 쳐다봤다.
“국 단정님, 잠 단정님, 제 얘기 잘 들으세요.”
여벽은 국진세와 잠사우의 시선이 모이자 비장한 어조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설마 아직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국진세와 잠사우는 여벽의 결의에 찬 눈빛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죽어야 단이 삽니다. 언제나 그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해 온 모든 일은, 단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원하는 방향은 아니지만…….”
여벽이 잠시 말을 멈추고 국진세와 잠사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강해졌지요.”
“허허,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네요.”
국진세와 잠사우가 여벽의 말에 동의를 해 주었다.
“그럼 이제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아시겠네요.”
여벽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국진세와 잠사우는 이내 여벽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
휘이잉―.
바람이 텅 빈 공간을 휘감았다 풀어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삼정을 제외한 스물여섯 단원을 모두 소집시켜 한자리에 모았다고 했다.
군림대전(君臨大殿).
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위용 가득한 전각 정도는 기대한 것이 사실이었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용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군림대전의 첫인상은 충격적이었다.
위쪽에 둘, 아래쪽에 둘.
총 네 곳에 거대한 반석이 자리했고, 중앙을 비워 두고 그 주위를 둥글게 세 겹으로 포위하듯 홈이 파여져 있었다.
대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휑한 공간.
먼저 자리한 교림들과 학림들은 눈을 감고 있어 용연이 온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툭.
담영호는 눈짓으로 용연에게 맨 뒷줄에 앉으란 신호를 주고는 앞쪽에 앉았다.
몽외는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선림들의 자리인 맨 앞줄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뒤에서도 몽외에게 풍기는 허무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용연도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순간, 여벽의 육방진천장이 전신을 짓누를 때가 떠올랐다.
‘응아린 덕분에 겉은 상하지 않았고, 안가의 괴물들이 여 단정의 힘을 중화시켜 줘서 살 수 있었어.’
부르르.
그때의 충격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아 몸이 저절로 떨렸다.
사실,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잃은 이유는 여벽 때문이 아니었다.
여벽의 육방진천장을 견뎌 낸 응아린과 안가의 괴물들이 좀 더 용연의 몸을 잠식하기 위해 폭주한 까닭이다.
머릿속 수차의 회전이면 될 줄 알았는데 그 또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진 대교님과 삼정 세 분이 도착하셨습니다.”
용연이 생각을 좀 더 이어 가려 할 때, 교림 서열 이 위인 방적이 일어나며 뒤쪽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네 사람을 소개했다.
방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앉아 있던 전 단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헉, 헉…….”
“컥, 흐어…….”
잠유기의 효용은 군림단원을 살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금제를 가할 수도 있다.
진기를 운용할 수 없도록 금제를 당한 삼정이 턱까지 찬 숨을 힘겹게 내쉬며 모습을 드러냈다.
선 채로 잠시 쉰 세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겨 중앙의 빈 공간으로 갔다.
고단해 보이는 표정들이다.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세 사람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단원들에게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헐헐. 이 얼마 만에 오는 군림대전인고. 저 거대한 하늘과 끝도 없이 이어진 이 땅. 참으로 영광스러운 곳이야.”
국진세의 힘없는 목소리가 주위로 퍼졌다.
멈춰 선 삼정은 가장 앞줄에 앉은 몽외를 보고 나서 담영호, 용연 순으로 눈을 마주했다.
그들의 눈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어.”
국진세는 용연, 담영호, 몽외를 향한 말인지, 스스로를 변호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꺼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국 단정님, 우린 단의 규율에 따라 평생을 바쳤습니다.”
여벽이 국진세의 말을 받았다.
아주 잠시 국진세의 눈에 고민이 깃들었다 사라졌다.
“맞습니다, 여 단정님의 말씀처럼 우린 우리의 역할, 단의 균형을 맞추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진 대교, 우린 군림대전의 결정에 따를 것이네.”
잠사우는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꿈틀.
잠사우의 말이 끝나자 용연, 담영호, 몽외, 진류의 표정이 동시에 와락, 구겨졌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그동안 자신들이 해 왔던 모든 일을 인정했던 자들이 말을 바꿨기 때문이다.
군림대전은 장소인 동시에 군림단 전체 회의를 뜻한다.
용연 등 네 명을 제외하고 다른 단원들은 무슨 일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림대전의 결정에 따르겠다?
용연 등은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것이 당신들의 선택입니까? 욕심이란 것을 알면서도 부정할 기회가 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진류는 할 말을 잃고 삼정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진 대교, 한마디만 덧붙이지. 우리들이 잘못하고 있다면 왜 선림들이 그동안 가만히 있었을까? 그들은 우리의 결백을 알기 때문일 걸세. 우린, 결백해!”
여벽은 피가 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뜨며 진류를 노려봤다.
‘여 단정님, 이미 늦었습니다.’
진류는 여벽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단원일 때 보여 주었던 단을 위한 희생이 인정돼, 삼정의 자리가 비었을 때 선림들의 만장일치로 삼정의 일인이 된 사람이었다.
“선림들은 언제 오시는 건가!”
여벽이 다시 호통을 치듯 외쳤다.
“늦었소.”
스스슷.
여벽의 호통에 대답하듯 들려온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 시작된 여섯 개의 잔상이 선림들의 자리로 이어졌다.
‘아!’
용연은 기척도 느끼지 못하다 순식간에 채워진 선림들의 자리를 보고 엄청난 신법에 놀라 입까지 벌렸다.
“선림님들을 뵙습니다. 대교 진류, 서찰로 전해 드렸던 내용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진류는 몽외를 제외한 여섯 선림들에게 예를 갖춘 뒤, 중앙에 서 있는 삼정을 향해 돌아섰다.
“삼정은, 외부 세력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이런 문양을 만들었습니다.”
진류는 종이에 도와 도끼가 교차된 그림을 선림들에게 보인 후, 말을 이어 갔다.
“그 문양으로 외부 세력에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최근 사야벌의 무리들이 사천 땅을 넘어온 적이 있는데……(중략)……그 대가로, 삼정이 정한 교림이 자진해서 탈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밝혀낸 숫자만 십여 명에 이릅니다.”
모든 설명을 마친 진류는 선림들을 돌아봤다.
당연히 가장 먼저 군림단 서열 일 위인 현승의 반응을 살폈다.
은발에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피부, 조화를 이룬 이목구비, 반듯한 자세.
실제 나이는 육십이 넘었지만 겉으로는 진류보다 어려 보였다.
“세 분, 진 대교가 한 말을 모두 인정하시나요?”
현승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삼정을 향했다.
“인정 못 합니다.”
여벽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분들은요?”
현승은 여벽의 말을 흘렸다.
“단을 위한 조치였을 뿐입니다, 현승 선림.”
“국 단정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우릴 벌하겠다면 따를 수밖에 없지만, 적과 내통을 했다거나 단원을 다치게 했다는 말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잠사우는 말도 안 되는 모략이라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크크크. 이거였나? 이런 식으로 우릴 기만했던 거였어?”
몽외는 더는 듣고 있기 힘들었는지 나직한 조소와 함께 양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몽외 선림, 자리에서 일어나면 무력으로 받아 낸 허위자백이라 여기고 자넬 크게 혼낼 거야.”
현승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긋한 목소리로 경고를 하자, 몽외는 인상을 쓰며 현승을 노려봤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크하! 현 선배, 내 성격 알잖습니까? 없는 걸 있는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입. 그 입.”
현승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몽외를 쳐다보며 짧게 두 마디를 건넸다.
바르르.
몽외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빌어먹을! 이런 게 싫다고. 저 인간이 말하면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따르게 되는 게 싫다고!’
몽외는 현승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한 번 경고를 했으니 손을 쓸 것이다.
그렇기에 눈으로만 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저 고요한 동공 안에 감춰 둔 무시무시한 폭군이 밖으로 나오면 말로만 끝나지 않기에.
“몽 선림, 네가 아무리 제멋대로 사는 인간이라도 선배님께서, 특히 현 선배님께서 말씀하실 땐 끝까지 들어.”
두상이 크고 턱은 좁은 역삼각형 얼굴의 노인이 단추 구멍 같은 눈으로 몽외를 보며 끼어들었다.
“크크크. 서화 선배, 삼정이 조금 전처럼 부정할까 봐 부연 설명을 드리려 한 것뿐이오.”
몽외는 현승을 대할 때와 달리 서화에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답니다, 현 선배님.”
서화는 몽외의 태도에 익숙한 듯 직접 상대하지 않고 현승에게 고자질하듯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아직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던 강검, 소황선, 공흠, 어거명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선림들만 있는 자리도 아니고 교림들과 학림들이 지켜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끌려오긴 했지만, 잘못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럼 애초에 이런 자리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요? 진 대교,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현승은 몽외와 서화의 투닥거림을 무시하고 진류에게 진행을 이어 가도록 권한을 주었다.
“……선림들께서 교림과 학림 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려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결정을 기준으로 제가 몇 가지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진류는 현승이 원하는 대답을 생각하느라 잠시 주저했으나 이내 소신껏 원칙에 대해 답했다.
“그렇군.”
현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단 한 번도 주관해 본 적 없는 군림대전회의다.
아무리 어릴 때부터 다음 대 군림단주로 내정되다시피 했던 현승이라도 모르는 것을 잘 아는 척할 수는 없었다.
“진 대교, 이것이 현재의 군림단일세.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데엔 더할 나위 없이 최적화되어 있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쪽짜리 무인. 내 말이 틀렸나?”
교림들과 학림들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현승의 결정을 기다리던 그 순간, 여벽의 냉담한 목소리가 절묘하게 끼어들었다.
군림대전에 침묵이 흘렀다.
처음 보는 사람이 둘일 경우 누구의 편에 서겠느냐고 질문하면, 좀 더 큰 소리를 내거나 강렬한 인상을 준 쪽을 대부분 택하게 된다.
선림들은 상황 파악조차 안 되어 있는 반면, 삼정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히 자신들의 무고를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었다.
삼정이 선림에 오르지 못한 교림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서열이 선림들이란 것을 알면서도 심정적으로 삼정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나머지 반쪽을 맡아 준 걸세, 우리가! 선림들이 수십 년 동안 이 대 군림단주에 도전할 수 있도록, 수련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교림들이 더 많은 적들과 싸워 이기도록 적절한 배치에 도움을 주었고, 학림들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교림과의 연대를 고민했네. 우리가! 다른 단원들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